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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투병 i진선, "지금이라도 긴 바둑을 두세요!"

암투병 중인 i진선을 만나다

2013-07-23 오후 5:49:56 입력 / 2014-03-05 오후 5:08:03 수정

▲ 의사선생님이 주신 '나는 천국을 보았다' 책을 펼쳐보이는 i진선. 주변에 흐트러진 약 봉지는 그의 힘든 투병생활을 말해준다.

10년전 쯤 타이젬에서는 유저들을 대상으로 명예기자 서너 명을 모신 적이 있었다. 바둑에 대해 하고싶거나 쓰고싶은 기사를 러프하게 마구 써보시라는 뜻에서 그들만의 코너를 만들었다. 그 후로 십 수 년을 한결같이 명예기자코너를 자신의 해방구로 여기는 천직기자가 있었으니 그가 i진선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심지어 원고지 한 칸 한 칸과 목숨을 바꾸는 작업이라고 한다. 그가 아무리 유명한 작가라고 해도, 아니면 보통수준의 습작이라고 해도 옥동자를 내보내는 작업은 살과 피와 바꾸는 일이다. 보잘 것 없는 글값에 글을 쓴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며 지속가능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그는 펄펄 끓는 열정 하나로 타이젬 핵심유저를 독자층으로 끌어모았다.

대다수의 유저는 그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나이가 몇이나 되었는지 알 도리가 없다. 인터넷 공간에서는 알 필요가 없었고 알아주길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수천 편에 이르는 글을 대하면서 '이렇게 열정적인 i진선은 어떤 분일까?'하고 한 번쯤 궁금했을 터. 글 속에 비친 그는 매우 낙천적이며, 때로는 조급하며, 겸손하며, 분주하고, 결백하다. 그리고 철이 없다.

"i진선입니다. 제가 미국으로 작별여행을 다녀오려고 합니다. 뉴욕인가 바둑센터가 생긴다던데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보고 오려고요. 간 김에 암센터도 방문해서 털끝만한 가능성이 남아있는지도 확인하고 와야죠."

"잉! 작별여행?"

"아, 암이 이제 많이 퍼졌답니다. 의사선생님 말씀이 오래 못갈 것 같다는데, 비세네요. 하하. 돌 던지기 전에 좋은 추억을 만들어놓고 가야 할 것 아닙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은 살만합니다. 조만간 서울서 뵙겠습니다."

i진선은 몸이 편찮다. 암이란다. 무슨 특정 암이 아니라 인생을 송두리째 걸어야 할 정도로 여러 곳에 위중한 암이 퍼졌단다. 말기란다. 그의 표현대로 모노가 아니라 멀티란다. 타이젬은 알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그의 글에 매료된 아름다운 기억을 가진 분을 위해서라도 알려야 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그를 힘차게 일으켜주어야 할 차례다.

"미국 바둑센터를 방문하고 싶어서요. 제가 가보지 못한 세상의 바둑인을 보고 싶어요."

그로부터 1주일 후, 항암치료 때문에 머리털이 다 빠진 민머리를 자랑스럽게 들이미는 i진선. 그는 소풍가는 아이의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커다란 뉴욕지도를 꺼내보였다. 그리고 전자여권이 나왔다며 즐거워했다. (6월27일 느닷없이 뉴욕을 방문하여 7월7일 그는 귀국했다. 이 인터뷰는 약 한 달 전에 이루어졌다.)

▲ i진선은 뉴욕지도를 펼쳐보이며 소풍가는 어린이마냥 기대에 부풀었다.


모자를 눌러쓴 창백한 모습이 병세가 깊어 보입니다. 암은 언제부터?
암인 줄 안 지 좀 되었어요. 처음 신장암 하나일 때는 약값이 보험이 안 되던데, 지금은 전이가 되어서 뼈암, 폐암도 있고 하니까 보험이 되어 다행이네요. 살만해요. 이제는. (전이가 되어 다행?) 암환자들은 항암 2차 치료를 할 때쯤이면 대부분 항복한다고 해요. 14차까지 간 분이 계시다는데 제가 볼 때는 슈퍼맨인 것 같아요. 제가 기록을 한번 깨볼까 합니다. 하하.

