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바둑계는 기권문제로 뒤숭숭했다. 8일 한국바둑리그에서 윤준상이 박영훈에게 기권한데 이어 14일에는 한국물가정보배에서 이세돌이 홍성지에게 또 기권했다. 한국바둑리그는 그나마 단체전이어서 파행은 면했지만 물가정보배는 아예 결방이 되어 많은 바둑팬들은 원성의 목소리가 드높다.
이세돌이 불참한 물가정보배는 A~D조 각조 4명 중 2명이 최종결선에 진출하여 8강 토너먼트로 우승자를 가리는 방식이다. 이세돌은 이미 조훈현을 꺾고 1승을 거뒀기 때문에 비록 한 판을 기권해도, 남은 강지성과의 대국을 이기면 2승1패로 결선행이 확정되는 상황이다. 또 혹시 3자가 2승1패로 동률이 된다고 해도 상위 랭커에게 우선권이 돌아가기 때문에 랭킹1위 이세돌은 여유가 있다.
기권이란 한 대국자가 예정된 대국시간에 맞추지 못해 대국을 포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바둑으로 밥을 먹는 프로에게는 엄연한 자기 출혈이며, 거꾸로 기권승을 거둔 프로는 ‘신경 안 쓰고’ 1승을 챙기니 한없는 기쁨일 것이다.
과거에도 기권은 자주 있어 왔다. 여타 다른 일거리에 의해서 부득이 빠질 수도 있고, 개인적인 상황이 도저히 바둑을 두지 못할 경우는 본의 아니게 기권을 한 사례들이 자주 있다.
이세돌의 경우도 애초에 변경이나 연기의 사유는 안 된다. 따라서 중국리그와 국내기전의 일정이 겹치자 국내 출전을 포기한 것이다. 자기가 모든 피해를 감수하고 진다고 하는 데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보여 진다.
그러나 자신만 감수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도 적지 않은 피해를 끼쳤다는 점에서 약간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기권선언이 너무 늦어 생방송으로 중계하려던 계획이 무산되어 스폰서나 팬에게 피해를 입힌 것이다.
중국리그와 국내기전이 부딪히면 기권? 한국기원은 중국리그 관련해 새로운 대책을 세우고 있다고 한다. 이번에 기권을 한 기사들은 공히 중국리그에 진출한 기사라는 공통점이 있다. 중국리그는 한국에서 인정하는 국제대회는 물론 아니다. 지극히 중국사정에 따라 움직이는 중국의 기전이다.
중국리그는 유명 기사들이 중국의 각 팀과의 계약에 의해서 1년에 몇 판씩 두기로 한 일종의 용병계약이다. 중국리그는 팀에 소속되어 있고 계약도 되어 있으니 빠지는 것이 불가능하고 물가정보배, 또는 한국리그는 기사 개인자격으로 참가한 것이니 혹시 기권한다고 해도 자신만 손해 보면 된다는 시각에서 나온 것이다.
요지는 프로기사들이 비록 중국리그지만 여느 세계대회 못지않게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중국리그를 택한 것은 덩치가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세돌이 한판을 두는데 1000만 원 가량이고 승리수당 출전수당 등도 있다. 1년 동안 힘들어서 우승 준우승해야 1000만원을 손에 쥘 수 있는 국내기전보다는 일단 메리트가 크다.
가치가 명백하게 차이 나는 대국이 겹쳤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무조건 애국심만 강조해서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아예 이 참에 눈치 보지 말고 기전을 골라서 참가해야 한다는 팬들의 ‘열린 시각’도 눈에 띈다.
 ▲ 2005년에도 중국리그에 참가한 이세돌. 꾸이저우커수팅팀 소속이었던 이세돌과 상하이팀 창하오가 대국을 하고 있다. | 중국리그 선택의 이유 이세돌도 나름의 고충은 있다. 작년 이맘때의 스케줄을 한번 보자. 작년 5월12일 그는 중국 상하이에서 중국리그를 치렀다. 대국이 끝나고 다시 인천으로 날아가 그날 저녁에 한국바둑리그에 참가한 적이 있다.
또 5월19일 꾸이저우팀의 주장으로 참가해 대국을 치렀다. 새벽 5시에 인천공항에서 2시간 정도 비행기를 타고 베이징에 도착해서 또 다시 3시간 정도 비행기를 타고 꾸이양에 도착했다.
