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3월에 열렸던 World Baseball Classic은 수많은 화제를 뿌리면서 야구의 즐거움을 보여주었던 대회다. 평소에 메이저리그 야구 중계를 즐겨 보던 필자는 박찬호, 김병현, 서재응 선수의 출전 소식을 듣고 가슴이 뛰었다.
대한민국은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일본을 3 대 2로 누르고 조 1위로 본선 8강에 올랐다. 야구의 종주국을 자처하던 미국은 우승을 위해 자존심을 버리면서까지 쿠바와 다른 조 편성을 했다. 대한민국은 멕시코에게 2 대 1로 이기더니 미국을 7 대 3의 큰 차이로 꺾고 일본에게 다시 2 대 1로 승리를 거머쥠으로써 지역 예선을 포함해 6연승의 신화를 이룩하고 준결승에 진출했다.
선수들은 야구 변방 국가인 한국이 일본을 재차 제압한 것에 고무됐다. 특히 서재응 선수는 벅차 오르는 가슴을 누르지 못하고 마운드에 태극기를 꽂는 세레머니를 펼치며 극적인 상황을 연출했다.
뉴욕 메츠에서 활약하다 당시 LA 다저스로 둥지를 옮긴지 얼마 안된 서재응 선수는 강속구 위주 보다는 다양한 볼 배합과 느린 공으로써 타자의 타이밍을 뺏는 지능적인 투수다.
오늘 소개할 타이젬 9단은 ‘번개소문’이다. 고구려 때 당나라의 침입을 막아냈던 연개소문 장군을 떠오르게 하는 그는 2003년 5월부터 지금까지 4년 10개월 동안 무려 7166전 3908승 3213패 45무를 기록했다. 이것은 타이젬의 터줏대감인 joonki의 10129전에 버금가는 판수다.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바둑을 배우고 싶어 서울의 어느 바둑 모임에 주말마다 출근하다시피 나갔던 나는 그 곳에서 많은 고수를 만났다. 그 가운데 마른 체격에 눈빛이 날카로운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번개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하수의 이상한 행마를 자상하게 지적해 주곤 했던 그와 술자리를 함께 했다. “어떻게 해서 그 힘들다는 관문을 뚫으셨나요?”라고 묻자 “오청원 전집을 열한차례 보는 도중에야 비로소 꿈을 이루었지.” 그는 힘들었던 바둑 공부 과정을 회상하며 긴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번개소문은 수도권의 모 바둑도장에 나가면서 후학들을 지도한다고 한다. 보통 바둑을 가르치는 것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일이 끝나면 녹초가 돼 바둑 이외의 다른 여가를 즐기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하지만 번개소문은 틈나는 대로 타이젬에 접속해 주로 새벽녘까지 기도 연구에 여념이 없다. 그러다 보면 8단에 내려갔다 오는 일이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귀양살이를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노력 덕택에 번개소문은 몇 년 전에 세계 바둑대회 본선에 진출해 후배 기사들에게 땀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다. 번개소문은 20초 보다는 30초 초읽기를 할 때 더 안정적인 모습을 보인다. 다시 말해서 그는 joonki나 코브라더스처럼 초읽기에 강하지 못하다. 또한 야맛있다와 GoldHammer처럼 펀치가 센 것도 아니다. 게다가 4k_grubby만큼 수싸움의 귀재도 아니고 멋있는걸처럼 발빠른 행마도 없으며 sxkr처럼 중앙 행마의 묘기를 보여주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그가 강한 부문은 무엇일까? 번개소문은 기아 타이거즈로 유니폼을 바꿔 입은 서재응 투수처럼 느릿느릿한 행마를 구사하다가 상대가 예측하지 못한 곳에서 갑자기 치고 나와 반전을 도모하는 날카로움이 있으며 급박한 전투 위주의 흐름보다는 잔잔한 파도처럼 부드럽고 유연하게 움직인다.
그는 종종 많이 유리한 바둑에서 기세를 중시하고 물러서지 않다가 역전을 허용해 그의 팬들을 안타깝게 한다. 어떤 때는 시간 패도 곧잘 해 큰 액수를 건 회원들의 투덜거림이 메아리쳐 오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너무 나무라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는 언제나 최고의 기보를 남기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또한 그의 바둑은 끝내기에서 가끔 묘수가 등장해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청량감을 더해준다. 번개소문은 강한 체력과 불굴의 정신력이 장점인데 작은 차이의 대국에서 역전 반집승이 자주 나오는 것은 이러한 점을 반영한다고 하겠다.
다음은 중국의 Realizell과의 대국이다.
| | | 백1로 우상귀 흑에게 다가섰을 때 흑2로 씌어왔다. 백3으로 달리고 흑4로 붙였을때 백5가 이 상황에서 적절한 변신이었다. 상변 백 석점이 미생이긴 하지만 우상귀에서 크게 살아 백도 둘만 한것 같다. |  | | | | | | 우변 전투가 마무리되고 백9로 상변에 붙여 새로운 전투가 발발했다. 흑16의 이단젖힘은 백의 자충을 노린 좋은 감각이다. 재차 흑22로 이단 젖혀 왔을때 백25는 26 자리에 참았으면 무난했다. 흑도 좌변을 백에게 내주면 너무 크므로 반발했다. 흑 38까지 제법 크게 집모양을 갖췄다. |  | | | | | 좌변 전투가 끝나고 백이 선수를 잡아 중앙 흑세력을 지울때 흑4로 젖힌 것이 백의 약점을 파고든 맥이었다. 만약 백5로 막으면 흑14까지 수가 나버린다. |  | | | | | 백1부터 7까지 선수로 중앙 흑세력을 지운 곳도 크지만 아무래도 상변의 젖힘이 커 흑이 앞선 것 같다. 우하귀 백9의 침입에 흑도 최강으로 맞서는 듯 했지만 서로 타협했다. 상변을 넘겨준 대신에 백35로 따냈다. 이후의 끝내기가 어렵다. |  | | | | | 백1로 젖혔을때 흑2의 붙임이 날카로웠다. 만약 흑 한점을 잡으면 백이 크게 당한다. |  | | | | | 백1이 멋진 맥점이다. 흑2는 어쩔수 없다. 백3으로 한집 내면서 흑이 좌하변을 돌파하면 백도 자체에서 살아 백1의 끝내기가 크다. 따라서 실전은 필연이라 할 수 있다. 끝내기 도중 서로간에 밀고 당긴 끝에 마지막 반패를 백이 이겨 반집을 남겼다. 백의 끈질긴 생명력이 돋보인 한판으로 번개소문의 기풍을 잘 보여준 한판이 아닐까 싶다. |  | | | | | 얼마 전 바둑 뉴스를 보니 그가 국내 기전의 본선에 올라갔다. 오랜만의 본선 진출인 만큼 자신의 느린 공으로 삼진을 3~4개 정도 잡고 환한 웃음짓는 것을 꼭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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