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중일 주장전 개시]
오후 2시, 드디어 중일 주장전이 시작됐다. 취재차 검토실로 내려가는데 형도 함께 가겠냐고 물으니 방 안에서 인터넷으로 보겠다고 한다.
| 아무래도 검토실로 내려가면 카메라 세례와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으로 검토는 고사하고 오히려 대국할 때보다도 큰 피로를 느끼는 게 중국의 현실이다. 그만큼 중국의 바둑열기가 높다는 반증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내일 최종전을 준비하는 형으로서는 위험한 일은 피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검토실에 내려가니 한국측에서는 상하이가 고향인 루이나이웨이 9단과 조한승 8단을 주축으로 검토 가 이뤄지고 있었다. 상하이에서 거류중인 유학생 및 주재원들도 눈에 띄었고, '백호은침','푸른옥 돌'님을 비롯한 '두터미' 중국지부, 멀리 바다를 건너 원정응원온 'lovejd'님 등이 자리를 지켰다. 게다가 한국에서 취재온 기자들도 많아 마치 한국에서 열리는 홈경기가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반면 중국측 검토진은 이틀 전 조한승 8단에게 패한 창하오 9단을 주축으로 검토가 이뤄졌다. 다른 경기와 겹쳐서인지 주요 대국임에도 유명 프로기사를 별로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은 의외였다.
마음 졸이지 않고 관전했던 적이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오늘의 승자가 내일 형과 최종국을 둬야 하므로 상대적 열세의 대국자를 응원해야 하는게 순리겠지만 오늘만큼은 확실한 선택을 내리기 어려웠다. 최근의 객관적 전력상 쿵제 7단이 요다 9단보다 앞선다고 할 수 있지만 바둑은 상대적인 게임, 즉 형과의 역대전적에서 우위에 있는 요다 9단이 덜 껄끄럽다고도 할 수 없었다.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응원할 상대를 정할 수 없었기에 오히려 편안한 마음으로 바둑 자체만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중일의 최종 수문장답게 바둑 내용은 치열함 그 자체였다. 먼저 포석에서 주도권을 잡은 것은 요다 9단(백), 그러나 최종전인만큼 확실한 실리를 탐하려다 오히려 흑에게 대세력을 허용함으로써 초반 벌어놓은 승점을 까먹었다. 형세에서 용호상박의 균형을 이루자, 이후 전형적인 실리와 세력의 밀고 당기는 팽팽한 기싸움이 펼쳐졌다. 거대한 태풍이 불기 전의 고요와 적막과 같은, 관전자로서는 지루 할 수 있지만 대국 당사자로서는 피를 말리는 시간이 이어졌다.
중반에 들어서자 조금씩 힘의 균형이 깨지기 시작했다. "요다 9단이 평소 기풍과 달리 실리를 너무 밝혔다"는 창하오 9단의 지적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흑의 세력이 더욱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세력은 집으로 만들기도 힘들지만 반면에 한번 나기 시작하면 엄청난 크기로 나기도 한다. 흐름이 좋지 않음을 느낀 요다 9단은 본능적으로 승부처임을 인식하고 무리수를 던지기 시작했다. 주위가 온통 어둠인데 그 안에서 수를 내겠다고 사석을 움직인 것이다.
