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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단의 보물 '문지'의 35년 바둑사랑

35년 째 바둑모임을 갖는 문학과지성사 방문기

2013-09-15 오후 11:34:20 입력 / 2013-09-17 오후 1:42:31 수정

▲ 한국 문단의 최고의 거성들이 35년째 매주 화요일마다 문학과지성사에서 수담을 즐긴다.


일전에 위기십결(圍棋十訣)에 녹아있는 지혜를 고전의 형식으로 해석한 '인생의 한수를 두다'를 집필한 문인 장석주 선생을 인터뷰했던 일을 기억하실 게다. 당시 인터뷰 말미에 장선생은 조용히 한마디 건넸다. '김병익 선생은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인데 바둑을 참 좋아하십니다. 언제 문지에 한번 놀러오세요. 이름만 대면 아실 분이 7~8명 정도 됩니다.' 당대 최고의 문인들이 바둑을 즐기는 모습이라, 상상만 하여도 팔뚝에 소름돌이가 생겼다.

「문학과지성사」-. 그대의 학창시절로 돌아가면 멋으로 끼고 다녔던 교양사적 중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한 책이 한두 권은 있었으리라. 지금 당장 먼지가 수북이 눌러앉았을 책장을 뒤척거려 확인해보시라. 우리의 청춘을 뜨겁게 했고 감성을 순화시켰고 잠시나마 사색의 길에 접어들게 했던 맘의 양식이었던 공간이 아니던가.
「창작과비평사」를 '창비'라고 부르듯 그들은「문학과지성사」를 '문지'라고 부른다. 창비는 현실 참여적이며 '문지'는 지성과 순수를 강조한 문파였다. 창비와 문지는 한국문학을 견인한 거대한 양대 축이다.

소설가 김원일, 시인 황동규 김광규, 문학평론가 김병익 등 당대 한국최고 문인들의 집합체인 문지멤버들은 1주일에 한번 씩 꼭 바쁜 와중에도 바둑모임을 갖는다. 문지의 발행인을 오래 맡았던 김병익 선생은 화요바둑모임이 생긴 지 어느덧 35년째라고 했다.


▲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주는 문지고문 김병익 선생.
그들은「문학과지성사」를 줄여서 '문지'라고 불렀다.

"1975년 문학과지성사는 청진동 조그만 사무실에서 창업했는데, 당시 조선작 선생이 바둑판을 창업 선물로 주었어요. 그때부터 머리를 식힐 때면 한판씩 두었죠. 그러다 조그만 사무실에 문인들 저자들이 마구 찾아오니 출판사가 영 시끄러워지고 머리가 복잡해졌죠. 그래도 바둑을 두면 잡념을 잊을 수 있었고 수선함 속에서 조용함을 찾을 수 있었죠. 그러다가 78년 즈음, 인권변호사 황인철 선생이 유신시대 인권변호를 맡는 일이 잦아지면서, 머리를 식히려고 가끔 찾아왔죠. 당시 통의동으로 출판사를 옮길 때였는데, 황변호사가 '바둑판은 제가 기증할 테니 바둑 대회를 한번 개최하자'고 제의한 게 지금 바둑모임의 시초였어요. 그 때부터 문지친구들이 뭉치기 시작했어요. 사실 대회랄 것은 없고 바둑모임이라고 하는 게 옳겠죠.”

소설을 중심으로 한 비평 활동을 지속적으로 해온 김병익(76 문학과지성사 고문) 선생은 기자가 자리에 앉자마자, 마치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30여년이 지난 일을 흑백 파노라마처럼 들려준다.

"바둑대회를 하게 되면 우승자가 나올 게 아닙니까. 그러면 상품을 주어야 하는데 우승 상품은 모든 참가자들이 사인한 바둑판을 주는 것이 전통이 되었어요. 지금 모인 양반들은 집에 대개 2~3개씩 바둑판이 있을 겁니다. 처음엔 오래갈 것으로 예상을 못했죠. MT를 가면 바둑판을 싣고 가곤 해서 왼 종일 바둑만 두고 돌아오기도 했죠. 1978년부터니까 작년까지라고 쳐도 35년이나 훌쩍 흘렀네요."

▲ 1. '바둑두러 가는 길' 우산대가 빠진 줄도 모르고 소풍가는 아이 마냥 즐거운 걸음을 재촉하는 우영창 장석주.
▲ 2. 도착한 곳은 정원이 잘 가꾸어진「문학과지성사」건물.

왜 작년까지입니까?
사실 올해는 좀 뜸하게 열리고 있어요. 다들 고령이니까 아픈 분도 계시고… 오늘은 취재 온다는 말도 안했는데 묘하게도 많은 분들이 운집했네요. 하하. 바둑 못 두는 사람도 자주 모임에 참석해요. 뭐, 사람 사는 냄새 맡으러 오는 거죠. 저녁되면 밥 먹고 헤어지고. 오늘은 열 명은 될 것 같네요. 다시 화요모임을 활성화해야겠어요. 하하.

