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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창호 타이틀 명국집 나왔다

이제야 우리도 제대로 된 선국집을 한권 소장한 기분

2004-08-30 오후 3:25:50 입력


한권의 바둑책을 받아들었다. 아주 고급스런 양장본으로 제책된 이 책은 첫눈에 보기에도 지금껏 보아온 여느 바둑책과는 품격이 다른 것이었다. 서울대학교 김성기 교수가 책이 제본되자마자 손수 챙겨들고 한달음에 달려와 전한 이 책의 제목은 [이창호 타이틀 명국집1]이다.

김성기 교수는 일찍이 소소회를 비롯해 바둑계의 젊은 기사들을 음으로 양으로 후원하고 기전 유치를 위해 다리품을 마다않는 골수 바둑애호가이다. 그의 마당발은 출판계 쪽으로도 뻗어 있어 그동안 다산출판사를 통해 발간한 바둑책이 서가(書架) 서너 층을 장서(藏書)하고도 남을 정도다. 요즘처럼 극심한 가뭄을 겪고 있는 출판경기에, 다산출판사 사장은 바둑을 좋아하는 김교수와 끊을 수 없는 연을 맺은 그 순간부터 예고된 '축'에 걸린 건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한 다산출판사에서 낸 대부분의 책은 김교수의 온갖 협박과 강요와 차마 떨칠 수 없는 애원에 의해 출간된 것이므로. ^^

무엇보다 이 [이창호 타이틀 명국집] 시리즈가 그렇다. 향후 5권까지 펴낼 예정인 이 명국집은 순전히 김성기 교수의 강권으로 터닦이에 들어갔다. 말하자면 바람잡이였던 것이다. 이창호 9단의 명국집을 소개하면서 서두에 굳이 김성기 교수를 소개한 까닭이자, 김교수가 잉크도 채 마르기 전에 인쇄소에서 이 책을 집어와 내게 가장 먼저 쥐어주며 서평을 부탁한 연유이다.

또 한 사람 있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기초공사에서부터 골조를 세우고 상량에 이르기까지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 최규병 9단이다. 이창호 9단이 딴 타이틀의 기보집을 집대성하는 데 난데없이 왜 최규병 9단이 등장하냐고? 사연을 몰랐다면 모를까, 안 이상 이 사연을 건너뛰고 쓰는 서평은 마치 소스 빼고 먹는 스파게티 같음이다.

'이창호 명국집'의 8할은 최규병 9단의 작품

이 책이 완성되기까지 최규병 9단은 총지휘자였다. 오페라 무대 그 아래 어둑어둑한 곳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눈에 띄지 않지만 절대적인 역할을 한 그런 지휘였다. 익히 알려진 대로 최규병 9단은 바둑도서 수집광이다. 그가 바둑책을 끌어모으는 것은 호사적인 취미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공부를 위해서이다. 좋은 바둑책이라면 상당한 비용을 지불하고라도 모두 구입한다는 최9단은 특히 일본에서 나온 바둑책들에 대한 관심이 컸다. 후지사와(藤澤秀行), 사카다(坂田榮男) 전집 등 내용뿐 아니라 책의 장정(裝幀)이 뛰어난 일본 바둑책들은 그가 최고로 아끼는 소장품들이다.

그러면서 그가 가장 아쉬워했던 것은 세계바둑 최강국이라고 자처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그토록 뛰어난 기사들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왜 그럴듯한 선국집 한권 없을까 하는 것이었고, 특히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기사 이창호 9단의 기보집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창호 9단의 기보집은 한 개인의 대국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바둑계가 소중히 여겨야 할 보배라는 측면에서 한국바둑계의 자존심을 곧추세우기 위해서라도 꼭 나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최규병 9단은 아직 때가 이르다며 주저하는 이창호 9단을 설득하고, 명국집 작업에 손수 발벗고 나섰다. 기사생활로는 이창호 9단보다 한참 선배뻘이었지만 이미 그에게 이창호라는 존재는 후배가 아니었다.

여기서 잠시 자료정리를 맡은 바둑작가 성기창 씨의 말을 들어보면 이 한권의 명국집이 탄생하기까지 그 고초와 노고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 이렇게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복사한 적은 없었다. 먼저 이창호 9단의 도전기 기보가 실려 있는 모든 활자 매체를 조사해야 했다. 우선 월간바둑과 그 부록, 바둑연감, 월간바둑세계를 비롯해 기보가 실려 있는 단행본들이 주요 조사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 정도의 자료라면 충분하겠지라고 생각한 것은 큰 오산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매체들도 이창호 9단이 승리한 도전기의 기보를 모두 싣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해서 각종 신문에 연재된 내용들을 연도별로 모두 조사해야 했다. 신문에도 없는 기보들은 직접 놓아가며 새롭게 해설을 해야만 했다."

