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바둑은 부침을 거듭하며 구리 9단으로부터 쿵제 9단을 거쳐 다시 이세돌 9단 쪽으로 방향을 트는 것으로 보인다. 바둑계는 '이창호' 이후 춘추전국시대로 들어섰고 아직은 이창호 9단 같은 절대 강자는 등장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전국시대 진(秦)나라처럼 다른 제후국들을 압도하는 힘을 가진 강자는 존재한다. 상반기에 그 존재감을 가장 뚜렷하게 느끼게 해준 강자는 이세돌 한 사람이었다. 동시에 그의 적수로 떠오르는 인물은 의외로 분명치 않다. 구리 9단일지 셰허 7단일지, 저우루이양이나 천야오예 같은 또 다른 신예일지 현재로는 예측불허다. 쿵제 9단이 미스터리처럼 잠수(?)한 이후 세계바둑의 한 축은 보이는 데 다른 축은 보이지 않는다.
그 '다른 한 축'은 필시 중국일 텐데 중국 상황이 매우 복잡하다.(중국랭킹 표 참조) 그렇다면 이세돌 9단은 더욱 진격하여 전국시대의 풍운을 종식시키고 천하를 통일할 수 있을까.
바둑이란 게임은 갈수록 사납고 복잡해지고 있고 강자들은 갈수록 수를 늘려가고 있다. 머리를 들어 바라보면 신진 정예 들이 들판을 가득 메운 채 새까맣게 달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그 중 누구라도 단판 승부라면 이세돌 조차 마음 놓을 수 없는 상황이다.
▲쿵제는 지난 LG배에서 퍄오원야오에게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바둑관계자들은 그 결과에 두 기사가 세계대회에서 보여준 영향력을 볼 때 다소 의외의 결과라고 입을 모았다.또 쿵제 9단의 '돌연한 증발'을 우리는 잊을 수 없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쿵제는 "약점이 없는 기사" 또는 "실질적인 세계랭킹 1위"로 칭송받았고 그의 시대가 활짝 열린 것으로 믿어졌는데 어느 틈엔가 그는 레이더가 고장 난 비행기처럼 헤매고 있다. 쿵제의 경우는 지금 바둑계의 파도가 최고의 기사조차 한순간에 쓸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지금 시대에 과거의 이창호 9단처럼 누구나 마음으로 승복하는 우뚝 솟은 존재가 나타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나 이세돌 9단이 현존하는 한·중·일 3국의 프로기사 중에서 세계 1인자에 가장 근접해 있으며 그가 조금만 더 치고 나가면 1인자의 왕좌에 오를 수 있으리라는 것도 조심스럽게 감지된다. 적어도 바둑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걸 느낀다.
문제는 '시간'이다. 시간은 어느덧 이세돌 편이 아니라는 것ㅡ그게 2011년 하반기의 냉정한 현실이다. 1983년생으로 이세돌은 올해 만 28세다. 95년에 입단하여 프로 생활 16년째다. 세계대회선 최근의 춘란배 포함 15번 우승했고 국내대회는 21번 우승했다.
▲이창호(왼쪽)는 농심배를 비롯한 수많은 세계대회에서 한국의 위상을 드높였다. 이창호 9단은 국내 117번, 세계 23번 우승. 시기적으로 이창호 시절엔 국내대회는 많고 세계대회는 적었다. 75년생인 이창호 9단은 93년 무렵부터 2004년까지 최고의 활약을 보였고 만 30세가 되던 2005년부터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승부사 최대의 적은 '세월'이다. '40대 명인이 진정한 명인'이란 얘기는 이제 꿈같은 얘기가 됐다. 나이가 서른 근처에 가면 한 살 더 먹을수록 승부는 그만큼 힘들어진다.
▲비씨카드배에서 대국 중인 이세돌. 구리와의 혈투 끝에 우승을 차지한다.
바꾸어 말하면 이세돌 9단의 황금기는 지금부터 3년이며 그 중에서도 올 하반기가 최고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다. 윔블던 테니스에서 조코비치가 나달을 꺾고 우승하는 것, 세계골프에서 타이거 우즈가 사라지고 20대 초반의 매킬로이가 등장하는 것을 보며 다시 한번 세월을 느낀다.
항상 '비금도의 천재 소년' 이란 이미지를 주던 이세돌 9단인데 그에게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실로 놀라운 일이다. 그래서 2011년 하반기, 이세돌 9단의 폭발적인 돌파가 실현되기를 더욱 간절히 기대한다.
조훈현 9단의 '감각'에 따르면 한국바둑에 이창호ㅡ이세돌 이후 뚜렷한 '천재'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조훈현 9단은 제자로 들어온 어린 이창호가 복기조차 제대로 못하자 자질을 의심했던 때가 있었다. 조 9단의 눈이 100% 맞는 것은 아닐 거라고 자위해 본다. 하지만, 천재 조훈현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난 20년간 불타올랐던 한국바둑의 영광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왼쪽부터 박정환, 김지석, 강동윤박정환 9단이 7연패를 당하고 한국리그에서 4연패를 당하는 등 부진에 빠져 있다. 하지만 그는 아직 18세고 시간은 많다. 그는 여전히 한국바둑 최고의 유망주고 그를 빼고는 '포스트 이세돌'을 말할 수 없으며 당장 하반기에 박정환은 언제 슬럼프가 있었냐는 듯 무서운 질주를 보여 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박정환과 더불어 89년생 강동윤 9단과 김지석 7단이 언제쯤 세계무대로 치고 나올지도 한국바둑의 숙제 중 하나다. 최철한-박영훈-원성진 85년 생 삼총사가 지난 해 쿵제가 그랬던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세계 정상에 오른다는 스토리도 가능성이 있으며 결코 허구는 아니다.
또 상반기 다승과 승률에서 이세돌 9단을 제치고 1위에 오른 조한승 9단이 '나머지 2%'를 채워 불굴의 승부사로 재탄생하는 것도 팬들에겐 근사한 로망이 아닐 수 없다. 그 중에서도 왕년의 황제 이창호 9단의 정상복귀가 이루어진다면 이보다 더 큰 선물은 없을 것이다.
▲춘란배 시상식에서의 이세돌.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당장은 '이세돌'의 향배가 궁금하다.
세계바둑의 꼭대기에서 상승세의 중국과 아슬아슬한 결전을 전개하고 있는 이세돌.
불 같은 강수로 얼음처럼 냉정한 천적 셰허를 격침시킨 이세돌.
전력을 집중하면 분명 세계 1인자가 될 수 있는 이세돌.
그러나 시간이 많지 않은 이세돌.
2011년 하반기엔 이런 관점에서 이세돌 9단을 지켜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