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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과 영화를 열렬히 사랑한 사나이

영화감독 조세래의 감동적인 스토리

2013-11-05 오후 3:29:53 입력 / 2013-11-05 오후 4:52:43 수정

▲ 바둑과 영화를 사랑한 조세래 감독의 스토리.

"언제 내려오셨어요?" 부산영화제 상영관을 오가며 영화계 관계자를 만나면 으레 하는 인사다. 그 인사에 뒤따르는 말도 매년 다르지 않다. "영화는 좀 보셨나요?" 하지만 이건 그냥 하는 질문만은 아니다. 행사와 미팅으로 빠듯한 부산에서의 일정 중에, 수많은 영화들 가운데서 눈 밝은 영화인들이 관람을 택한 몇 편의 작품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올해 부산영화제의 '한국영화의 오늘' 부문 상영작인 <스톤>도 그렇게 발견한 영화다. 바둑과 조폭이라는 극단의 장르를 결합해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가 인상적이라는 점이 <스톤>을 추천한 이들의 대체적인 관람평이었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영화에 주목하게 된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57살에 첫 장편영화를 연출한 조세래 감독에 대한 호기심이다. 충무로에 오래 머물던 이들도 현장을 떠날 시기에, '신인감독'이란 타이틀을 달고 다시 영화판에 복귀한 1980년대 영화인. 바둑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 <역수>와 <승부>의 작가이기도 한 그는 어떻게 <스톤>을 만들게 되었을까. 다음은 조세래 감독이 직접 들려준 영화와 바둑, 인생에 대한 긴 이야기다.

▲ 영화<스톤>을 제작중인 조세래 감독.

종횡으로 교차하는 직선의 줄. 그 줄 한가운데서 벌어지는 검은 돌과 흰 돌의 승부가 13살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소년은 바둑이 좋았다. 겉으로는 적막이 감도는 점잖은 경기이지만 바둑판에 돌을 내려놓는 순간까지 정신적으로 격렬한 투쟁을 벌여야 하는 이 스포츠에 유년 시절의 조세래 감독은 매료됐다. 하지만 다른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부모 역시 아들이 먹고살기 힘든 바둑을 업으로 삼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남들보다 조금 잘하는' 취미로 바둑을 생각하게 되었을 때, 영화가 그의 인생으로 들어왔다.'르네 클레망의 <태양은 가득히>를 봤던 사춘기 시절의 어느 날'을 조세래 감독은 잊지 못한다. 부유한 고등학교 동창을 흠모하다 그의 모든 것을 빼앗고 결국 살인까지 저지르는 알랭 들롱의 모습이 조감독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영화가 누군가에게 이토록 놀라움을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내가 직접 영화감독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번 마음을 먹자 모든 것들이 명료해졌다. 시나리오작가를 꿈꾸며 국문과에 지원했고, 국문과를 중퇴한 뒤엔 직접 쓴 시나리오를 들고 영화사를 찾아다녔다. 20대 중반의 청년이었던 조세래 감독의 모습이다.

▲ <스톤>에서 내기바둑꾼 민수 역을 맡은 배우 조동인.

착수-80년대, 충무로에 발을 딛다

그가 혈혈단신으로 충무로에 첫발을 내디딘 80년대는 한국 영화계에도 격동의 시기였다. 이장호 감독의 조감독 출신이었던 배창호 감독을 필두로 박광수, 장길수, 정지영, 이명세 감독 등 한국영화의 뉴웨이브를 이끈 감독들이 앞다투어 등장했다. 연극영화과 출신도 아니고, 충무로에 연줄도 없었던 조세래 감독이지만 영화를 하겠다는 뚝심 하나만으로도 현장에 받아들여주는 인정이 남아 있던 시기였다. "영화사에 무작정 찾아가 뒷전에 앉아 있고. 눈치보고, 따라다니며 심부름을 했다. 강우석 감독이 나보다 한두살 아래 연배라 같이 연출부 활동을 했는데, '우석아, 짜장면 시켜라!' 하면 '네!' 하고 달려가던 시절이 있었다. 나도 담배 심부름을 시키면 얼른 자리를 떠났지. 영화 연출을 꿈꾼다면 누구나 그런 시기를 거쳐야 하던 때였다."

정지영 감독과의 작업은 시나리오작가로서 조세래 감독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조영철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던 조세래 감독의 시나리오를 처음 본 순간을 정지영 감독은 기억하고 있다. "누가 나에게 조감독의 시나리오를 주며 읽어보라고 했다. 시나리오가 상당히 괜찮더라. 페이소스가 짙은 작품이었다. 시대에 걸맞지 않은 올드한 분위기였지만, 그 작품을 보는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법한 이야기였다. 이런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은 당시 충무로에 없다는 생각에 언젠가 그와 함께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정지영 감독이 조세래 감독과 함께 집필한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1991)와 <하얀 전쟁>(1992)은 각각 춘사영화제 각본상과 제31회 대종상 각색상을 수상했다. 재능 있는 시나리오작가이자 <추억의 빛> <불의 회상> 등의 현장에서 조감독으로 활동해온 영화인 조영철에 대한 관심은 당시의 조세래 감독에게 일생일대의 기회를 열어줬다. 꿈에 그리던 감독 타이틀이 그의 눈앞에 있었다.

