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기타
19로의 유목민
-대한바둑협회 신임 전무 김원 인터뷰
2013-02-15 오전 11:35:58 입력 / 2013-02-15 오후 3:18:57 수정

▲대한바둑협회 신임 전무가 된 김원 7단
S#1. 심야의 왕십리
의외의 깜짝 인사였다.
아마추어를 관장하는 대한바둑협회 전무에 프로기사가 임명됐으니.
의아해하는 바둑 팬들이 많으리라.
공식 기자간담회가 있던 2월 14일 밤에 김원 전무를 만났다.
자정 무렵이었다.
며칠 째 제대로 잠을 못 이룬 김원의 눈은 충혈 되어 있었다.
하루 종일 바둑매체 기자들과 만나 인터뷰를 했다고 한다.
설 연휴 전에 양재호 사무총장과 인터뷰를 하면서 김원의 등판에 관해 충분히 설명을 들었지만 당사자의 뜻을 듣고 싶었다.
"생각도 못했던 일입니다. 처음에 제의를 받고 고민했지요. 솔직히 말씀드려 개인으로서의 자유를 속박 당하는 자리라서 망설였거든요."
김원은 자유인이다.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몸도 따라가는 야인.
"한국기원 쪽과 대한바둑협회 쪽 여러분들께서 추천을 해주신 모양입니다. 그 동안 제가 꿈꿔왔던 일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제도권 한가운데로 들어와 미친 듯 뛰어 볼 생각입니다."
▲곱창집에서 김원 7단과 함께.(오른쪽 전화받는 사진은 급히 찍은 사진이라 조금 흔들렸네요.)
왕십리 명물인 곱창이 돌판에서 지글지글 익어 가는데 그는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계속 전화가 걸려왔다.
축하 전화, 당부 전화, 문의 전화......
참 오지랖이 넓은 마당발이다.
"올해부터 바둑협회는 과거와 본질 자체가 달라집니다. 한국기원과 양립하면서 여러 가지 중복되는 업무로 갈등했던 구조가 허동수 이사장 겸임으로 해소됩니다. 기원은 프로업무에 집중, 협회는 아마 업무를 전담하게 되지요. 그 동안 기원이 맡아왔던 보급 업무가 협회로 완전히 넘어 왔습니다. 보급 팀 직원들이 협회로 발령났지요. 바둑세계화를 위한 예산도 협회로 이관됐습니다."
이 대목에서 김원의 구원투수 등판 결정을 이해할 만하다.
한국기원과 대한바둑협회의 화학적 결합을 위해 양측 모두 신뢰할 만한 인물이 필요했던 것 아닐까?
허동수 이사장을 비롯해 한국기원 실무자들, 바둑협회 대의원들 두루 김원의 등장에 수긍했다.
"양쪽에서 많은 분들이 격려해주십니다. 일하기에 더 없이 좋은 환경인데도 일을 제대로 못한다면 제가 무능한 거죠."
그 동안 질시와 반목이 적지 않았던 바둑계에서 특정 자리 인사 때마다 뒷담화가 무성했었던 게 사실이다.
김원은 자신 있게 '일하기 좋은 환경'을 밝힌다.
▲김지명-김원(오른쪽) 형제
S#2. 바람과 구름
김원은 방송해설자이자 기원 앞 유전 커피숍을 운영하는 김지명의 동생이다.
한때 두 형제는 용감했다.
김지명은 9살에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입학자격을 얻었고 김원은 6세 때 초등학교 과정을 뛰어 넘었다.
장안의 화제였다.
두 형제 때문에 나라의 법이 바뀌었다.
1974년부터 12세로 자격제한이 생긴 것.
김원이 중학교를 가려면 6년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
때마침 조치훈이 일본에서 맹활약하며 바둑 붐이 일어났다.
그러자 부모는 아이들에게 바둑을 가르쳤다.
신동이었던 형제의 기력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아우가 좀 더 집중력이 강해 스무살 때 한국기원 연구생 1기로 이창호와 함께 프로에 입단했다.
그러나 김원은 승부 끼가 약했다.
"이기기 위해 상대와 겨루는 승부가 부담스러웠습니다."”
동기인 이창호가 쭉쭉 뻗어갈 때 김원은 방황했다.
여행과 볼링, 스키, 음악감상으로 청춘을 보냈다.
볼링에 심취해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에 30게임을 친 적도 있었다.