천생이 낙천적인가 봅니다. 처음 암이 발견되었을 때 얘기 좀 해주세요.
제가 암 연구를 하고 있는데도 몰랐죠. 2년 전에 혈뇨가 나와서 내과에서 X-ray를 찍고 나서, 선생님이 암센터를 가보라고 하셔서 신장암이 있다는 것을 알았죠. 너무 걱정스럽게 바라보지 마세요. 바둑두다보면 불계패도 있는 것이고 뭐, 그렇지요. 조금 몸이 나아져서 이렇게 서울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이게 회광반조(回光返照)가 아닐까 합니다. 하늘도 잘 마무리하라는 뜻일 겝니다.

글로만 인사 드렸지 이렇게 인터뷰는 처음이죠? 원래 어떤 일을 하셨어요?
제약연구원이라고 해두죠. 약사시험 떨어지고 식약청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출판사에서 참고서 만들기도 했고…. 영남대 약대 00학번이입니다. 40이 넘어서 들어갔죠. 성균관대도 졸업했어요.

비교적 유복한 집안이었을 것 같아요. 그늘은 별로 안보이시던데….
81년도 본고사 준비중에 여자를 쫓아다니다가 입시를 망쳤죠. 성균관대학 농대를 다니다가 군대 갔다 와서 바로 복학을 하지 않고, 일본 쯔꾸바대학의 일본어연수를 갔었는데 그것도 마치지 못했죠. 역마살이 있어서 다시 한국으로 와서 농대를 졸업하고, 포스코계열사를 잠시 다니다가 염색 사업을 했지요. IMF가 터지면서 사업이 힘들어졌고….

바둑의 이력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나요? 글을 쓰게 된 이유는 뭔가요?
중학교 때부터였죠. 원래 고향은 서울 내자동이었고 그곳에 기원이 있었죠. 정신적으로 바둑에 대해 풍족해진 것은 고(故) 김수영 사범님을 만나게 된 게 계기였어요. 그 분은 바둑뿐만 아니라 학식도 대단한 분이셨지요. (글을 쓰게 된 연유는?) 바둑은 재주가 없었고, 대신 글을 쓰는 것이 흥미로웠어요. 지금은 10년 넘게 타이젬이 제 안마당이 되었지만, 과거엔 야후바둑 다음바둑 동아바둑에서도 글을 많이 썼습니다. 대략 2000편 정도는 썼을 거예요.

▲ 명동성당 입구에서.


타이젬은 i진선에게 무엇일까요?
바둑사이트도 많지만 인연은 따로 있나 봅니다. 첫째는 별 모양 오리온 이미지가 좋았고, 둘째는 저에게 글을 써보지 않겠냐는 제의가 왔었죠. 타이젬에서는 코너를 줄 테니까 발산해보라고 했습니다. 생을 마감할 때까지 코너를 이어가고 싶어요. 저는 선택받은 사람이죠. 점점 조회 수가 많아질수록 보람도 있었고 책임감도 따랐습니다.

감히 건방진 판단을 하면, 느낌으로 글을 쓰다가 요즘은 정교해지고 프로냄새가 나는 것 같습니다. 한 꼭지 쓰는데 며칠 걸리는가요?
3일 걸려요. 하루에 몇 꼭지씩 쓰는 기자들이 들으면 우습겠죠. 검색이나 업데이트가 오래 걸려요. 바둑연감을 보고서 영감을 얻어서 통계자료를 분석하는 기사를 초기엔 많이 썼는데, 그러면 수작업이기 때문에 달랑 표 하나 만드는 데도 하루 종일 걸릴 때도 있어요. 기사 수 대비 댓글이 많다는 자부심도 있죠. 또 대화창에서도 아는 척 하시는 분이 많아서 살아있다는 느낌도 받습니다.

