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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칼럼

'애기'의 무서움을 범들은 몰랐다

선견지명이 있는 한상훈, 그의 활약을 기대해 본다

2007-06-08 오전 12:08:19 입력 / 2007-06-08 오후 1:06:34 수정

LG배 16강이 끝나고 한상훈(1988년생)의 돌풍으로 한국 바둑계가 한바탕 시끄러웠다. 2006년 12월에 입단한 초단이 세계대회 본선에 올라 한국 바둑계를 들썩였는데 이번에는 한국의 강적인 구리를 꺾고 세계 바둑계를 들썩였다. 하룻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몰랐던 것이 아니라, 범이 하룻 강아지 무서운 것을 몰랐던 것.


물 만난 고기 처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상훈은 돌풍이 아니라, 잠깐 쏟아지는 소나기(?) 정도로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 입단 3개월만에 12승 1패를 기록하며 물 만난 고기 처럼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던 한상훈은 왕위전 도전자 결정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게다가 KB국민은행 한국바둑리그 대방 노블랜드 윤기현 감독은 한상훈을 주목하고 있다가 2장으로 지목해 또 한번 한국 바둑계를 들었다 놨다. 오죽하면 "이창호도, 이세돌도 입단한 뒤 이렇게 좋은 활약상을 펼치지 못했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

하지만 한상훈은 한국리그에서 2장 몫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3연패를 기록. 이렇게 이번 LG배는 한상훈의 진짜 실력을 판가름 할 수 있는 중요한 기로가 됐다.

 


범은 하룻강아지 무서움을 몰랐다
LG배 32강이 열리는 6월 4일 오전 9시 40분. 한상훈은 일찌감치 대국장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세계대회 본선에 취재를 하러 여러번 가봤지만 이렇게 일찍 대국장에 나와 자리에 앉아있는 경우는 못 봤다. '너무 긴장한거 아냐?'라는 생각이 든다.

이미 두번의 인터뷰에서 친근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슬쩍 말을 건내본다. 집이 분당인데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지하철을 타고 대국장에 왔단다.
"뭐, 항상 오던 길인데요. 도장 갈 때나, 한국기원 갈 때나 시간 반정도 걸렸어요. 전혀 피곤하지 않아요" 1시간 반정도 걸리는 거리인데 세계대회에 참가하러 오는 기사치곤 참 용감(?)한 생각이다. 뭐가 달라도 다르다. 목소리는 한결같고 떨림이 없다.
"떨리지 않아요. 아직 아무런 생각이 없는 걸요" 말 그대로 정말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인다. 나쁜 의미가 아니라, 마음을 비우고 있다는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포기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10시에 대국이 시작하고 어느덧 3시를 훌쩍 넘겼다. 이세돌이 가장 먼저 승전보를 전하고, 믿었던 한국 선수들이 속속 탈락 소식을 전했다. 그 뒤 박정상의 승전보가 전해졌지만 침울했던 분위기는 여전. 박정상의 승리 소식이 전해지고 10분 뒤 한상훈의 승리 소식이 들린다. 류시훈을 불계로 꺾고 16강에 오른 것이다. 기자석은 기쁘고, 놀라운 소식을 전하기 위해 갑자기 분주해 진다. 32강 대진 추첨 후 '류시훈은 지면 망신이고, 이기면 본전이야~'라며 주위에서 우스갯소리를 했던 것이 떠오른다. 아마 한상훈이 질 것이라는 계산을 하고 말한 것이리라. 고배를 마신 류시훈은 이후 대국장에 한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모든 대국이 끝나고 추첨 시간. 한상훈은 항상 그래왔듯이 힘없는 표정과 자세로 추첨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막내인 한상훈은 마지막에 추첨을 했다. 이제 중국 선수단의 추첨 시간! 후야오위가 첫 번째로 추첨을, 다음 추첨을 위해 구리가 성큼성큼 걸어 나온다. 구리는 중국랭킹1위 답게 자신감이 넘친다. 냉정하게 한상훈 옆자리를 뽑는다. 헉! 이제 한상훈의 돌풍은 여기서 끝나는 구나.



▲ 한상훈(왼쪽)과 구리의 대국 모습.

