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인물
"영감은 내 응원자, 내 바둑의 후원자였어요"
재야의 기록원 김병순 여사의 바둑사랑
2019-03-24 오후 10:32:36 입력 / 2019-11-11 오전 11:15:56 수정
'재야의 기록원' 김병순 여사(81세)는 소문난 바둑광이다. 타이젬 5급인 김 여사는 한국랭킹을 비롯해 KB바둑리그, 국내 모든 기전의 결과를 7년간 노트에 기록하고 있다.
김 여사의 지극한 바둑사랑이 알려지자 바둑TV에서는 2017년 바둑대상 개막식에 초청을 했고, 바둑리그 1일 MC를 맡기도 했다. 3·1운동 100주년 기념 특별대국 블러드랜드배 이세돌vs커제 대결에서 독립운동가 후손의 자격으로 명예심판도 맡았다.
김병순 여사와 나눈 이야기를 편지 형식으로 구성했다.

영감에게.
얼마 전에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아들의 제안으로 바둑대회가 크게 열렸어요. 저와 진훈이는 바둑의 인기가 예전 같지 않아 열기가 되살아 났으면 하는 마음이 컸어요. 진훈이가 회사 대표에게 흔쾌히 허락을 받았어요. 새로운 플랫폼 홍보를 위해 바둑 대회가 열렸지요. 한국과 중국의 대표기사 이세돌과 커제의 대결이 성사됐어요.
진훈이는 이렇게 큰 대회를 열고는 ‘아들과 손자가 프로기사가 되지 못한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드린 것 같아서 좋다’고 말했어요. 영감이 봤다면 우리 모두를 자랑스러워했을거에요.
참, 딸내미가 집 근처로 이사를 오라는데 이사를 가면 여성바둑연맹까지 멀어서 갈 수가 없지 뭐에요. 지금 보금자리가 여성바둑연맹까지 지하철로 한 번에 이동할 수 있어서 여기가 좋아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영감의 질문에 대답을 했던 그때,
어렴풋이 생각나오 영감 그때를 기억하오
늦은 나이에 바둑을 시작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어요. 영감이 틀어놓은 바둑TV를 자꾸 보다 보니 어느덧 규칙적인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어요.
재미있게 바둑을 보고는 영감이 다음날 ‘어제 누가 이겼지?’ 질문을 하면 기억이 나지 않았어요.
속으로 생각했어요. 연습장에다 기록을 해두고 영감이 질문을 하면 꼭 대답을 하리다 다짐을 했지요.
그 때부터였어요.
KB바둑리그를 보면서 노트에 모든 기록을 정리하기 시작했어요. 2012년부터 노트정리를 계속했어요. 낙서를 하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셨다지요.
어느 순간부터 영감이 질문을 하면 바로 대답을 하는 나를 보고 미소 지을 때 기분이 좋았어요.
처음 바둑대회를 나갔던 그때,
어렴풋이 생각나오 영감 그때를 기억하오
교회에서 바둑대회를 하는데 기우회장이 9점도 좋고 8점도 좋으니 걱정 말라고 해서 참석을 했지요. 영감의 응원이 많은 도움이 되었는지 30명이 출전해 1등을 하게 됐어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 여성바둑연맹에도 나가게 된 날을 기억합니다. 그 날, 2012년 1월18일입니다.
여성바둑연맹에서의 활동은 나의 활력소가 되었어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실력이 잘 늘지는 않았지만 바둑은 삶의 낙이었어요. 열의를 가지고 노트에 기록을 하고 정리를 하고 있으니 실력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어요.
노트에 바둑대회의 정보들을 기록하는 것은 제 일과가 됐어요. 그리고 즐기다 보니 여기저기 소문이 났나봐요. 여성연맹회장이 제 노트를 보고 감명을 받아 KB바둑리그 개막식에 초청을 받게 됐어요. 출연을 해야 하나 고민할 때 영감의 응원이 힘이 되었어요. 2017년 KB바둑리그 개막식에 제 영상이 나올 때 떨렸던 그 기억합니다.
영감이 낙서하는 것으로 알고 있던 제 노트에는 바둑에 대한 많은 정보들이 있는 것을 보셨지요.
“언제 이렇게 콤콤들이 써놨냐~”라고 말하던 그때를 기억하시나요.
처음에는 몇 회, 몇 라운드, 출전 선수 명단을 적었어요. 결과는 O, X로만 표기했어요. 1년이 지나고 더 잘하고 싶은 생각에 몇 수 끝, 불계승으로 결과도 써넣었어요. 요즘에는 바둑이 끝나면 영어로 LOST, WIN 이라고 보여주기도 하더라고요. 쓰는 즐거움이 배가 됐어요.
바둑의 모든 순간순간이 다 재미있었어요. 2대2 상황에서 반집을 지고, 반집을 이기고 할 때가 특히 그랬어요.
제가 응원하는 팀이 이겨 기쁜 마음에 “여보여보 박수 칠일 생겼다”고 하면 함께 박수를 쳐줬지요. 바둑 한판 한판에 즐거워하는 저를 늘 응원해주셨지요.
함께 바둑을 두던 그때,
어렴풋이 생각나오 영감 그때를 기억하오
영감이 알려준 바둑이 나의 즐거운 취미가 되었고, 영감하고 막상막하 실력이 됐지요. 우리 서로 타이젬에서 만나서 바둑을 뒀던 날을 기억해요. 노트에 승패를 O, X라고 적으면서 수첩 하나에 영감과 내가 둔 바둑도 기록했지요.
내가 진 바둑이 훨씬 많아 X가 수두룩했지만 영감은 늘 나를 응원해줬어요.
다리가 아파 수술을 하고 기운이 빠져있을 때 함께 바둑을 두면서 취미를 잃지 않도록 용기를 주기도 했어요.
지금은 영감과 나의 행복했던 기록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길이 없어 가슴이 아프지만 제 마음 속에 그 날들의 기록은 생생하게 남아있어요.
다시 못 올 그 먼 길을 혼자 가던 그때,
또렷이 생각나오 영감 그때를 기억하오
그 먼 길을 혼자 가려고 준비하던 그때가 또렷이 생각나요. 불과 4개월 전의 이야기지요.
일인실에서 바둑TV를 보며 응원하는 프로기사가 이기면 ‘박수’라고 말하고 함께 박수를 쳤어요.
바둑을 보며, 딸의 노래를 들으며 그렇게 먼 길을 떠나셨지요. 멋지게 떠나셨지요.
영감은 내 응원자, 내 바둑의 후원자였어요.
다시 못 올 먼 길 먼저 떠난 영감!
이제 영감이 선물하고 간 바둑이라는 평생 취미가 나의 응원자, 나의 후원자가 됐어요. 고마워요. 또 만나요.
[노트사진: 바둑TV / 인물사진: 월간바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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