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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보국으로 일관한 외길60년

한국바둑의 대부 故조남철 9단의 일대기

2006-07-03 오후 12:10:13 입력 / 2008-01-25 오후 4:43:40 수정


7월 2일 타계한 송원 조남철 9단은 '기도보국(棋道報國)'의 일념으로 일생을 한국바둑의 부흥에 바쳐온 한국 현대바둑의 개척자이자 대부이다. 그가 없었다면 오늘날 '세계최강'으로 군림하고 있는 한국바둑의 영예도 없었을 것이다.

1923년 전북 부안군 줄포면에서 태어난 조남철 선생은 열 한 살 때 우연히 한국을 방문한 당시 일본바둑의 최고수 기다티 미노루(木谷實) 9단으로부터 눈에 뜨인 후 14세에 도일, 기타니 9단의 문하생으로 입문하여 18세인 1941년 한국인 최초로 일본기원 전문기사가 되었다. 일본 유학시절 나라없는 설움에 남몰래 눈물을 훔쳤던 조선생은 일본에서의 순탄한 기사 생활을 마다한 채 고국에 현대바둑을 보급할 것을 굳게 결심하고 1944년 귀국을 강행한다. 그리고 1년여의 노력 끝에 1945년 겨울 서울 남산에 한국 최초의 현대식 기원이자 현 한국기원의 모태인 한성기원을 설립한다.


일본 영예 버리고 귀국해 최초로 한국기원 설립
그러나 오로지 바둑으로 나라에 보은하겠다는 청년 조남철의 포부는 결코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는 바둑이 일반 잡기와 동일시됐던 풍토에다 고유의 순장바둑이 대세를 이루고 있던 터라 일본에서 습득해온 현대바둑의 위상과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기 어려웠던 것이다. 게다가 먹고살기도 어려운 해방전후의 경제사정 탓에 변변한 후원자를 찾을 길이 막연했다. 그 때문에 한성기원은 수시로 보따리를 싸면서 48년 조선기원으로, 49년 대한기원, 54년 한국기원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50년 한국전쟁까지 겪으며 무려 16번이나 이사를 다녀야 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나 바둑보급을 위한 조선생의 줄기찬 노력은 마침내 결실을 맺어 1968년 종로구 관철동에 한국기원 회관이 건립되고 이듬해 재단법인으로 등록되어 한국바둑의 본산이으로서의 체제를 갖추게 된다. 조선생은 평생 세 번 울었는데, 그 첫 번째는 앞서 언급한 일본 유학시절 흘린 이국의 설움이고, 두 번째는 50년 전란의 와중의 기원 건물이 폭격으로 무너져 내렸을 때의 통곡, 그리고 세 번째가 바로 68년 한국기원이 제 건물을 갖게 되었을 때 흘린 감격의 눈물이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 한국기원 설립 당시.


1호 프로기사에 초대 국수…10년천하 구가

한국바둑에 프로기사 제도와 프로기전 도입한 것도 조남철 9단이다. 1950년 전국 규모의 단위결정 대회를 개최하여 조선의 유명한 노국수에서 초야의 고수들까지 총망라한 가운데 전국 규모의 단위결정 대회를 개최하여 프로기사 제도를 도입한 조9단은 1956에는 한국 최초의 프로기전인 '국수 제1위전(현 국수전)'의 산파 역할을 해냈다. 그리고 처음으로 열린 그 기전에서 우승하며 이후 국수전을 9연패하며 명실상부한 한국바둑의 1인자로 군림한다. (통산 우승 30회 달성) 1966년 김인이란 신진 고수에게 국수를 내줄 때까지 10여년 동안 그에겐 사실상 적수가 없었다.

"이 대마는 조남철이 와도 못살려, 그러니 어서 던져!"
60~80년대 시중 기원에서 유행하던 말이다. 조남철 9단의 위세와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이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조남철'은 '조치훈' '조훈현' '이창호'로 바뀐다.)