하루 휴식을 취한 6월 6일. 한상훈이 초반부터 앞서고 있다. 쭉 좋은 흐름이다. 점심 시간이 지나고 3시가량 이세돌이 첫 승전보를 전했다. 역시 이세돌이야! 라며 승리를 모두 예상한 분위기. 이세돌은 검토실에 올라와 다른기사들의 대국을 살펴보며 승리의 환희를 만끽한다. 역시 여유로운 모습. 이후 검토실은 잠잠해진다. 한 두시간 가량이 지났을까? 한상훈은 중국 랭킹1위 구리를 꺾었다. 검토실에 있던 기자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박수 소리가 절로 나온다. 한상훈은 "대국 중 한번도 불리했던 적이 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완벽한 승리였다.
대국이 끝나고 지든, 이기든 검토실에 모여 의견을 나누던 중국 선수들. 항상 그 자리에는 구리가 있었는데 이날은 없다. 구리도 류시훈과 마찬가지로 한상훈에게 진 이후 검토실에 한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3년간 한국 선수들이 성적을 내지 못하면서 침체되어 있던 LG배는 이날 이세돌·한상훈의 승전보 만으로도 흥행에 성공했다는 분위기. LG배 주최사 조선일보측 관계자가 대국이 끝나고 나온 한상훈을 와락 껴안았을 정도. 한상훈의 진가는 이렇게 LG배에서 다시한번 증명됐다.

후에 기자단 및 대회 관계자들의 회식자리에서 들은 이야기로는 중국 선수들이 모여 한상훈 대 구리의 대국을 구경하면서 한상훈은 '애기'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애기'가 잘 두네, '애기'가 힘을 쓰네 등의 말을 하며 대국을 감상했다고. 그들에게 한상훈은 갓 입단해서 얼떨결에 세계대회에 오른 '애기'에 불과했다. 범들은 몰랐다. 하룻강아지의 무서움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선견지명이 있었다
- 입단하기 전에 에피소드 같은 것 없나요. 꿈을 꿨다든지.
한상훈 어머니 : 입단하기 전은 잘 모르겠고요, 상훈이가 입단을 한 다음에 저한테 '입단을 했으니까 처음 목표는 8강으로 잡을래요, 그리고 한국리그 본선에 오르고 싶어요'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입단한지 얼마 안 되서 목표가 다 이뤄졌어요. 대견하죠. [2007년 4월 12일]


입단을 한 뒤 얼마되지 않아 한상훈을 만나 인터뷰를 했다. 어머니와 함께 인터뷰 장소에 나온 한상훈의 첫 인상은 힘이 없는 소년이었다. 마른 체격인데다 조금한 목소리로 말을 하는 자신감 없는 소년. 하지만 2시간 가량 인터뷰를 하면서 느낀 것은 '할 말 다 하는 스타일이네'였다. 자신의 목표를 또박또박 말하는 모습이 참 진실되어 보이는 소년이다.

- 프로기사가 되서 제1의 목표는 세운 셈인데요, 제2의 목표를 세운다면요.
성적도 잘 내고 싶고 타이틀도 따고 싶어요. 우선은 한국리그 본선에 올랐으니 열심히 할 생각이고요. 제2의 목표는 세계대회 본선에 오르는 것이죠. [2007년 4월 12일]


그렇게 한상훈은 왕위전 도전자결정전에 올랐고, 한국바둑리그 본선에도 올랐다. 인터뷰를 한뒤 2주 만에 이번에는 한상훈이 LG배 본선에 올랐다. 제2의 목표를 이룬 것이다.

- LG배 본선에 올랐는데, 누구와 대결하고 싶어요?
저번에 타이젬 인터뷰에서도 말했듯이 중국 신예기사들하고 대국하고 싶어요.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치열한 기풍을 가지고 있는 구리 9단이랑 대국하고 싶어요. 승부와는 상관없이 아주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 [2007년 4월 30일]


말한대로 또 이루어졌다. 기회가 된다면 구리와 대국하고 싶다고 했는데, 역시나 적시나 구리와 만났다. 게다가 이겼다. 한상훈은 선견지명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말한대로 행동에 옮기려는 노력을 한 것인가.


강한자 이기에 살아남았다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고? 실수를 했다고? 냉정하게도 승부의 세계의 결과에는 핑계가 있을 수 없다. 강한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세상에는 약하지만 강한 것을 두렵게 하는 것이 아주 많다. 파리는 전갈에게, 거미는 매에게, 모기는 사자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아무리 크고 힘이 세다고 무서운 존재가 아닌다. 아주 약한자라도 조건만 갖추어진다면 강한자를 이길 수 있다.

16강이 끝나고 한상훈은 이왕 8강에 올랐으니 결승까지 가보겠노라고 말한다. 약해보이지만 강한자를 두렵게 했던 한상훈. LG배 8강이 속개되는 11월, 한상훈의 활약을 기대해 본다.

 


TYGEM / 정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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