"국내 첫 '바둑영화' 나온다." 1993년 9월 <경향신문> 연예면의 헤드라인이다. 조세래, 아니 조영철 감독이 연출자로 나선 바둑영화 <명인>의 제작 소식이 여러 매체를 통해 들려왔다. "영화계에서 대적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프로급의 바둑 솜씨"(정지영 감독)를 지닌 조세래 감독의 첫 영화가 바둑인들의 세계를 조명한 작품이라는 건 어쩌면 필연적이었다. "프로기사를 꿈꾸는 아마추어 고수와 내기바둑에 탐닉하는 또 다른 아마 고수"(<경향신문>)의 대결을 다룬 이 영화에 조재현, 김갑수, 박상아가 캐스팅됐다는 뉴스도 보도됐다. 하지만 작품이 극장에 걸리는 그 순간까지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게 영화다. 조세래 감독이 한국기원과 수많은 영화인들의 도움을 받아 야심차게 준비한 <명인>은 상업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결국 제작이 무산됐다. 조세래 감독이 영화계를 떠난 것도 이맘때다. 연출부와 조감독 생활만으로는 먹고살기 힘들다는 생각에 생업전선으로 뛰어든 이유도 있었으나, <명인>을 통해 바둑을 소재로 <서편제>처럼 문화적 깊이가 있는 영화를 제작해보고자 했던 시도가 좌절된 데에서 비롯된 아쉬움도 있었을 것이다.

▲ <스톤>에서 중년조폭 역을 맡은 배우 김뢰하.


포석-사업가, 소설가로 살며 영화를 꿈꾸다

조세래의 40대는 평범한 보통 가정의 가장과 다르지 않았다. 충무로를 떠나 사업가로 전업한 그는 중고차포장회사, 요식업 등 다양한 사업을 했다. 자신의 오랜 관심사였던 바둑을 좀더 가까이서 접할 수 있기에 기원을 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영화를 놓지 않았다. 언제든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그리고 어떤 영화이든 잘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런 마음을 다독이며 쓴 3부작 장편소설 <역수>(1997) 역시 바둑과 인생의 순리를 담은 작품이다. 조훈현 9단이 '나에게 승부라는 화두를 다시 한 번 일깨워준 작품'이라고 평한 바 있는 이 소설은 구한말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3대에 이르는 바둑꾼들의 승부를 다루는 작품으로 바둑인들과 문인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다.

소설 <역수>의 개정판 <승부>(2002)를 출간하고도 10년 뒤. 영화는 다시 조세래 감독의 삶 속으로 불현듯 들어왔다. 50대 중반에 접어든 그였지만 영화계로의 귀환은 생각처럼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나이 들면 육체적으로 힘들어서 그만두는 운동선수라면 모를까, 영화감독들이 너무 빨리 현장을 떠나는 현상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다. 조훈현 9단도 아직 자기 손녀뻘이 되는 선수와 한판 승부를 벌이는데, 한국 영화계는 조로현상이 너무 심한 것 같다. 나이 들어 영화 만들면 뭐 어떤가. 20, 30대 감독처럼 신인감독의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면 되지. 오히려 나는 정말로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나이 든 사람도 영화를 얼마든지 잘 만들 수 있다는 걸 직접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영화가 바로 <스톤>이다. 오랫동안 조세래 감독이 꿈꿔왔던 바둑과 영화의 만남은 이 작품에서 비로소 이뤄졌다. "왜 깡패가 됐어요?"라고 물으면 "왜 바둑을 두게 됐니?"라고 묻는, 너무나도 다른 두 남자가 있다. 프로 기사의 꿈을 접고 방황하는 청년 바둑기사와 중년에 접어들며 인생에 대한 회한에 젖게 된 건달 두목이 <스톤>의 주인공이다. 좌절된 프로젝트 <명인>과 장편소설 <역수>와 <승부>와 마찬가지로, 결국 <스톤>은 바둑을 계기로 인연을 맺은 뒤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과 한판 승부를 벌이는 남자들의 이야기다. 시합마다 소리 없는 두뇌전쟁을 벌이는 청년 기사와 극한으로 몸을 쓰며 생존해나가는 건달의 모습은 양극단에 위치해 있는 것 같으면서도 그 절 박함이 닮았다. 바둑을 생각할 때 대개의 사람들이 '명상'이나 '도' 같은 정적인 단어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오랫동안 경험해본 바둑은 삶의 희로애락을 담고 있는 스포츠다. 바둑의 본질은 승부이고 승부의 본질은 인간이기에, 바둑과 인간의 삶은 닮은 점이 많다.