필연적인 수순이 이어졌고 검토실에서는 한결같이 '백 무리'라는 판단이 내려졌다. 무궁무진한 변화가 내재된 중앙이기에 검토진들은 혹시 모를 숨겨진 묘수를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하지만 이들의 노고가 무색하게 실전의 수순은 최악의 상황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측 검토진에서 큰 소리로 "이겼다"는 함성이 터져나왔다. 이를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승리를 확신하는 환호성 들이 들려왔고, 프로기사들은 검토를 접고 바둑알을 통속에 주어담고 있었다. 검토를 주도했던 창하오 9단에게 물으니 "백대마가 곧 비명횡사할 것 같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 요다노리모토 9단(왼쪽)과 쿵제 7단이 대국을 시작하고 있다. | [희대의 헤프닝] 모니터를 통해 나오는 두 대국자의 표정, 볼은 벌겋게 상기되고 눈은 너무 힘이 들어가 부르르 떨릴 정도로 집중하는 얼굴 모습이 무언가를 암시하는 듯 했다. 프로의 바둑에서 수는 대국당사자들이 가장 정확히 읽는다고 했다. 최정상급 기사들의 대결이기에 이즈음이면 분명 어느 하나가 승리를 확신하거나 패배를 직감하는 표정을 지어야 맞는데 그런 흔적들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요다 9단의 문제의 한 수가 등장했다. 중급 정도의 실력이라면 볼 수 있는, 촉촉수의 전형에 딱 걸리는, 마치 올가미 안에 발을 집어넣는 행위와 같은 수였다. 프로의 세계에서 이정도 실수는 단수를 보지 못한 것과 비슷한 상식으로 설명 불가능한 수준의 착각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착점한 요다 9단, 너무 몰입한 상태에서 나온 실수이기에 상대의 응수를 보지 않으면 깨닫지 못하는 것은 당연할 수 있는데 이상한 것은 그 직후였다. 중국랭킹 2위의 쿵제 7단이 뻔히 보이는 수를 두지 않고 심각한 표정으로 이 수의 변화를 읽는 것이 아닌가. 승부의 미묘한 흐름을 감지한 조한승 8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설마 콩지에마저도 촉촉수를 못 보는 것은 아니겠지? 흐름상 그런 것 같기도 한데..." 어제까지 맹활약을 펼쳤던 패기의 승부사 조한승 8단의 입에서 '무언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언급이 나오자 관전자들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다시 모니터 앞에 모여들었다.
인생이란 이런 것일까. 미래가 전부 예상대로 흘러간다면 그것만큼 재미없는 일도 없을 것이다. 언제든 이변과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기대가 어려운 환경의 사람들에게는 기쁨과 희망을 주는 원동력 일지도 모르겠다. '이변'이라는 말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헤프닝이 오늘 바둑판 위에서 일어났다. 우려했던대로 콩지에 7단은 촉촉수를 보지 못했고, 끼우면 끝나는 바둑을 결국 끼우지 못하고 젖혔다. 검토실 안의 모든 분위기는 정반대의 흐름으로 바뀌어 절망에 빠졌던 일본 검토진은 희망의 탄성이, 승리를 확신했던 중국 검토진에서는 절망의 한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둑알을 쓸어담았던 프로기사들 역시 다시 바둑판 앞에 모여들어 검토를 재개했다.
바둑의 흐름도 순식간에 바뀌었다. 결과적으로 양대국자 모두 결정적인 수를 보지 못했기에 단순히 흐름이 바뀌었다고 말하긴 어렵겠지만, 최소한 검토실에서는 쿵제 7단의 필승지세가 돌연 반면 비슷한 불리지세로 뒤바뀐 것만은 분명했다.
종반에 강한 요다 9단을 상대로 반면 비슷한 형세를 뒤집기는 너무 버거웠다. 쿵제 7단은 좌상귀 삭감을 시작으로 초강수로 일관하며 추격을 노렸지만, 요다 9단의 노련한 승리굳히기에 속절없이 끌려다녀야만 했다. 끝낼 수 있는 찬스를 포착한 요다 9단, 과연 당대의 승부사답게 최후의 숨통을 끊는데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팻감이 부족하다는 흑의 약점을 이용, 결국 상변에 큰 수를 내며 기나긴 승부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공식결과는 236수 끝, 백 불계승. 흔히 승부에서 최우선 요소로 실력을 꼽지만, 반면 실력을 갖췄다고 반드시 승리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아이러닉한 승부법칙을 잘 말해준 한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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