7월 25일, 주말 아침 전국 각지에서 바둑동호인들이 다양한 교통편을 이용해 충북 제천시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올해로 7회째를 맞는 청풍명월 바둑축제는 기량을 가늠하는 대회라기보다 바둑을 즐기고 동호인들과 온기를 나누는 축제로 해마다 형식이 진화하고 규모가 성대해지는 큰잔치다.
☞ 사진보러가기(클릭) "잊지 못할 '청풍명월 바둑축제" 축제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이들도 지방자치단체나 협회가 아니고 그냥 순수한 바둑 동호인들이다. 그래서 의례적인 절차가 배제되고 바둑지원을 빙자한 홍보성 복선을 찾아볼 수 없다. 맑은 바람 밝은 달, 청풍명월이란 이름처럼 참으로 순도 높은 아마추어들의 모임인 것이다.
청풍명월 바둑축제는 해마다 의림지, 청풍관광단지, 학현마을 등 제천의 명소를 차례차례 찾아다니며 열렸었는데 올해는 감악산 기슭의 명암계곡 산채마을이 선정됐다. 숲이 울창하고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아서 관광객들의 손때를 타지 않은 명암계곡은 제천이 감추고 있는 보석이요 비경이다.
 ▲ 행사장인 산채건강마을에는 바둑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찾아온 차들로 꽉 찼다. |
굽이굽이 계곡을 타고 돌아 산채마을 입구에 도착하니 주차장에 전국 팔도의 번호판을 단 차량들이 가득 들어차있었다. 34개 팀 170명 선수와 팀에 소속되지 않았지만 축제가 좋아 제천을 찾아온 바둑 동호인을 모두 헤아리니 300여 명. 그 많은 인원이 바둑 티셔츠를 입고 타 지역 타 팀 대표들과 포옹하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1팀 5인조 단체전으로 치러지는 이 바둑축제에는 전국적으로 결속력이 강한 동호회가 매년 참가하고 있는데 타이젬을 대표해서 프바사, 하늘문, 노털동호회가 출전했다.
 ▲ 참가자들의 대국 모습. |
타이젬 단(段) 수가 치수의 기준이다
개회선언과 조 추첨이 끝나고 길다란 목조회랑 대국 장에 질서정연하게 앉은 각 동호회 선수들이 바둑돌을 집어 들었다. 다른 바둑대회와 달리 청풍명월 바둑축제에서는 급수에 따라 치수가 주어진다. 기준은 언제부턴가 자연스럽게 타이젬 급수가 적용됐다고 한다. 타이젬의 동호회원들이 열성적으로 참가하고 활동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기에 하급자나 중급자들이 긴장하거나 위축되지 않고 마음 편하게 바둑을 즐길 수 있으며 아무리 고단자라 할지라도 화점 가득 흑 돌을 깔아놓고 덤비는 하수들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시달리고 쫒겨다니다 어이없이 패배하는 판이 종종 출현한다. 그래서 평균 기력이 높다고 반드시 우승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 대불대학교 팀과 박성균 아마7단이 이끌고 온 안산의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대국 모습. 전 대국이 모두 접바둑으로 열리고 있다. |
승패를 떠나 정을 나누고 우의를 다지는 수담은 자체로 즐거운 법. 게다가 대국 장 아래로 콸콸콸 계곡물이 흐르고 삼림의 정기를 머금은 바람이 부드럽게 처마 밑으로 감도니 낙원이 따로 있고 신선이 따로 있을까?
실내였다면 눈치깨나 살폈을 노기객(老棋客) 흡연자들이 당당하게 흰 구름을 뿜어댄다. 순식간에 바람이 연기를 분해한다. 여성과 어린이들이 많지만 그다지 괘념하는 표정이 아니다. 야외대국 장에서 끽연을 즐기는 바둑 인들의 기력이 한 눈금쯤 상승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 저녁을 먹기 위해 참가자들이 길게 줄을 서고 있다. |
1,2차전을 끝내고 저녁식사 시간.
메뉴는 제천이 자랑하는 명암 웰빙 산채비빔밥이다. 그리고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바비큐 파티가 벌어진다. 원래 바비큐의 재료인 돼지는 우승 상품으로 걸린 부상이다. 그런데 하루 먼저 가불해서 모든 참가자들이 나눠 먹는다. 누가 우승하든 전체를 위해 희사하는 게 청풍명월 바둑축제의 관례다. 지난 해에는 마찬가지로 염소가 걸렸다고 했다.