아르바이트 조사요원까지 3명이 동원돼 수집한 자료들은 연도별, 기전별로 목록을 정리한 뒤 최규병 9단에게 넘겨졌다. 수집한 자료들의 기보를 다시 한번 검토해서 참고도가 맞는지 틀리는지를 검토하는데, 천하의 이창호 명국집에 실릴 내용이다. 어찌 주마간산(走馬看山) 식 교정을 볼 수 있겠는가. 가뜩이나 철두철미하기로 유명한 최규병 9단인데 하물며 하루에 2∼3판의 기보밖에 검토할 수 없었다고 하니, 이건 교정 차원이 아니라 새로운 연구 검토였던 셈이다. 최9단이 쏟은 공력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수집된 자료에 실려 있던 기보를 모두 게재한 것이 아니라 한 보(譜)에 한개의 참고도만 싣기로 편집방향을 정한 까닭에 가장 핵심적인 참고도를 고르는 것도 큰 일거리 가운데 하나였다. 이렇게 검토가 끝난 기보들은 최규병 9단이 다시 기보 입력 프로그램을 이용하거나 직접 기보용지에 그려서 이창호 9단에게 넘어갔다.

이창호 9단이 매일 2시간 이상 검토한 기보집

대국일정에 쫓기는 이창호 9단이었지만 하루에 두 시간 이상씩 공을 들여 세밀하게 자료를 검토한 뒤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체크를 해서 다시 최규병 9단에게 넘겨졌다. 보통 시중에 깔려 있는 바둑책 가운데 일류기사들의 이름을 달고 나온 것들이라 하더라도 그 기사의 유명세를 빌린 것들이나 주마간산 식의 감수를 거치기가 예사인데, 내로라 하는 9단이 1차 검토한 기보를 이창호 9단이 다시 몇시간씩 들여다보았다면 정성도 이런 정성이 없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바로 잡은 참고도 분량이 약 20∼30% 정도되었다고 한다. 그 해설의 깊이와 정확도에 대해서만큼은 한치도 의심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해설 가운데 핵심적인 부분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 눈에 띈다. 이것 역시 최9단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인 것으로 일본과 중국 시장을 겨냥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일본 바둑책을 주로 수입해서 보는 처지였지만 이창호라는 브랜드를 앞세워 역으로 수출하겠다는 발상이다. 실제로 일본쪽에서 이미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책의 크기와 가격은 일본에서 발행된 후지사와 전집이나 사까다 전집이 주요 비교대상이었다. 판형이 작으면 기보가 작아질 수밖에 없으므로 대학교과서 크기의 변형 판형인 크라운 판으로 채택했고 각 권마다 판권에 소장 번호를 넣어서 애호가나 수집가들로 하여금 소장가치를 느끼게 했다. 종이도 국내에서 사용하고 있는 최고급 지질로 썼다. 다만 인쇄된 기보 알맹이가 뒷 페이지에 다소 비치는 게 흠이랄까. 고급 종이가 갖는 단점이니 이 정도는 감수할 수밖에 없다.

두꺼운 표지는 청동색 오로지를 씀으로써 이창호 9단의 묵직한 성품과 기풍을 은연중 표현하고자 한 흔적을 읽을 수 있다. 마치 고서(古書)를 마주하는 듯 고색창연하면서도 고급스런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렇다면, 원고 작성에서 인쇄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물량투입을 아끼지 않았다면 뭐니뭐니해도 가격 책정에 적잖은 고민을 했을 터이다. 소장가치와 물량투입을 감안하여 5만원 이상 고가로 매겨야 한다는 의견이 분분했으나 요즘 가계경제와 출판시장 상황을 고려하여 4만원대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창호 타이틀 명국 시리즈는 1차적으로 모두 5권으로 출간할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앞으로 이창호 9단이 타이틀을 획득하는 숫자에 비례해서 계속 권수가 늘어날 수도 있다고 한다. 현재 이창호 9단이 획득한 타이틀과 이 타이틀전에서 생산한 기보

의 총 개수는 모두 550국 정도이며 따라서 1권당 약 100여 국의 기보가 실리게 된다.

이번에 선을 뵌 1권은 1989년 획득한 첫 타이틀인 KBS바둑왕전에서부터 1993년 유창혁 6단(당시)의 도전을 받아 풀세트 접전을 펼친 명인전 결승5번기까지 실려 있다.

"대국의 승패가 모든 것을 대변해 주는 냉혹한 승부 세계에서 전문기사라면 누구나 이기기 위해 바둑을 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최고의 실력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얼마나 뛰어난 성적을 거두느냐가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진정한 일류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성적 못지 않게 얼마나 충실한 기보를 남기느냐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서문에 밝힌 이창호 9단의 바둑관이다. 이 명국집은 이창호 9단이 딴 타이틀전의 기보만을 모은 선국집으로 바둑 한판을 4보로 나누고 참고도도 다섯 개를 넘지 않아 초중급자가 감상하기에는 다분히 어려운 책일지 모른다. 하지만 현재 세계최고, 최강이라는 평가를 듣고 있는 이창호의 땀과 피가 배인 기보를 통해 그가 거쳐온 과정, 반상에 내뿜었던 숨결을 느끼고 싶은 애호가로서는 한권쯤 소장할 가치가 충분한 책이라 말하고 싶다. 프로를 지망하는 연구생이나 아마고수들에게는, 물론 말할 것도 없는 필독서이다.

정가 43,000원/ 크라운판 고급 양장본/ 495쪽/ 다산출판사 발행 (T. 717-3661∼2)


TYGEM/정용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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