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시평
조선 사신들, 중국 바둑을 보고하다
순장바둑에 관한 연구와 검토가 필요
2007-03-05 오후 4:02:36 입력 / 2007-03-05 오후 4:03:53 수정
| 조선의 외교는 거의 중국과 일본에 국한한다. 사은사 성절사 등의 사신단으로 대 중국과 외교 관계를 유지 하던 조선은 일본과는 통신사로 연속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조선은 특히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중요시 했다. 조선은 거의 700회에 걸쳐 중국(명. 청)과 사신단을 교환한다. 사신단은 정사 부사 서장관 등 고위 관원을 중심으로 거의 500여명의 대규모 인원이 동원되어 출발 부터 귀국까지 전 과정이 철저하게 통제되고 관리 된다. 사신단은 중국을 다녀 온 후 연행록이란 보고서를 만들어 조정에 제출해야 했다. 연행록은 대체로 서장관이 담당했고 때로는 다른 사람들이 쓰는 경우도 있었다. 작성된 연행록은 조정에 보고된 것과 필자 개인이 소장하는 등 이본 등이 나뉘어져 있었고 조정은 불시에 개인 소장품을 뒤져 검색하는 등 대중국 외교를 관리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7백여편의 연행록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박지원의 연행록일 것이다.
연행록은 대중국의 정치사는 물론 문화, 문물, 풍속 등을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사회상을 이해하느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 연행록중에서 바둑을 기록한 연행록이 10여종이 있는데 그중 김창집, 김경선, 서유중, 박지원이다. 이들은 숙종에서 순조 당시 연경(북경)을 다녀온 사람들로 이들의 취재속에 당시 연경 지역의 바둑이 채록 되어 있어 당 시대의 바둑을 연구 할 수 있는 단초가 되어 준다. 그동안 우리는 조선에는 조선 고유의 바둑(순장)이 있었고 중국과는 형식이 다른 바둑을 두었다고 알아 왔다. 이것은 중국에 전하는 명청대의 기보와 조선에 전하는 20세기 초의 기보(순장 기47국이 전해온-안영희 님의 연구)가 다르고 청나라 말기의 책 '위기고적보'에 조선의 바둑은 청과 다르다는 기록 때문이다. 명청대의 기보는 흑백이 각기 두 점씩 각 화점을 찾이 하고 두는 식의 기보가 주류다. 우리(순장)식 바둑은 화점선을 중심으로 흑백이 8점씩을 찾이 하고 두는 형식이다. 순장 바둑은 사실 한자 마저도 특정 하지 못하는 불 안정한 것이다. 20세기 초에 발간된 몇몇 신문의 기보가 별다른 연구와 검토 없이 우리 고유의 바둑이라는 인식으로 고착화한 것이다. 그러나 18세기 19세기 연경을 다녀온 사신들의 눈은 이 바둑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 하게 한다. 1712년 숙종 38년에 연경을 다녀온 '김창업'은 그의 연행록에서 이렇게 중국 바둑을 보고하고 있다. - 어느집에 묵게 되었는데 그집에 바둑판이 있어 주인과 바둑을 두게 되었는데 우리식과 같았다. 다만 초두에 배자가 없는 것이 달랐다. 이 기록은 읽는이의 해석에 따라 약간의 편차가 있을 수 있다. 초두의 배자라는 말이 그것이다. (정수현 님의 한국 바둑사에는 이 점을 들어 중국식과 조선식의 바둑을 구별 했다.) 김창업은 이후에도 3회에 걸쳐 연경을 더 다녀 온다. 초두(初斗)와 배자(配子)의 해석을 차치 하고 김창업 이후 1세기 후에 연경을 다시 다녀온 김경선(金景善)은 '유관별록'에서 김창업이 연경에서 두었던 바둑을 다시 증언한다. - 바둑두는 법은 오직 중앙에 한점을 놓는 것만 다를뿐 나머지는 우리와 똑같다. 연경에서 중국의 지식인들과의 교류에 정신이 팔려 있던 김창업과는 다르게 김경선은 중국 여항의 각종 기록을 빼곡히 채록하고 있다. 마술 점술 연극등 거의 모든 문화상을 기록한 김경선은 장기 대해서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 장기 두는 것은 우리와 비슷하다. 다만 장이 모(方)로 가지 못하고 사(士)가 바로 가지 못하고 차와 포의 사용법이 다르다. 김경선이 본 장기의 모습은 매우 정확하다. 오늘날에도 중국과 한국의 장기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이런 세세하고도 정확한 김경선이 중국 바둑이 우리와 거의 같다고 적고있다. 이점은 '서유중'의 기록에도 대동소이하다. 20세기초 조선의 바둑을 취재한 미국인 '슈투어드컬린'은 당시 조선의 장기가 일본 중국과 매우 다르다고 기록 하며 조선의 바둑에 대한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는 것도 조선 중국의 바둑의 형식이 별다르지 않다고 본 탓이다. 박지원은 여정에서 여러번 바둑을 언급하고 있으나 모두 일행들과의 이야기다. 그렇다. 당시 조선 중국에는 4배자. 6배자 8배자(순장식이라 하는) 바둑의 형식이 자연스럽게 두어 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조선에 특별히 8배자 형식이 유행했던 것인지는 모른다. 숙종실록에는 청나라 사신들이 한양에 와 있을때 영접도감에서 수시로 조선의 고수들과 바둑 기물을 들여 달라는 요구가 나온다. 영접도감에 조선의 고수들이 불려 들어가 중국의 사신들과 바둑을 두었다면 어떤 형식의 바둑을 두었을까. 오늘날 우리는 순장바둑이라는 유령(?)에 홀려 있다. 순장 바둑이 우리의 고유의 것이란 믿음과 자부도 중요하지만 순장 바둑이 과연 우리만의 것이고 우리만의 전통이 되기 위해서는 보다 깊은 연구와 검토가 필요하다고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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