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배
紅面棋王 저우쥔쉰
대만바둑 영웅탄생-한 중 일에 이어 대만이 4대 강국으로 부상
2007-03-23 오후 5:32:46 입력 / 2007-03-23 오후 8:06:49 수정
|
대만에 영웅이 탄생했다. 토종 대만 기사 저우쥔쉰이 중국랭킹 3위 후야호위를 뉘면서 LG배 우승을
차지했다. 이는 일개 변방국인 대만의 장거로, 19년 전 조훈현의 잉씨배 우승으로 설움 받던 한국바둑의 위상을 만방에 알린 것에
비견되는 쾌거. 그간 대만에서도 린하이펑, 왕리청, 왕밍완, 장쉬 등 뛰어난 기재들이 많이 배출되기는 했지만, 자국리그의 성장 부진을
이유로 일본을 인큐베이터로 삼았었다. 그러던 와중에 뜻하지 않게 대만토종 저우쥔쉰이 바둑황제에 오른 것이다.
紅面棋王(홍면기왕)에서 대만영웅으로 그는 고교시절 곧장 대만바둑계의 1인자로 올라서지만 세계무대에서는 보잘 것 없었다. 그가 세계선수권에 10년 정도 얼굴을 내밀었으나 그다지 성적을 내지는 못했다. 처음에는 대만이란 국가도 세계선수권에 끼워준다는 정도로 인식할 뿐, 누구 하나 주목하는 이 없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만한 대상을 찾던 그에게 부친의 바둑권유는 새로운 삶을 찾는 계기였다. 바둑판을 마주 할 때는 질시도 편견도 없었다. 오직 실력만으로 승패가 갈라지는 바둑이 그토록 좋았던 소년. 6세의 어린나이에 비로소 놀림과 멸시를 잊을 수 있는 바둑이 빠져들었다. 이후 20년이 흘러서 지금 누구도 믿지 못할 인간승리의 기적을 이루어 냈다. 저우쥔쉰은 80년생. 95년부터 06년 대만 명인전에서 무려 13연패를 한 대만의 조훈현이다. 9세 때부터 정규교육을 포기하고 본격적으로 바둑을 배워 11세 때 두각을 나타낸다. 이후 추천 케이스로 중국으로 유학, 본토의 송쉬에린의 바둑도장에서 연마했으며 13세 때 중국의 입단대회에서 프로3단 면장을 받는다. 톡톡히 이변이 정상적인 상황으로 바뀌어간다. 그러다 서서히 강자들과 시합을 통해 점점 강해져 오히려 잦은 이변은 정상적인
것이었다. 98년 당시 일본에서 터를 잡은 대만출신 바둑스타인 왕리청을 이겨 세계 8강에 진출한다. 01년 후지쯔배 세계대회에서
목진석, 이세돌 그리고 일본의 고노린에게 이기며 4강까지 진격한다. 그러나 제 아무리 성장을 거듭한 저우쥔신이라고 해도 창창한 우승후보군을
뒤로한 채 세계왕좌에 올랐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다.
저우쥔쉰이 대만에돌아가면 난리가 날 것이며 공중파 방송 인터뷰는 물론이고 아마 천스웨이벤 총통이 제일먼저 면담할 것이라고 들뜬 상태로 말할 정도. 조훈현의 예기치 못한 우승 때도 우리기자들의 반색하는 얼굴이 떠올랐다. 대만출신 왕밍완이 이 바둑 해설을 위해 대만으로 날아갔고 1국에서는 600명의 관중이 들어찼다. 88년 조훈현 9단이 잉씨배를
따내었을 때 서울역전에서 대형 바둑판을 들고 거리로 나왔던 우리의 상황과 너무나 흡사하다. 두는 순간에도 실력이 느는 저우쥔쉰 저우쥔쉰은 속기로 일관하며 자신 있는 손길로 형세를 리드한 끝에 반면으로 거의 20집 차이를 벌리며 압승을 거둔다. 소비시간도 남아있어 초읽기에 몰린 후야오위와 대조. 결승에서 이렇게 시간을 남긴 예는 없다.
2국 - 통한의 한 판 바둑
생애 첫 결승진출의 꿈을 내일로 미뤄야 한 저우쥔신. 평생 씻지 못할 불길한 추억이 될 뻔한 2국을 역전패하자 대만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펑펑 울음보를 터뜨리고 만다. 그 울음은 대만의 한계를 보여주고 결승시리즈의 대미를 미리 보여주는 듯했다. 반집. 그것도
역전 반집. 그리고 쉴 틈도 없이 다음날 최종국이 벌어지면 후야호위에게 흐름이 이어진다고 보는 게 일반의 흐름
아니겠나. 2국의 대역전패가 마음에 걸릴 것이란 예상을 일축하고 국면을 완벽히 장악한다. 중반 후야호위가 좀 강한 수를 두지 못하고 주저주저하는 사이에 일거에 승세를 확보하여 완승태세를 갖춘다. 강하게 나가 KO승을 거둘 찬스도 있었지만, 조금씩 물러서자 2국과 같은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강하게 두지 않아도 이기는 길을 보아두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이리라.
