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연말 주강배 단체전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박정환 최철한 강동윤이 중국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다.
귀가 따갑도록 들어본 중국바둑의 위용에 대해서는 이 정도만 거론하자. 층이 두꺼운 중국에 맞서 한국이 과연 2014년 다시 기동할 수 있는 단서라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한마디로 새 피의 수혈이 원활하지 않은 지금 기존의 최철한 박영훈 김지석 강동윤 등 '80후'의 저력과 유일한 '90후' 박정환의 한층 강력해진 힘에 기댈 수밖에 없다. 십 수 년을 지켜왔던 이세돌이 보합세라고 했을 때, 이들이 강보합세 내지 상종가를 치게 된다면 작년과 같은 수모는 없을 것이다.
필자는 작년 한국바둑이 몰락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수없이 정상기사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한국바둑이 이처럼 약하지는 않다고 전한다. "저변이 약하기 때문에 장차는 모르겠지만, 현재 한국은 밀린다고 생각지 않는다. 이세돌 최철한 박정환을 쉽게 볼 이가 과연 누구던가. 작년에 다섯 차례나 결승에 올랐다는 것, 5회에 걸친 세계기전 단체전에서 싹쓸이 우승을 한 것, 상금이 큰 중국리그에서 최철한 박정환의 선전 등이 말을 하지 않느냐."
사실 개인전 우승이 없는 대신 단체전 우승은 모조리 다 했다는 점은 아직도 해볼만하다는 방증이 된다. 특히 연말에 끝난 주강배에서 최철한 강동윤 박정환으로 대표되는 한국은 세계선수권자로 진용을 꾸린 저우루이양-천야오예-스웨, 여전히 화려한 현역 세계선수권자 구리-쿵제-창하오 등 두 개의 팀을 순위결정전에서 모두 꺾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 크다.
한국은 이세돌 김지석 등이 빠져있어서 최상의 팀이 아니라는 애초의 우려를 씻은 쾌거였다. 박정환은 쿵제 천야오예 왕웬쥔(대만)을 꺾었고 최철한은 창하오 저우루이양 샤오정하오(대만)를 넉 아웃 시켰다. 올해 한국바둑이 일어서는 지 여부는 한국의 문제로 귀결된다.
올해는 아시안게임과 월드컵이 열리는 해지만, 바둑은 세계기전이 작년만큼 활발하지는 않을 전망이다. 춘란배 LG배 삼성화재배 농심신라면배 초상부동산배 등 개인전 3회 단체전 2회가 일단 열린다.(물론 중국에서 또 갑자기 세계기전이 생길 수는 있지만) 중국에서 주최하는 기전은 2년마다 열려, 바이링배 몽백합배가 올해 열리지 않는 대신 춘란배가 추가되었다.
▲ 10번기에 치중하게 될 이세돌은 올해 바둑인생의 고비가 될 수 있다. 먼저 이세돌(31)은 세계대회 16회 포함하며 41회 우승에 빛나는 화려한 경력이지만 올해는 구리와의 10번기에 매진할 공산이 크다. 가장 큰 상금(500만 위안, 8억 7000만원)에 치중하는 것은 인지상정.
그러나 10번기와 함께 세계무대에서 타이틀홀더로 다시 올라선다는 것도 하락기에 접어드는 시점의 이세돌로서는 중차대한 의미를 지닌다. 익히 알다시피 이창호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다가 2005년 뤄시허에게 삼성화재배에서 일격을 맞은 이후 단 한 번도 세계무대 꼭대기에 올라가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이세돌로서는 '잠시 쉰 호랑이냐, 종이 호랑이냐' 결정짓는 절체절명의 해가 될 것이다.
박정환은 커리어하이를 찍을 것으로 전망하는 시선이 다수. 작년 응씨배 TV아시아선수권에서 준우승에 그쳐 세계대회에서 여전히 가능성만 확인했다는 점은 그의 결정력에 흠집이 되었다. 그러나 역으로 올 한 해엔 그의 포텐셜이 한꺼번에 터질 수도 있다.
이미 작년에도 그러한 정황은 포착되었다. 4월 응씨배 결승까지 가서 18세의 판팅위에서 불의의 일격을 맞은 것에서부터 꼬였고 일본의 이먀마유타에게 TV아시아까지 패해 은메달에 그쳤다. 그러나 하반기에 승률도 80%를 채웠고 다승왕에다 상금총액도 7억여 원으로 1위에 올랐다. 게다가 연말에 치러진 주강배에서 탁월한 성적으로 우승컵을 안았고, 연말부터 10연승을 이어오고 있다. 1월 중에 벌어지는 천원전 바둑왕전 결승전 고비만 넘긴다면 새해엔 상승기류가 계속 될 가능성이 크다.
▲ 랭킹1,2위 박정환 김지석은 올 한해 최고의 시즌이 될 공산이 크다.
GS칼텍스배 olleh배 등 굵직한 기전에서 우승하며 이미 최고의 한 해를 보낸 김지석의 2014년도 기대할 만하다. 그는 틈만 있으면 세계대회를 들먹였다. 일주일 전 olleh배 시상식에서도 "olleh배를 비롯한 국내기전도 탐나지만, 세계대회에서 보다 나은 성적을 올리는 것이 목표"라고 말한 바 있다.
올해 25세인 그는 랭킹2위까지 올라있다. 현재 랭킹8위까지 선수들 중에 세계대회 우승경험이 없는 선수는 김지석이 유일하다. 우승이 문제가 아니라 세계대회 4강조차 올라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부디 2014년은 세계대회 우승컵을 안아보는 것이 그의 꿈이자 팬들의 바람이기도 하다. 다행인 점은 김지석은 아직까지도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랭킹4,5위에 올라있는 '황소듀오' 최철한 박영훈(29)도 그냥 '지는 해'로 인식되기는 싫을 것이다. 중국킬러로서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최철한은 제 몫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하지만, 박영훈이 예전의 힘을 찾기를 바라는 맘이다. 원성진 백홍석이 빠진 한국대표팀에서 박영훈 마저 슬쩍 빠져서는 곤란하다.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더욱 매진해야 할 시점이다.
▲ 박영훈 최철한. 특히 박영훈의 분발이 요구된다. 이창호가 득세했을 때는 조훈현 유창혁이 있었고, 이세돌이 득세했을 때는 박영훈 최철한이 받쳐주었다. 당장은 아니지만, 한국바둑도 궁극에는 미래 세대들이 받쳐주어야만 세대교체가 선순환의 주기를 탄다. 그런 점에서 나현(19) 한승주(18) 변상일(17) 이동훈(16) 신민준(15) 신진서(13) 등도 힘을 써 주어야 하지만, 아쉽게도 갈수록 정상급과의 격차가 벌어진 한 해였다. 다만 최연소그룹 '양신' 신민준 신진서가 최근 망울을 터뜨릴 것 같은 분위기여서 올해 부쩍 기대가 된다.
한국이 중국 일본에 비해 환경이 나은 적은 찰나도 없었다. 한국바둑은 위기에 강했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의식이 고조되면 고조될수록 한편으로는 타개의 묘책이 나오곤 했다. 한동안 미래권력이었던 박정환이 현재권력이 되고, 이세돌이 아직은 건재함을 보여주고, 최철한 박영훈이 죽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김지석이 세계무대에서 커리어하이를 찍는다면, 또한 기대하지 않았던 '양신'이 한 꺼풀 깨어난다면 2014년 희망을 꿈꿔도 충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