70년대 중반 이후 사실상 승부 일선에서 물러나 후진 양성 및 한국바둑의 병풍 역할에 충실했던 조남철 선생은 70년대 중후반 대대적인 신드롬을 일으켰던 조치훈 9단의 일본 명인 획득에 즈음하여 당시 친히 TV바둑 해설을 맡아 국내의 바둑붐을 주도한 'TV바둑'의 원조이기도 하다.

바둑용어, 책에 이어 TV바둑까지…바둑보급의 선구자로

국내 바둑의 이론 및 용어 정립에 있어서도 선구자였던 조9단은 바로 '아다리'를 '단수'로 만든 주인공이다. 척박한 바둑 토양에 전문용어 하나 없이 일본식 표현이 주를 이루던 전후 시절 조선생은 직접 바둑용어 정립에 나섰는데, 오늘날 쓰이는 바둑용어의 거의 대부분이 그에 의해 고안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뿐더러 <위기개론(바둑개론)> <행마의 급소> 등 수십권의 바둑책을 직접 집필했는데, 그 중에도 54년 쓴 <바둑개론>은 이후 30여년 동안 바둑 초중급자의 교과서 역할을 하며 전무후무한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한다. 이렇다할 책 한 권 없이 생경한 일본바둑책의 해적판 번역서가 난무하던 70~80년대 <바둑개론>은 늘고자 하는 애기가들에게 등불과 같은 존재였다.


▲ 조남철 9단(오른쪽)과 조치훈 9단이 대국을 하고 있다.

조남철 선생이 '대부'로 불리는 것은 후배들에게 대한 극진한 사랑과 한국바둑계에 대한 끈끈한 애착 때문이다. 자신의 대를 이어 국수에 오른 김인·윤기현·하천석·조훈현 9단의 일본 유학을 주선했으며, 자신의 조카인 조치훈 9단을 일찌감치 일본으로 보내 바둑영재 교육을 시켜 불세출의 바둑천재로 만들기도 했다. 또한 폭넓은 대중의 인기를 누리다 얼마 전 먼저 작고한 고 김수영 7단과 중진 고재희 7단 등 숱한 제자를 배출하여 한국바둑의 든든한 토양을 이루는데 공헌했다.

'거목은 그늘이 넓다'는 말처럼 조남철 9단의 집안은 '바둑패밀리'로 유명하고, 그의 출생지 전북 부안은 한국바둑의 메카로 불린다. 80~90년대 일본바둑계를 석권했던 조치훈 9단과 그의 친형인 조상연 5단은 그의 친조카이며, 현재 한국바둑계의 허리 역할을 하고 있는 최규병 9단과 이성재 7단은 손자들이다.

'조남철 & 조훈현' 미담 2제

후배들이 밀어 9단에 추대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기원의 승단제도는 너무나 엄격해서 좀처럼 9단에 오르는 기사가 없었다. 83년 때마침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조훈현 9단이 뭇 선배들을 제치고 가장 먼저 9단에 승단했는데, 조훈현 9단을 비롯한 후배기사들이 이구동성으로 "정말로 9단에 올라야 할 분은 바로 조남철 선생"이라면서 만장일치로 결의하여 조남철 9단도 뒤늦게 9단에 승단하게 된다.

"조선생 빼고선 나도 훈장 안받아"
○…1989년 초대 응씨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여 한국바둑을 세계최강으로 끌어올린 조훈현 9단은 귀국길에 프로기사로서는 전무후무하게 카퍼레이드를 하는 최고의 영예를 누린 끝에 정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게 된다. 그러나 조훈현 9단은 정부측에 뜻밖에도 조건을 내걸었으니, "오늘날 한국바둑을 있게 한 조남철 선생부터 훈장을 받아야 한다"는 것. 그 덕분에 한국바둑을 대표하는 두 거장 조남철 9단과 조훈현 9단이 나란히 훈장을 받는 영예를 누렸으니, 바둑계로서는 겹경사가 된 셈이다.


[ 조남철 선생 관련기사 ]
- 한국바둑의 개척자 '조남철' 타계
- 조남철 선생의 7가지 업적
- 71세 최고령 본선진출 기념보

 

TYGEM / 김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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