경적필패의 교훈 또한 저우쥔쉰 다분히 상대적으로 대진운이 좋아 결승까지 올라왔다. 반면 후야호위는 우승을 해야 정상일 만큼 쟁쟁한 후보를 꺾고 올라왔다. 저우쥔쉰은 황이주 다카오신지 씨에허 홍민표를 꺾었다. 후야오위는 조훈현 야마시타케이고 이창호 조한승을 눕히고 결승에 올랐다. 분위기상은 후야호위가 분명 우승해야 어울린다. 그러나 한판의 승부는, 더욱이 그들이 일생일대의 중요한 승부에서는 다를 수 있다. 게다가 양안관계의 특수성까지 들어가게 되면 정신적인 면이 중요한 승부호흡이 되었다. 기량 외에 여러 요소가 있다. 그 여러 요소에는 바로 민족적인 관점에서 중국이 당연히 ‘큰 집’이라는 의식이 꼭 이겨야 한다는 부담으로 후야호위에게 작용했다. 후야오위의 스승이자 치우쥔의 부친 치우씬은 2국 종료 후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후야오위한테 유리하다고 용기를 불러일으킨 대목이 중국의 대만 경시풍조를 엿볼 수 있다. 개인의 성격, 마인드컨트롤이 중요하지만 기본 기량을 무시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큰 바둑은 심장싸움이란 사실을 망각한 것이 아닐까. ‘기본 기량’에서도 그리 앞서는 것도 아니다. 이번 세 판은 모두 저우쥔쉰의 완승이었으며 그 이전에도 상대전적 1승1패인 상대에게 왜 경적을 하는 것일까. 저우쥔쉰은 99년 후야호위에게 패했으나 04년 그들이 자랑하는 최고의 무대인 갑조리그에서 그를 꺾었다. 그렇다면 같은 1승이라도 저우쥔신은 바둑이 강인하지 못한 시절보다야 최근 것이 더 가치가 있는 것. 다만 한국에서조차 후야호위를 인정하는 것은 이창호를 잘 이긴다는 사실 때문에 거저 이길 수 있다고 오판이었다.
기량이 좀 쳐지는 입장이면 촌음도 아껴 쓰기 십상인데, 의외로 상대가 빨리 감각적으로 두어나가자 시간안배에서도 이미 승리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저우쥔쉰이 2국에서 패한 이유도 우승이 목전에 이르자 그만 신중이 지나쳐서 초읽기까지 간 것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최종국에서는 무려 47분이나 남겨 놓았을 정도의 속기였다. “잉씨룰은 덤이 7집반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흑을 잡길 원한다. 6집반의 덤이라면 당연히 흑이 좋은 것 아닌가?” 그랬다. 저우쥔신은 대만에서 잉씨룰로 대국을 많이 하다 보니 흑의 부담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흑을 선호했다. 3국에서도 상대가 백을 들고 가자 내심 기뻤다고 했다.
적절한 긴장해소 - 긴장해소방편으로 자리를 자주 뜬 모습이 보였다. 이런 행태는 오히려 상대의 진을 빼는 효과가 있다. 장고파인 후야오위의 패턴에 지치지 않기 위해 대국 중 자주 자리를 비우며 승부호흡을 찾아갔다. 대국 중 아마도 50번 정도는 족히 일어서지 않았을까.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기 위한 고육책이었지만 페이스를 자신의 것으로 돌려놓는 데는 성공한 셈이다. 욕심을 버릴 줄 알았다 - 대국전의 예상은 자신이 이길 가능성이 48%라고 밝힌 것은 부담 없다는 뜻이다. 결승에 진출한 자체가 일단 성공이라고 생각하니 늘 즐거워하고 평상심을 잃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1국에서 승리하고 난 뒤 대만 바둑 팬들의 소식을 접하고는 우승이후를 지나치게 의식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인 이상 욕심은 생기기 마련. 문제는 그 욕심을 재빨리 차단하고 초심으로 돌아왔다는 것이 중요하다. 2국에서 패하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눈물을 펑펑 쏟아내었다는 것은 ‘욕심’이 서려있다는 뜻과 같다. “한 번 그렇게 지고 나니
언제든지 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오히려 편하게 대국에 임할 수 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나에게 큰 약이 되었다.”
공식인터뷰도 거절하는 후야호위와는 비교되었다.
대만바둑 붐 기대 그러나 반론도 있다. 한 대만기자는 “워낙 난마처럼 복잡한 구도 속에서 바둑을 실제로 배우는 사람들이 늘어날 지는 두고봐야
한다.”며 냉정한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층이 너무나 미약하다는 얘기이다. 응창기기금의 추천기사로 출전했으나 현재 대만바둑계를
대표하는 기관은 대만기원. 저우쥔신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주도권 다툼도 변수이다. 그 외 2개의 바둑단체가 더 있으며 심지어는 중국
룰도 대국하는 단체도 있다. |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