글 써서 먹고 살만큼은 아닐테고, 나머지 경제활동은 어떻게 하시는지? 가족관계는?
그간 한 달에 400만원하는 약값 때문에 힘들었어요. 제가 하는 연구일은 프로젝트가 끝나면 밥값은 나옵니다. 다행히 아까 말했듯, 암이 모노일 때는 힘들었는데 멀티가 되니까 약값은 해결되었고…. 뭐, 산 입에 거미줄 치겠어요? 부끄럽지만 결혼생활을 오래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혼자입니다.

(진지하게 다시 물었다.) 병세는 어떻습니까?
올라갈 때는 내 맘대로 올라가지만 내려올 때는 중력에 의해 떨어진다지요. 중력은 하늘의 뜻입니다. 의사선생님이 임종을 마음 편히 받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최대 6개월이랍니다. 그러나 사람의 일이란 누구도 모르는 것입니다. 항암 2차 치료가 성공적이라면 또 다음 3차를 준비하고, 또 어려운 사활을 풀어야 합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묘수를 자꾸 찾을 수만은 없는 것이고….

▲ 늘 남의 얘기만을 들려준 i진선이 모처럼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었다.


좀 늦은 질문입니다만, 'i진선'은 무슨 의미죠?
i는 촛불, 빛이라는 뜻이에요. 나를 뜻하는 I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빛 진선'인데, 진선은 좋아하던 사람의 이름이죠. 혼자가 된 후 사랑한 사람인데, 먼저 세상을 떠났어요.

처음 인터뷰인데, 하고 싶은 말씀 아무거나 해보세요?
타이젬이 영원히 발전했으면 좋겠어요. 타이젬은 순수 바둑인들의 고향이어야 합니다. 최근에는 유저들과 소통이 조금 줄어들어 아쉽긴 하지만 곧 이어질 것이라고 봅니다. 타이젬에는 좋은 유저들 진짜 많습니다. 세계 속의 타이젬에 되었으면 좋겠어요.

타이젬 얘기만 하시면 남들이 '짜고 쳤다'고 생각해요(웃음). 마지막으로 남기실 말씀 한마디 하시라니까요?
"'뉴턴'이라는 과학잡지가 있었어요. 제가 글도 썼는데, 거기에 보면 우주탄생에 관해 '바둑판론'이 나와요. 겹치는 평면들이 바둑판처럼 있는데 아무 일 없을 때는 약간 기우뚱하면서….."
살면서 아쉬운 점 별로 없어요. 바둑TV에서 '복기맨'을 하고 싶더라구요. 복기하면서 이창호 이세돌의 심정으로 바둑을 둘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이런 싱거운 사람.)

인터뷰를 마치고 분주하게 또 짐을 싼다. 왕십리 한국기원에 바둑리그 경기를 참관하고, 봐야 할 바둑인이 또 많다며 발걸음을 옮긴다.

주변은 걱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데, i진선은 전혀 걱정 없는 어린 아이의 눈이었다. 정든 것과의 이별, 미래에 대한 불안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이렇게 낭만적일 수도 있을까. 원하지 않는 이별이 닥쳐왔음에도 이렇게 낙천적일 수 있을까. 정말 인생은 한판의 바둑처럼 판을 쓸고 다시 두면 된다고 느끼는 것일까. 준비 없이 찾아온 이별을 그저 운명이라고 보는 것일까. 그는 역시 마지막 명언을 남긴다.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죠. 지금이라고 계획을 세우고 제한시간이 긴 바둑을 두세요!"

▲ 명동성당에서 익살스런 포즈를 취했다.

▲ 기자와 명동거리를 걷는 i진선. 그는 타이젬에서 1200편의 기사를 올린 보물이다.
TYGEM / 진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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