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8-30 오후 1:32:06 입력 / 2013-08-30 오후 1:39:18 수정
▲'천적은 없다'. 이날 두 번째 대국에서 포스코켐텍의 나현이 안국현에게 승리하며 상대전적 7전 7패의 악몽에서 벗어났다. 티브로드 입장에서 이 판의 승부는 아쉬웠던듯 이상훈 감독과 선수들이 대국장에 들어와 나현과 안국현의 복기를 지켜보고 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안국현 김현찬 류수항 이원도 이상훈 감독(이상 티브로드) 나현.
"나현이가 그동안 7전 전패를 당했다구? 질만큼 졌구만.이제 딱 이길 때가 됐네."(강만우 심판위원)
전쟁터나 다름없는 승부세계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의 말은 가끔 족집게같을 때가 있다. '설마'했던 이 말이 한 시간 후에 현실이 됐다. 나현이 마침내 천적 안국현을 꺾었다.
29일 홍익동 바둑TV스튜디오에서 벌어진 2013KB국민은행바둑리그 9라운드 3경기 제2국에서 포스코켐텍의 나현이 티브로드의 안국현을 176수 만에 불계로 물리쳤다. 이 보다 앞선 1국에서 신진서가 김세동에게 패하는 바람에 낙담해 있던 포스코켐텍은 이 승리에 환호했다.
'물리면 큰 일'이라는 티브로드(5승3패.3위)와 '지면 끝장'이라는 포스코켐텍(2승6패.최하위)의 상반된 입장이 충돌한 이날 경기는 오더만 놓고 본다면 티브로드의 2승이 매우 유력했다.
포스코켐텍의 김성룡감독은 무슨 생각이었는지 3-2로 패했던 전반기 경기의 오더를 그대로 제출했는데(5번 주자만 김동호에서 최기훈으로 변경), 티브로드의 이상훈 감독이 답안을 미리 본 사람처럼 1국 신진서의 상대로 컨디션 절정의 김세동을, 2국 나현의 상대로 천적 안국현을 배치하자 뜨악하는 입장이 되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첫 판에서 신진서가 맥없이 물러났다.
▲<제1국>김세동-신진서. 지난 경기를 쉬었던 신진서가 다시 선봉으로 나섰지만 최근 절정의 김세동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전반기 티브로드와의 경기 때 나현과 안국현이 만난 것을 두고 '최악의 조우'라고 탄식해 마지 않았던 김성룡 감독이었다.하지만 이날 2국에서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상황이 재현되자 할 말을 잊었다. 더구나 나현은 불과 며칠 전 올레배에서 안국현에게 다시 패하며 가망없음이 드러나지 않았던가.막 시작된 2국을 바라보는 김감독과 다른 선수들의 얼굴에 쓸쓸한 기색과 함께 짙은 그늘이 드리워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데 이런 분위기에서 중반을 향해 가던 바둑이 어느 순간 이상한, 포스코켐텍 입장에선 눈이 번쩍 뜨이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얼음장처럼 냉정함을 유지하던 안국현이 갑자기 팔을 걷어붙이며 대마를 잡자고 나선 것이다. 한눈에도 위험천만한 직선공격이었지만 나현과의 대국에서 이 방식으로 쏠쏠한 승리를 낚았던 안국현의 손놀림에는 거침이 없었다.
한 번도 이기지 못해 숨죽여 있던 사람에게 이것은 둘도 없는 기회였다. 나현은 기다렸다는듯 흑 진영을 헤집으며 최대한 수를 늘렸고,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이자 노리던 흑대마로 칼끝을 돌렸다. 결과는 서로 50집에 달하는 대마 바꿔치기. 하지만 이로써 사방이 편안해진 백은 마구 흑을 괴롭히기 시작했고 결국 버티고 버티던 안국현이 항서를 쓰기에 이르렀다.
▲<제2국>나현-안국현. 나현이 안국현에게 마침내 승리하며 그동안 당했던 7전 전패의 설움에서 벗어났다. 조한승 9단은 안국현이 나현의 대마를 지나치게 추궁한 것을 지적하며 "밖에서 봉쇄한 다음 안에서 서로 살자는 태도를 취했으면 크게 유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경기(대 한게임)에서 대역전승의 피날레를 장식했던 나현(18)이 이날 천금같은 승리로 희망의 불씨를 살려놓았다. 최근 3연승, 시즌 전적은 5승4패가 됐다.
■최종국 락스타 대결이 승부
첫날 1-1로 팽팽히 맞선 가운데 양팀은 둘째날 3~5국을 속행한다. 대진은 ③강동윤-이지현 ④김주호-조한승 ⑤최기훈(락)-류수항(락)(이상 앞쪽이 포스코켐텍)의 순. 3국과 4국을 양팀의 1지명이 가져간다고 보면 5국의 락스타 대결에 초점이 맞춰지는게 상식일 것이다.
최기훈은 수 년간 잠잠하다가 일약 농심배 대표로 선발되면서 크게 주목받고 있는 입장. 하지만 상대 류수항 또한 올해 최고의 한 해를 보내고 있어 누가 이길 지 점치기가 어렵다. 락스타끼리의 대결이지만 꽤 흥미진진한 볼거리다. 이 밖에 전반기 대결에선 김주호가 조한승을 반집차로 꺾은 일도 있어 승부의 흐름이 상식대로 흐르지 않을 가능성도 꽤나 있어 보인다.
▲김세동은 KB리그의 좋은 성적을 바탕으로 꾸준히 랭킹을 높여가고 있다(현재 26위). 이날 승리로 시즌 전적은 6승3패가 됐다.
▲신진서(13)에게는 기다림과 격려의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 이날 패배로 5연패의 수렁에 빠지며 시즌 전적도 2승6패가 됐다.박정상 해설자는 "천하의 이세돌이나 박정환도 입단 후 제대로 성적을 내기까지 3~5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2경기를 결장하기도 했던 안국현은 시즌 4승3패를 기록했다. .
▲2국에서 나현이 안국현을 상대로 슬리를 굳혀가자 포스코켐텍 검토진이 판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시계방향으로 왼쪽 부터 강승민(락) 신진서 김주호 최정 김성룡 감독 최기훈(락). 박정상 해설자는 강동윤 나현 신진서가 포진한 포스코켐텍을 '천재집합소'라고 표현했다.
▲티브로드 검토진엔 전날 물가정보배에서 우승한 박정환이 가세했다. 옆은 락스타리거 김성진과 류수항. KB리그의 최대 장점은 억지로 엮을 수 없는 이런 공동연구가 매 경기 자연스럽게 이뤄진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