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시평
고구려의 바둑을 주목한다
사신도와 삼족오의 자리
2007-03-26 오전 10:07:21 입력 / 2007-03-26 오후 1:30:27 수정
| 은허 점사(占辭)의 권위자인 '진몽가'는 은나라 제사 대상인 해신과 달신이 동모(東母) 서모(西母)라 해석을 하며 은나라의 유풍이 남아 있던 나라인 고구려, 부여가 주목된다 했다. 두 나라는 은나라의 현조강생(顯鳥降生)을 시조 신화로 하고 그들의 시조를 주명(朱明. 혹은 주몽, 동명)이라하고 어머니를 하백의 딸이라 한다고 했다. 이 주명을 중국의 고대의 '자전'인 '광야' '석천'은 동군(東君)이라 하고 해(日)를 가르키는 말이라 적고 있다. 아프리카 어떤곳에서 도로 공사를 하다가 사금파리 하나만 나오면 중국의 옛날 땅이란 식의 도편역사관(陶片歷史觀)을 주창 하는 중국 역사 학자들 속에서 간헐적으로 나오는 이런 연구는 고구려와 부여의 독자적인 천하관과 세계관을 보여 주는 것이라 반갑기 그지 없다. '주서'는 고구려의 신을 이렇게 기록한다. -度人葛衣女子首施巾俗喜奕投壺蹴鞠. 그러나 주서의 이 기록에 나오는 '혁'의 해석에 대한 의문점이 있기에 고구려의 바둑 기록의 확인에는 다소 모호한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1923년 중국 낙양성에서 발굴된 연남생의 묘지명이 그것을 상쇄 시켰다. 묘지명은 남생이 검술 서예를 잘 했고 바둑 거문고에 취미가 있었다 기록 하고 있다. 이 기록으로 볼때 주서의 혁을 바둑으로 인정해도 무방할 듯하다. 주서의 기록은 대단히 정확하다. 고구려에 바둑이 있었고 축국이 있었다는 기록을 우리는 조선 시대 19세기 문인인 홍석모(1781-1857)의 글속에서 쉽게 확인 할 수 있다. 축국장이 시장 길가에 있으니 홍석모는 그의 저서 '동국세시기'에서 당시 유행 하던 축국을 기록하고 있다. 동시에 축국은 두사람이 큰 탄환만한 공을 갖고 하는데 서로 차 땅에 떨어트리지 않는 것을 장기로 한다며 공에 꿩의 깃이 달려 있다고 부언 설명까지 한다. 고구려 고분인 장천1호분의 벽화에는 당시 고구려의 사회상이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벽화에는 말을 타고 수렵을 하는 모습을 좌우에 배치하고 그 가운데 수박 씨름등을 하며 즐겁게 노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곡예를 하고 원숭이가 노는 모습을 즐기는가 하면 음주 가무를 하고 둘러 앉아 기도를 하는 모습 등이 보인다. 한쪽 커다란 굴안에는 곰 한마리가 앉아 있기도 하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은 고구려에 음주가무를 하며 날밤을 새우는 풍습이 있다고 했다. 10월에 국중대회를 여는데 동맹이라 부르며 이날 수렵 제천행사 제가회의를 한다고 기록 한다. 장천리 고분 벽화는 이 동명의 모습을 그린것으로 보인다. 이 자유분방한 왕족과 일반 백성들의 모습속에 바둑 축국 등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속에 바둑 축국 등은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바둑이 고구려에서 융성했던 기록은 삼국사기 도림조에서 찾아 지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도교의 유입과 맥을 같이 한다. 바둑은 난가의 전설에서 보듯 도교의 신선 사상과 축을 함께 해온 기예다. 도교는 노자를 신으로 주술 , 치병, 기복을 강조해온 종교다. 부적과 부수(신령한 물)를 포교의 수단으로 삼고 당 송시대를 풍미한 종교다. 바둑의 현란한 수법이 도교의 신비주의와 맞아 떨어져 도교의 절대적 사랑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고구려에는 이 도교의 전신인 '오두미교'가 있었다. 이를 연개소문이 나서 당에서 직접 도교의 샤먼들과 도덕경을 들여와 전고구려에 퍼트린다. 연개소문 스스로 수중인(水中人)이라 하고 오도(五刀)를 차고 다니며 도교의 전파에 전력한다. 이런 연개소문의 아들인 연남생이 바둑과 거문고에 심취 했던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필자는 1920년대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낙랑왕관묘" 보고서속에서 바둑알 두점을 보았다.(147페이지) 그와 함께 정백리 남정리고분 발굴 조사보고서(조선총독부 145페이지)에서도 낙랑왕관묘에서 본 바둑알을 보고 놀랐다(이 자료는 지금껏 무엇이 무엇인지 전혀 연구가 없다. 유물의 소재지도 알지 못한다). 발굴지가 평양 근방이니 고구려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고구려의 바둑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우리는 한대 망도 유적지에서 나온 17줄 바둑판을 알고 있다. 당대(594)의 무덤에서는 19줄 바둑판이 나온바 있다. 8세기 신라에서는 15줄 바둑판이 나왔다. 10세기 요나라 무덤에서는 놀랍게도 13줄 바둑판이 나온다. 아시아 전역에서 발굴되는 바둑의 미스터리다. 고구려사는 아직도 미완이다. 그속에 민속과 예능편에 불과한 바둑의 연구는 너무나 먼나라 이야기다. 그러나 바둑의 속성이 사신도의 천하관과 별자리를 중심으로 한 역관(曆觀)과 무관 하다면 고구려의 국기(國伎)로써 새롭게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고 본다. 이런 연구가 축적될 때 은족과 고구려 부여의 관계가 연구되고 바둑이 은족의 역사에서 나온것임이 발견된다면 오늘날 세계 최강인 한국 바둑의 역사가 결코 우연이 아님도 들어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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