▲ <스톤>에서 남해와 민수가 뜨거운 수담을 나누는 장면.

사활-인생과의 정면 승부수를 던지다

<스톤>을 연출하며 조세래 감독은 20년 전 충무로에서 활동하며 사용했던 예명(조영철)을 버렸다. 그 자신 또한 이 영화를 통해 인생과 정면으로 승부 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를 오랫동안 지켜봐온 바둑대회 대주배의 스폰서 김대욱 TM마린 대표 에게 <스톤>의 시나리오를 건넸고, 김대욱 대표는 바둑 한판 두고 술 한잔 마신 뒤 기꺼이 영화의 제작비를 지원해줬다. 조세래 감독은 <스톤>의 두 주연배우를 캐스팅할 때에도 "연기가 아닌 '진짜'를 보여줄 수 있는 배우를 원했다. "바둑 돌 두는 게 며칠 연습하면 될 것 같지만 정말 어렵다. <명인>을 준비할 때 6개월 내내 배우들에게 바둑 돌 놓는 연습을 시켰는데, 초보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더라. 바둑 돌을 제대로 놓을 수 있는가. 그게 우리 영화의 중요한 캐스팅 조건이었다." 아마3단의 신인배우 조동인과 연극을 하는 틈틈이 바둑을 두곤 했던 김뢰하가 그렇게 <스톤>에 합류했다. 기원을 운영하며 만난 '숨은 고수'들도 영화 속 내기 바둑꾼들로 캐스팅됐다. 그들과 함께 다시 찾은 영화현장은 많은 것들이 바뀌어 있었다. "우리 때는 모니터 보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신인감독도 촬영감독 눈치보느라 찍은 장면 보여달라고 말을 못할 정도였으니까. (웃음) 20년 전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편해졌더라." 젊은 스탭들과 함께하느라 어려운 점은 없었냐고 물었더니 "젊은 사람들에게 내가 맞추면 된다" 는 대답이 돌아왔다. "젊게 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평소에도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술 마시고 하는 일이 많다보니 거리감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매니저들이 와서 그러더라. 이렇게 분위기 좋은 현장 처음 봤다고.”

'조폭'이라는 센 소재를 끌어들였지만, <스톤>은 담백하고 애상적인 작품이다. 영화 는 폭력적인 장면을 최대한 절제하고 있으며, 김뢰하가 연기하는 건달 두목 남해 또한 조폭이 등장하는 최근의 영화에선 볼 수 없는 따뜻함과 남자다움을 지닌 매력적인 인물이다. "내가 활동하던 80년대만 해도 분위기 있는 조폭이 참 많았다. '너는 문제가 생겼는데 왜 나를 찾지 않고 경찰서에 먼저 가냐'고 묻는 점잖고 멋스러운 조폭들이 많았다. 나도 자연스럽게 그런 정서에 물들었지만, 난잡하고 무질서한 요즘 영화 속 조폭들에 익숙한 관객에겐 <스톤>의 남해가 신선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영화의 애상적인 정서에 대해 조세래 감독은 "우리가 살아왔던 시대가 그렇고, 내 인생이 그래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얼마 전에 최인호 선생님이 돌아가셨는데, 그분의 죽음을 통해 마치 한 시대가 저물어간다는 인상을 받았다. 영화와 소설과 시가 예술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던 시대가 지나고, 이젠 모든 것이 상업화되어 나 같은 예술가의 이야기는 잠꼬대밖에 안되는 시대가 온 거지. <스톤>이 애상적으로 느껴졌다면, 그건 내 영화가 저물어가는 것에 대한 향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미생-악화된 건강에도 다음 수를 준비하다

40여년 전 <태양은 가득히>를 본 순간부터 꿈꿔왔던 영화 연출자가 되었지만, 조세래 감독의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스톤>을 더 많은 관객이 볼 수 있도록 배급사를 찾는 일이 우선이다. 현장에 다시 서기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리며 써온 몇편의 시나리오도 언젠가는 영화로 만들고 싶다. 이렇게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지금 부터가 시작이라고 믿었는데, "<스톤>을 촬영한 이후 갑자기 건강이 안 좋아져 기가 막히다"는 조세래 감독은 그러나 덤덤하다. "늘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이젠 내 의지보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려고 한다. 내 소설엔 물처럼 흘러가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시대가, 인물이 역사 속으로 흘러가듯이, 나도 물처럼 흘러가게 되겠지." 바둑고수가, 인생고수가 던질 법한 말이 아닌가. 이 멋진 승부사의 작품을 다시 극장에서 보게 되길 바란다.

 

영화전문지 '씨네21' 장영엽 기자가 쓴 '결코 돌을 거두지 않으리라'의 기사를 그대로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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