300명이 밤새 마실 어마어마한 분량의 막걸리를 강화도의 동호인 한 분이 기꺼이 협찬했다. 밤이 깊어가면서 술잔이 빠르게 돌아간다. 다음 날 대국의 승률을 올리기 위해서 경쟁 팀 선수들을 만취하게 만드는 것도 전술이라면 전술일 터.
한옥마을 펜션에 각 팀 숙소가 배정됐지만 잔디밭과 테이블에 둘러앉아 밤을 지새우는 동호인들의 숫자가 훨씬 많아 보인다. 미인의 눈썹처럼 가느다란 초승달이 떠올랐다. 가늘어도 청풍명월의 고장에서는 초승달도 몸살 나게 밝았다.
 ▲ 이날 참가자들은 새벽까지 회포를 나누었다. |
우승도 좋지만 꼴찌도 좋다
7월 18일(일) 축제 이틀째 3~5차전이 차례로 진행되면서 각 동호회 성적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매 판 새로운 상대를 만나는 참가자들의 표정이 반가움으로 밝아보였다. 휴식시간에 다른 지역 다른 동호회 친구들과 명함을 교환하는 모습에서 정감이 흐른다. 이윽고 점심 식사 후 모든 대국이 끝나자 현황판에 점수가 기록된다.
우승 : 양산박
준우승 : 청주최강
3위 : 부산 심우회
4위 : 한 대기우회
 ▲ 우승을 차지한 양산박 팀. |
여기까지는 성적순으로 발표하지만 그 이후는 주최 측 마음이며, 상품 또한 부피를 가늠할 수 없다. 축제의 날짜가 26일이라 해서 26위 일산기우회가 우승상품보다 값비싼 장뇌삼 세트를 받게 된다. 그런데 일산기우회가 상품을 양보해 건강이 좋지 않다는 한 동호회원에게 돌아간다. 그 대목에서 감동의 박수가 터져 나온다.
그 뒤로 제천 농산물 감자와 옥수수가 부상으로 수여되자 수상 팀원들이 미친 듯 환호한다. 우승 팀보다 더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최다참가상은 박성균 사범이 이끌고 온 안산의 청석기우회와 부산 팀이 공동수상했다. 인기상은 부산의 샛별회 9공주. 그리고 평균연령이 가장 높은 타이젬의 노털클럽은 화끈하게 꼴찌를 차지해 가장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 노털클럽 팀. |
1년은 너무 길다
청풍명월 바둑축제에 한 번 참가한 이들은 다음 해에도 거의 다시 온다고 한다. 이른 바 중독이다. 부담 없고 재미있고 바둑친구를 많이 사귈 수 있으며 제천의 아름다운 풍광과 넉넉한 인심에 짧고 강렬한 여름 피서를 즐길 수 있어 너무 좋다고 입을 모은다. 그래서 이 축제는 해마다 사람이 늘어난다. 주최 측이 힘들여 홍보하지 않아도 바둑을 사랑하는 동호인들의 입을 통해 축제의 존재가 널리 전파되기 때문이다.
“아이, 또 일 년을 어떻게 기다리죠?”
수원에서 달려온 여성기우 한 분이 축제를 주최한 제천의 임창순 사범에게 애틋한 엄살로 작별인사를 전한다.
“내년에는 더 준비를 많이 해서 기다리겠습니다. 꼭 다시 오세요.”
 ▲ 바둑대회 진행업체인 'A7'의 홍시범 씨가 시상식을 진행하고 있다. |
폐회가 선언됐지만 동호인들은 현황판 앞에서 프로기사 노영하 9단, 유건재 8단과 기념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명암계곡을 빠져나오는 길에 축제 참가 차량들이 열차처럼 꼬리를 문다. 모두 유리창을 내리고 손을 흔든다. 아쉬움을 그리움의 화석으로 가슴에 묻은 채 1박2일 청풍명월 바둑축제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바둑동호인들이 주관하고 참가자들이 회비를 모아 형식의 구애 없이 즐거운 한마당을 펼친다는 점에서 청풍명월 바둑축제는 바둑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
축제는 참가하는 모든 이들의 열정과 애정의 에너지를 결집해 하나로 응축하는 생산 활동이다. 경쟁의 속성보다 동호인들의 바둑사랑을 확인하는 따뜻한 축제가 더 많아진다면 우리 바둑문화도 한결 더 풍성해지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청풍명월 바둑축제는 우리 아마 바둑계의 지평에서 힘차게 돌아가는 풍차라고 찬사를 얹어 보낸다.
 ▲ 축제를 마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