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에서 만난 김신영.“마음고생 많았지?”
“네, 그렇지만 이젠 괜찮아요. 이유를 떠나서 제 모습이 예의에 어긋나게 비춰졌으니 제 잘못이죠.”
그녀가 서글서글하게 웃는다.
그날 그녀는 몸살감기로 컨디션이 최악이었고 조민수 사범도 마찬가지였다.
의연하게 대국했지만 두 사람 모두 바이오리듬의 그래프가 바닥을 기고 있었다.
워낙 중요한 판이라 내색하지 못하고 혼신을 다했다.
그녀가 패배를 인정한 순간 조민수 사범이 말했다.
“잘 뒀다.”
그 어투에서 복기하지 말고 끝내자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일어났는데 감당하기 어려운 후폭풍을 맞아야했다.
입단 실패, 지지옥션 6연승, 구설수로 이어졌던 봄날은 롤러코스트처럼 그녀를 흔들어댔다.
그러나 다행히 그녀는 신록처럼 푸르렀다.
▲신호등을 기다리던 도중 근처 꽃밭에서S#2. 신호등을 기다리며
비가 내리는 건널목에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린다. 좀처럼 신호가 바뀌지 않는다.
누군들 기다림에 익숙할까?
김신영은 항상 입단 우선순위에 드는 유망주로 손꼽히면서도 결정 국에서 좌절하며 5년을 흘려보냈다.
전바협 사무국장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바둑에 입문한 것이 1998년 토등학교 1학년 때였다.
6학년 때 여자연구생이 되어 여고생 때부터 입단이 가시권에 들어왔다.
그 후 스물 한 살인 지금까지 그녀는 때를 기다리는 중이다.
▲파란불을 기다리는 김신영.“왜 이렇게 파란 불이 안 켜지지?”
건널목에서 우리는 우두커니 오래도록 기다리기만 했다.
그때 그녀가 피식 웃는다.
“가만 보니까 이 신호등은 수동조작인가 본데요?”
그랬다. 보행자가 건너고 싶을 때 버튼을 눌러 신호를 바꾸게 되어 있었다.
거기서 문득 기다림을 생각한다.
때로는 사고와 성찰과 행동이 기다림을 종식할 수 있다는 것.
그녀가 안내문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아둔한 필자는 한없이 건널목에 서 있었거나 아니면 무단횡단을 했으리라.
▲미용실 원장의 권유에 미용실 의자에 앉은 김신영. 그러나 이날 머리를 하지는 않았다.동네에서 소문난 순대국으로 배를 채우고 골목길을 걷는데 누군가 우리를 부른다.
“형님, 어디 가세요?”
축구를 함께 했던 미용실 원장이 유리문을 열고 나온다.
평소에는 길을 지나쳐도 씩 미소만 날리던 친구가 튀어나온 이유는 김신영의 존재 때문이다.
그가 다짜고짜 신영을 미용실 안으로 초대한다.
“배우 맞죠? 키도 크고 피부도 곱고 스타성이 있는데요?”
그래서 어쩌자고?
“단발머리가 안 어울려요. 어딘가 웨이브 좀 주면 엄청 성숙해보일 텐데.”
신영의 뜻도 묻지 않고 녀석이 무슨 원석(原石)이라도 발견한 듯 요리조리 관찰한다.
그 쪽 직업을 가진 이들은 가공하지 않은 원석을 보면 뭔가 조각하고 싶어 안달이 나는 모양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머리를 해본 적 없어요.”
그녀가 정중하게 사양한다.
바둑의 길을 걷는 소녀들은 숙녀가 될 때까지 대부분 외모를 가꾸지 않는 듯싶다.
그도 기다림의 한 종류겠지.
뜻을 이룰 때까지 뭐든 꾹꾹 참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