바둑과 글, 좀 어울리는 것도 같은데 비슷한 게 있을까요?
고상하게 생각하고 동패들과 어울려서 젤 편하게 시간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즐거움이죠. 선비놀이로는 바둑이 젤 친숙하죠. 글쓰기 전이나 착수를 하기 전에 꼭 생각을 먼저 해야 한다는 것, 또 운동하는 시간에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종목이 바둑 아닐까요. 글쓰다보면 취미활동은 아무래도 등한히 하잖습니까? 저 같은 경우는 다른 취미는 전혀 없고 오로지 바둑이죠. 아무래도 몸을 쓰는 운동은 그리 즐기질 않죠. 뇌 운동을 하는데 있어 바둑처럼 좋은 게 없잖아요.

문인들은 바둑이 센 직업군에 속하나요?
그리 세지는 않지만 오래 즐기고 광범위하게 즐기죠. 제가 볼 땐 법조인들이 가장 세고, 아무래도 고시공부하면서 짬짬이 바둑을 즐겨서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문단에서는 송영 김치수 선생이 잘 두는 쪽이고, 1급 중에 성민혁 복거일 홍정선(문지 전 대표)선생이 비교적 강하죠. (기력은 1급을 최강자로 치는 듯.)

바둑은 어릴 때부터 배웠습니까?
고교 때인데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어요. 대전고를 다닐 때 프로기사 (김)학수사범이 저랑 한반이었어요. (김선생은 경북 상주가 고향인데 대전으로 어릴 때 이사를 갔다)교장선생님 아들이었던 김사범이 절더러 바둑두러가자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나 보다 바둑을 못 두는 거예요.하하. 그런데 대학 2년 때인가 김사범이 프로가 되었다고 면장을 들고 자랑하는 것이에요.바둑에만 전념한 것 같았어요.

자칭 3급인데 편하신가요?
글쓰기는 자주 하면 느는데 바둑은 자주 두어도 안 느네요. 사실 성유보(한겨례 초대 편집장)선생이 절 더러 아마초단 정도라고 했어요. 언젠가 서울역 앞 바둑집(기원)을 갔었는데, 3급이라고 했죠. 그런데 원장이 한번 두어보더니 이 기원에서 노시려면 5급으로 낮추어서 말하라고 하더라고요. 어찌나 화끈거리는 지, 그 후부터는 만년 3급이라고 합니다. 그게 편해요. 성민엽(문학평론가) 선생이, '선생처럼 바둑 좋아하는 분이 그렇게 늘지 않는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놀려요. 지금도 일단 손부터 나가니까.


▲ 3.「문학과지성사」편집부를 지나서

▲ 4. 계단을 오르니, 지금은 고인이 된 한국문단의 거물이 등장한다. 황순원 홍성원 이청준 오규원 기형도.


얘기를 그럭저럭 마쳐갈 때 좌중이 일어서서 막 입장하는 분을 향해 인사를 드리길래 덩달아 기자도 일어섰다. '아, 분단문학의 대가 김원일 선생님!'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에 호방한 풍모, 한눈에 카리스마 바둑을 구사할 것 같은 김원일 선생. 그는 소파에 앉자마자 담배를 꺼내 물면서, 먼저 와서 기다리던 소설가 우영창 장석주와 환담을 나누더니 곧장 수담에 들어간다. 그도 한 마디를 거든다.

"김선생과는 바둑 인연이 참 많지. 해외여행을 가면 우리 둘이 룸메이트인데, 자석바둑판을 소장하고 다니면서 바둑을 두었지. 바둑을 두어서 지는 만큼 돈을 모아서 여행경비로도 쓰고 남으면 좋은 바둑판을 장만하기도 하고… 우리 문인들 중에는 조해일 최두석이 야물게 두었지. 그리고 민병산 박재삼 조연현 등도 오래된 바둑친구들이지…" 또 이어간다. "우리 문지바둑은 동네딱지치기지 뭐. 다만 문지의 좋은 전통이라면 친구들 만나고 바둑 두고 저녁 먹고 헤어지고, 열심히 일하고 또 바둑 두고…. 순수하게 바둑을 즐기는 모임이 35년째라면 문단사적으로 봐도 드문 일이지."

그럭저럭 얘기도 많이 나누었다 싶기도 하고 서서히 바둑을 두어야 할 시간이 되었다. 기자도 김병익 선생과 바둑 한판을 두었고 여러 문인들의 바둑도 구경했다. 아직 그 분들의 작품을 다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필시 그들의 문체와 기풍과 인풍은 맞닿아 있으리라.

뜬금없지만, 술을 좋아하기에 술을 절제한다는 분이 있었다. 사랑하는 술을 적당히 오래토록 마시기 위해 지금은 술을 절제한다는 뜻이었다. 굵고 짧게 사는 것은 남의 눈에는 멋져 보인다. 문지바둑모임처럼 엷은 듯 모자란 듯 보이지만, 절제된 행동으로 길게 이어가는 것에서 순수한 것 영원한 것 건강한 것을 배웠다. 다들 칠순의 거장들이었지만 아직도 은퇴를 모르는 이들은 낭만을 먹고 사는 멋진 남자들이었다.

