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한승의 방문
호텔 로비에서 대회 관계자들이 마중나와 환영해 주었다. 한 직원이 우리를 대신해 체크인 수속을 밟기 위해 여권을 걷어갔고, 다른 한 직원은 마치 우리가 무엇을 물어보려는지 아는듯 |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간접적인 표현으로 답해줬다. 현재시각 4시 40분, 오후 2시부터 시작했기에 거의 종반에 접어들 시기인데 조한승 8단의 형세가 좋지 않다는 뜻이었다. 결국 끝내기에서 대역전을 노려야 하는데 '낙관주의자'인 조한승 8단과 종반이 특히 강한 요다 9단의 대국이기에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오후 5시가 되어서야 체크인을 하고 방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형은 문앞에 들어서자마자 노트북으로 생중계 프로그램에 접속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미처 양복을 벗기도 전에 모니터에 나타난 바둑판 앞에 머리를 파묻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가능한 변화 및 그에 따른 형세분석을 한 형은 "이제 됐다"며 침대에 몸을 눕혔다. 얼핏 표정을 읽으니 희망의 가능성이 거의 사라졌다고 해석해도 무방해 보였다.
침대에서 잠깐 눈을 붙이며 여독을 풀고 있었다. 약 1시간이나 지났을까. 낯선 초인종 소리가 단잠을 깨웠다. 나가보니 문 앞에 정장 차림의 조한승 8단이 서있었다. 와이셔츠의 윗 단추는 풀어져 있었고, 볼은 붉게 달아오르고 머리카락은 흠뻑 젖어있었다. 대국을 마치자마자 올라온 듯 치열했던 현장의 흔적들이 곳곳에 묻어나고 있었다. 부자연스런 웃음으로 "영호형, 저 한승이에요"라고 하는데, 굳이 대국 결과를 묻지 않아도 짐작이 가능했다. "어서와!"라며 반갑게 맞았고, 그를 방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나는 잠시 밖으로 나왔다.
근처 편의점에 가서 물을 비롯해 우유, 초콜릿, 빵, 과자 등을 샀다. 대국으로 소모됐을 에너지를 보충하라는 의미에서이다. 커다란 봉지로 두 개나 되는 간식거리를 사서 방으로 돌아왔을 때, 안에서는 바둑판도 없이 복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초반 요다 9단이 이상하게 패를 하는 바람에 많이 좋은 줄 알았어요. 15집 정도..." "그정도 여유의 형세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너무 낙관한 건가?" "걸치지 않고 막았으면 남는 거 아냐?" "한칸 뛰는수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래도 좋은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나봐요" 형은 침대 위에 걸터앉아서, 조사범은 쇼파에 피곤한 몸을 기댄채로 그렇게 쓰디쓴 고통의 발자국을 되짚어보고 있었다.
 ▲ 조한승 8단(오른쪽)과 요다노리모토 9단의 대국 장면. | 상하이에서의 첫날밤 저녁 8시, 두터미 상해지부장 '백호은침'님의 소개로 알게된 '이화원'이라는 한국식당으로 갔다. 멤버는 형, 나, 조한승사범까지 셋이었고, 해물파전, 버섯전골, 조개구이, 콩비지찌개 등 푸짐하게 주문했다. 그럭저럭 맛은 있었지만 택시를 타고 이동해야 할 정도의 거리였기에 시합때 점심으로 해결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성급히 주변 식당을 물색해봐야 할 과제가 남겨진 셈이었다. 제2의 집처럼 익숙해진 '홍차오(虹橋)호텔'이나 '왕바오허(王寶和) 호텔'이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식사할 때 나눈 얘기의 화제는 건강식품에 관해서였다. 조한승 사범이 "최근 '생로병사의 비밀'에 관련된 책을 보고 있는데 세계 10대 건강식품이 무엇일 것 같아요?"라고 운을 뗐고, 나는 마늘과 파, 미역 등을 꼽았고, 형은 "토마토 역시 포함될 것 같다"고 의견을 냈다. 조 사범은 "대부분 맞을 겁니다. 하지만 책에서 특별히 좋다고 강조하는 식품이 있는데 바로 적포도주에요"라고 밝히며 그 효능과 섭취방법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 이어졌다. 유연한 기풍과 깨끗한 매너로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조한승 8단, 순간적으로 만약 프로기사가 되지 않았다면 교수나 선생같은 교직관련 일을 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느림 템포의 논리정연한 그의 말을 거두절미하고 약간의 과장을 덧붙여 반복 설명하자면, 매일 두잔 정도의 적포도주를 마시면 주어진 수명만큼 만수무강한다는 것이었다. 신진대사를 촉진시켜주고 노화 를 방지하는 기능이 탁월하기에 가능한 것이라 했다. 사실 적포도주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창하오 9단이다. 중국기사들 중 최고 주당에 대해 '맥주는 구리(古力), 빼갈은 뤄시허(羅洗河), 적포도주는 창하오' 라는 재미난 말이 있는데, 아무튼 적포도주를 즐겨 마시는 창 9단이 다른 또래 중국기사들에 비해 조로(早老)하지 않고 장기간 꾸준한 성적을 올리는 것을 보면 일리가 있어 보였다.
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니 저녁 10시였다. 그냥 쉬기에는 이르지 않나 싶어 나는 최대한 빨리 피로를 회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안마를 제안했다. 형은 열렬히 환호했고, 조한승 8단은 아직 젊어 (^^)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인지 마지못해 동의하는 눈치였다. 걸어서 10분 정도에 위치한 작고 초 라한 안마집을 찾아갔다. 호텔로 가는 버스 안에서 대충 눈짐작으로 봐뒀던 가게였다. 중국이 한국보다 좋은점 중의 하나, 한국에서는 어느곳을 가도 쉽게 중화요리집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중국에서는 어느 곳을 가도 흔하게 안마소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블럭마다 두 세개를 볼 수 있을 정도로 안마가 대중화되고 보편화되었다는 뜻이리라.
일단 한 살이라도 젊은 나와 조한승 사범은 대충 배정해주는 대로 받았고, 형에게는 매니저로부터 실력있는 사람을 추천받아 안마를 받게 했다. 시간은 두 시간으로 협의를 했고, 셋은 나란히 누워 바둑 얘기도 하며 농담도 주고받으며 무료한 시간을 달랬다. 1시간 정도는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이후에는 기억이 없는 것이 모두 잠이 들었던 듯싶다. 약속된 2시간이 흘러 돌아가려고 하는데 조한승 사범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타지에서 긴장한 상태로 이틀간의 피를 말리는 시합을 소화하느라 온 몸이 녹초가 된 것 같았다. 최소한 오늘 저녁만이라도 편하게 잠을 청할 수 있기 를 바랄 뿐이었다.상하이의 첫번째 밤은 그렇게 저물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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