20일 아침 6시에 꾸이양에서 베이징으로 출발했다. 11시에 베이징에 도착한 다음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21일은 이세돌이 국내에서 또 대회를 참가하고 23일 또 베이징에 와서 24일 꾸이저우팀의 시합에 참가해야 했다.
이처럼 이세돌은 대국욕심에 자기 스케줄이 빡빡함을 알고도 스스로 택한 길이기도 했다. 그는 중국에서 ‘슈퍼맨’이라는 별명이 하나 더 생겼었다.
이세돌은 평소에도 중국리그에 가서 젊은 선수들과 겨루는 것이 흥미롭다고 했다. 그들과 겨루면 새로운 포석이라든지 여러 가지 신기술을 많이 배울 수도 있다. 힘은 들어도 중국리그에는 꼭 참가할 것이라며, 대국료 때문은 아님을 밝힌 적이 있다.
이세돌의 기권 일지 다만, 이세돌로서는 기권의 사례가 자주 있어왔다는 점은 새겨볼 일이다. 2003년. 3단 시절 패왕전에서 이세돌은 아무런 연락 없이 대국장에 나타나지 않음에 따라 박영훈의 기권승으로 처리된 적이 있다.
2003년 5월 왕위전에서 안조영에게 기권패을 당했다. CSK배 바둑아시아대항전 한국대표로 일본을 다녀온 이후 몸살이 난 이유였다. 2003년 4월 마스터즈 예선1회전에서도 김강근에게 기권패했다.
2002년 10월 한국바둑리그의 전신인 KAT시스템배 한국바둑최강전 8강전에서 전남과 강원의 4장전에서 이세돌은 건강상의 이유로 기권했다. KAT시스템배는 개인전이 아니라 지역 대표로 구성된 단체전이며 이세돌의 기권이 전남의 탈락으로 직결됐다는 점에서 상당한 물의를 빚었다. 타이젬 선정 2002년 바둑계 ‘5대 화제’에 선정되기도.
공인이므로 신중해야 한다 일류들의 바둑은 바둑이벤트이다. 한판의 바둑을 두는 데는 보이지 않게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을 배려하는 맘이 필요하다. 물론 ‘오죽했으면 기권하겠냐?’의 논리도 일면 이해되는 바 있지만, 일류기사가 기권하게 되었을 적에 문제가 생길 부분을 조금만 수읽기를 해본다면 이해당사자가 충분히 사전 차단이 가능할 터.
과거의 형태는 개인적인 약속이 잡혀있으면 늘 상 대국자의 합의에 의해 연기가 되곤 했다. 그저 예선시합이거나 또 팬에게는 거의 노출되지 않는 선이었다. 그러나 이번은 바둑TV에서 생중계를 진행되던 기전이었고 그가 등장하길 학수고대하는 시청자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또한 이세돌은 ‘수습책’에 있어서도 형인 이상훈의 입을 통한다는 점도 불만이다. 전화 한번이면 가능할 것을 ‘괴로운 일’에는 형에게 대변인 역할을 맡기고 한발 물러나다보니 말을 옮기는 과정에서 오해도 생기는 법이다. 따라서 당당하게 자신이 나서서 해명을 하는 자세도 일인자다운 아름다운 모습일 것이다.
생방송 사고에 대한 대비책 시급 중국리그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얻는 이득이 실로 막강하다. 상금이나 대국료도 물론이지만 요즘 뜨는 중국선수와의 트레이닝이 중국리그 참가자로서는 크나큰 영광이다. 따라서 한 쪽을 포기해야 한다면 국내기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니, 앞으로도 이 문제는 자주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명문화된 규정이 필요할 것이다. 골프처럼 1년간의 대회 배분이 잘 되어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따로 따로 자국의 리그를 진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권은 자주 등장할 수도 있다. 만약 중국리그와 한국리그가 겹치게 된다면? 대책 마련에 부산을 떨어야 하는 이유이다.
기권이 정말 문제라면 기권을 할 수 없도록 제도적 정비를 서두르면 될 것이다. 이번 기권파동은 기권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기권의 과정이 문제였다고 보여 진다. 이에 관한 팬의 한마디가 기억에 남는다. “팬이 선수를 존중해야 합니까, 선수가 팬들을 더 존중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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