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경은 역사는 나라의 거울이라 했다. 옛것을 들어내고 미래를 여는 것이기에 역사가 중요하다고했다. 이규경은 역사를 기록하는 방법으러 '포폄'과 '편기'가 있다고 했다. 역사는 있는 시실을 기록하는 것이 최선이란 것이다. 역사는 항상 기록자의 주관이 개입되어 문제가 된다.
기록자는 당대의 사관이고 권력(?)이기에 역사의 기록은 언제나 비판의 대상이다.우리역사속에서 호평과 비평을 함께 받는 사람중에 첫번째 인물이 김옥규이다. 김옥균은 혁명가와 혁명을 빙자한 정치모리배라는 극단적인 평가를 바든 비운의 인물이다.
김옥균은 안동김문의 적자로 호의호식하면서도 안주하지 않고 당시대의 부조리를 극복하고 나라를 부국강병시키기 위해서는 극단적 조치가 필요함을 믿고 일단의 동지들을 모아 갑신정변(1884)을 일으키고 실패를 한후 일본으로 망명을 한다. 김옥균은 타고난 학문에 못지않게 바둑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김옥균은 이 바둑을 정변의 구실로 삼아 포도청이나 한성부 기찰(정보)망을 속이는 재치를 보이기도 한다. 김옥균이 지은 갑신일록(甲申日錄)은 다음 두개의 기록을 남긴다.
-1884년 11월 7일. 조선 고수 두명을 데리고 공사관(일본)에 갔다. 관원 우치가키(內恒)가 바둑을 잘 두어 조선인과 일본인의 바둑을 다투게 한다는 구실이 적당했다.
김옥균은 정변을 도모하며 일본의 지원을 적극 모색하며 일본 영사관을 무상출입한 듯하다. 주변의 눈을 피하기에 바둑이 그만이라는 육성인 것이다. 김옥균은 며칠 후에 다시 한번 바둑을 기록한다.
- 1884년 11월 10일. 어제 있었던 바둑모임(圍碁宴)의 답례로 신축한 나의 집으로 다케조에(일본공사), 시마무라(서기관), 고바야시 영사 등을 초대했다. 우리 쪽에서 서광범, 박재형, 윤치호가 함께 했고 홍영식이 늦게왔다. 시마무라와 옆방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옥균은 뛰어난 문장만큼이나 바둑에도 재능이 있었다. 그의 기력(碁力)은 '본인방수영'과 두었던 6점국(局) 기보가 전한다. 도무지 본인방수영이 판을 짜지 못한다. 훗날 본인방수영은 김옥균의 기력이 자신과 두점 치수였다 토로 한 바 있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일본으로 망명을 한 김옥균은 그곳에서도 동지들과 '두산만' 계열의 우익들과 접촉을 하면서 재기를 노리자 일본 정부는 그를 '오가사와라'로 연금을 시킨다(1886.6월). 오가사와라는 일본 본토에서 천키로나 떨어진 절해고도로 오늘날도 주 3회 왕복하는 배편으로 25시간이나 걸리는 곳이다. 당시 민가 수백호에 인구 수천명의 미개한 섬이었다.
김옥균은 이 절해고도에 고립 되어 고독한 27개월의 징역 아닌 징역살이를 하게 된다. 이런 섬의 분위기속에서 조선의 망명객이 대우(?)를 받을 턱이 없다. 이 당시 고독한 김옥균의 마음이 담긴 시 한편이 유길준의 글속에 전한다.
| | '병아리 십여마리를 얻어 길렀더니(養得鷄雛十許頭)/틈만 나면 서로가 다투는구나(時來挑鬪沒因由)/몇번인가 홰를 치다가 멈춰서서(數回還停立)/서로가 바라보다 문득 그치더라(脈脈相看便罷休).'
◀ 김옥균, 오가사와라 시.
| 병아리 십여마리를 얻어다 길렀다고 한다. 그처럼 김옥균의 섬 생활은 곤궁했다. 딱히 누가 지원을 했던것도 아니다. 김옥균은 이 섬에서 장장 27개월을 버텨야 했다. 김옥균은 한문서당과 바둑교실을 생각 했다. 아무것도 없는 섬에 문화적 소통거리가 있을 턱이 없었다. 섬에는 그저 깨복동이 아이들이 천자문 한줄도 모르면서 뛰어 노는 것이 전부였다. 이곳에서 김옥균은 아이들을 모아 한자와 더불어 바둑을 가르쳤다.
김옥균은 동경에 오가사와라까지 호송을 책임졌던 순경에게서 선물받은 바둑판과 알이 한조 있었다. 이 바둑 기물이 김옥균의 곤궁한 섬 생활의 활력과 도움이 된 것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에 대한 존경이 섬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생긴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 때 본인방수영이 오가사와라를 방문한다. 본인방수영은 3개월을 섬에 머물며 김옥균과 천판의 바둑을 둔다. 본인방에게 바둑이 재미있을 턱이 없다. 그저 협객 기질을 타고난 본인방수영의 김옥균 사랑이 느껴질뿐이다.
| | 본인방수영이 섬을 떠나던 날 김옥균은 작은 배를 타고 그가 타고 떠나는 큰 배를 몇 시간이나 쫓아 가며 손을 흔들었다고 한다.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이다. 김옥균은 이 섬에 작은 집을 짓고 살았다. 아이들은 이 집에 십수명이 모여 바둑을 배우고 공부를 했다.
김옥균이 오가사와라에서 바둑을 가르쳤다는 증언한 사람은 평생을 김옥균 연구에 바친 금병동(琴秉洞 80)이다. 김옥균에게 바둑을 배워 훗날 오가사와라의 고수로 행세한 사람이 몇 있다고 한다. 지금도 오가사와라 섬에는 김옥균이 아이들을 모아 한자와 바둑을 가르친 집터가 남아 있다고 한다.
| 풍운아 김옥균. 그가 역사에 남기고간 것들은 참으로 여러가지다. 오늘날 전국에 산재한 바둑교실을 김옥균이 본다면 과연 어떤 말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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