김원일 선생에게 추석덕담 한마디 부탁하자 호방한 기풍답게 바둑예찬론을 펼친다. "바둑이 노년의 시간을 보내기에 좋고, 돈이 안 들고, 치매예방에도 좋고, 시간이 지루하지 않고, 오랜 친구를 만나서 덕담을 할 수 있어. 바둑은 무예가 아니고 수양과 도락으로는 최고급이지. 난 어린이들에게 바둑을 가르쳐야 한다고 봐. 사촌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 바둑을 내가 가르치라고 해서 바둑학원을 다닌 적이 있어. 초등3학년이 되니까 이미 40년 둔 나보다 잘 두었어. 그런데 둘 다 명문대에 입학하더라고. 역시 어린 시절에는 여러 학원 보내지 말고 침착성을 기르고 머리를 좋게 하는 바둑이 그만이야."

▲ 5.'그간 안녕하셨습니까?' 김원일 선생(우)이 후배 소설가인 송영창에게 악수를 청하고는, 곧장 한판에 들어간다.

▲ 6. 소설가 김원일은 '문지'에서 「아버지와 아들」이란 소설책이 새롭게 나오는 모양이다. 표지관련하여 편집자가 잠시 수담에 끼어든다.

▲ 7. 이 참에 김병직 선생과 기자도 한 수.

▲ 8. 유창혁스타일을 빼다 박았으나 대마를 잡고도
집 부족으로 지곤 하는 '허무류'의 극치 김병익 선생.

▲ 9. 호방한 기풍의 닥공스타일 김원일 선생.
아쉽게도 호방함은 승률과는 상관이 없음을 알린다.

▲ 10. 단단하여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 바둑을 두는
우영창 선생. 그의 작품에는 기원원장도 등장한다.

▲ 11. 기원의 타짜와 같은 이미지의 홍정선 선생.
기자의 시각으로는 가장 쫀쫀한 바둑이었다.

▲ 12. 독서중인 정현종 선생은 깐깐한 훈수꾼.

▲ 13. 바둑삼매경 독서삼매경. 오생근 정문길 선생.

▲ 14. 음악전공 서우석 선생은 대학신문에 바둑을
소재로 칼럼도 게재했을 정도로 바둑광이다.

▲ 15. 고락을 함께한 소파의 나이도 35세?
 
▲ 16. 왼쪽 창가에 앉은 이는 주일우 현 문지대표. 오른쪽 구석 벽에 앉은 이는 시인 김광규, 그 옆은 소설가 황순원의 장남인 시인 황동규 선생이다.

 

문지 바둑모임에 나오신 분들과 글 속에 등장하신 분들에 대한 소개를 간단히 드린다.(無順)

김병익 문학평론가. 1967년「문단의 세대 연대론」1968년「68문학」동인으로 본격적인 비평 활동을 시작하며,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비평가.
우영창 금융업에 종사하다 2008년 등단. 최근 대표작 「성자셰익스피어」가 있다.
서우석 음악전공. 서울대 음대교수를 역임했고 저서에 「말과 음악, 그리고 숨결」이 있다.
김원일 1966년 「1961년 알제리아」로 등단. 민족분단의 비극을 파헤친 대표적인 '분단작가'. 대표작 「마당 깊은 집」 「어둠의 혼」 「불의제전」이 있다.
오생근 문학평론가. 1970년 평론 「동물의 이미지를 통한 이상의 상상세계」로 등단. 대표작 「그리움으로 짓는 문학의 집」이 있다.
황동규 1958년 「시월」 「즐거운편지」 「동백나무」로 서정주의 추천으로 등단. 소설가 황순원의 장남이며, 한국대표 시인이다.
정현종 1965년 「여름과 겨울의 노래」로 데뷔. 대표작으로 「사물의 꿈」「광휘의 속삭임」이 있다.
김광규 독문학자이자 시인. 1975년「문학과지성」으로 등단. 대표작으로 「아니다 그렇지 않다」가 있다.
홍정선 문학평론가. 전 문학과지성사 대표. 대표작으로「신열하일기」가 있다.
조선작 1971년 단편소설 「지사총(志士塚)」으로 등단. 「영자의 전성시대」가 특히 유명하다.
장석주 시인 소설가. 1975년 시 「심야」로 데뷔. 바둑인문서 「인생의 한수를 두다」를 냈다.
주일우 현 문학과지성사 대표. 캠브리지를 나와「다윈의 대답」등 수많은 역저가 있다.
정문길 마르크스 문헌학의 불모지인 한국에서 거의 유일한 연구자로 마르크스주의 대가. 대표작으로「니벨룽의 보물」이 있다.
황인철 1974년 민청학련 1979년 김재규 사건의 변호를 맡은 인권변호사. 대표작으로「무죄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

TYGEM / 글 진재호 사진 강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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