▲2004년 인천으로 도장 터를 옮긴 김원 7단의 당시 모습. 당시 그는 김원도장을 국내최고의 바둑도장으로 육성시킬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했었다.
그러던 중 분당의 바둑교실에 사범 제의가 들어와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가르치는 일이 재미있었다.
원래 아이들을 좋아했었다.
많이 놀아본 까닭에 아이들의 심리를 깊이 이해했다.
구리에서 정홍균 사범과 바둑교실을 열었는데 소문이 나면서 180명의 아이들이 몰려와 성황을 이뤘다.
김효정, 한해원, 김혜민 등도 찾아와 바둑수업을 함께 했다.
다시 분당으로 바둑교실을 옮겼는데 우수한 인재들이 몰리면서 아이들 스스로 '도장'이라 불렀다.
그래서 김원의 제자들 중 프로기사 20명이 배출됐다.
홍성지, 한상훈을 비롯해 도합 100단을 돌파했다.
15년 정도 교실과 도장을 하다 보니 권태기가 찾아왔다.
이세돌에게 도장을 넘겨주고 전국을 순례했다.

그때 타이젬에서 프로아마대항전이 만들어졌는데 김원은 직접 해설을 맡아 전국 도시를 떠돌며 지방의 바둑인들과 교류했다.
이듬해 타이젬의 '동호회원정대'도 김원의 작품.
각 지방의 유명한 동호회원들과 만나면서 보폭을 넓혀갔다.
K바둑에서 기획을 맡아 전국대회를 주관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날 대구로 훌쩍 이사했다.
포항에 지역연구생제도를 만들고, 대구와 경북으로 확산시켰다.

▲'내셔널리그 대구덕영팀 1위 결승진출 기념식'에서 대구덕영팀 선수들의 모습.
대구 지역 바둑 인들이 김원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지원해주기 시작했다.
그가 잠깐 왔다가 떠날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구를 근거지로 호남 쪽과 강원, 경남을 오가면서 지역연구생 제도를 뿌리내렸다.
"프로기사가 승부 말고도 얼마든지 할 일이 많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제 후배기사들도 아마바둑, 지방바둑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프로의 뿌리는 당연히 아마추어거든요."
그는 대구바둑협회 지도사범으로 일하다 후배기사이자 제자인 유경민에게 물려주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대구 바둑 인들이 박수를 쳐주었다고 한다.
아직도 그의 가족은 대구에 거주하며 김원은 서울 처가댁에 임시로 머물며 대바협 일을 준비하고 있다.
여전히 그는 바람 따라 흘러가는 구름이다.
▲소통을 강조한 김원 전무
S#3. 소통이 시급하다
곱창을 구우면서 이야기하는 동안 그는 노트북과 핸드폰을 계속 가동하고 있었다.
-어떤 일이 가장 시급하죠?
"소통 아닐까요? 프로와 아마, 기원과 협회, 그리고 여러 문제로 갈린 단체들이 소통하면서 바둑계가 하나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시스템을 재정비해야 할 겁니다. 대학연맹, 여성연맹, 초등연맹, 각 시도협회가 유기적으로 소통하면서 보급의 길을 열어가야죠. 바둑교실 활성화를 위해 방과 후 수업과의 문제도 풀어야 하고."
안경 속 그의 눈빛이 반짝인다.
새로운 일에 대한 호기심이 강렬해보였다.
앞으로 임기가 4년.
잘해도 본전이고 못하면 바가지로 욕을 먹는 대바협 전무직.
여러 사람으로부터 등 떠밀려 김원이 구원투수로 나섰다.
칼 같은 제구력과 묵직한 돌 직구로 멋진 세이브를 올려주길 바란다.
TYGEM / 김종서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