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이십여 년 전 한 중학생이 수업이 끝나자마자 종종 걸음으로 들어간 곳이 있었다. 그는 동전을 교환한 후에 50원짜리를 기계에 넣고서 ‘태권도’라는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판이 진행 될수록 오락기 안에는 고단자가 등장하고 마침내 엄청나게 빠른 동작을 구사하는 명인과 수 없이 겨루었다.
시간은 화살처럼 지나가고 소년은 대학생이 됐다. 그는 서울 면목동의 한 고등학생 과외를 마친 후 근처에 사는 동아리 선배 J를 기다렸다. J는 근처의 오락실에 가자고 했다. 선배가 고른 종목은 ‘철권’이라는 격투 게임이었는데 180도 방향에 놓인 오락기에 상대방이 동전을 넣으면 각자의 인물을 정하고 입체적인 화면 속에서 실제 싸움을 보는 것처럼 화려한 동작이 펼쳐졌다.
총 8명의 등장인물 가운데 ‘폴 피닉스’는 조각 같은 얼굴과 균형 잡힌 신체조건을 갖춰 인기가 많은 캐릭터였다. J는 이 폴 피닉스로 많게는 20연승 이상을 해내는 경우가 많았다. 상대방을 KO로 눕힌 후에는 결정타를 날리며 승자의 위용을 과시하는 장면이 Replay로 다시 나오면서 Gamer에게 뿌듯함을 안겨 주었다.
오늘 소개할 타이젬 9단은 chaos(P)다. chaos는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천지창조 이전의 혼돈, 무질서, 그리스 신화의 카오스(혼돈의 신), 물리학의 카오스, 카타스트로피······.
카타스트로피란 그리스어 katastrophe에서 온 말로 사전적인 의미는 돌연히 나타나는 광범위한 큰 변동이다. 예를 들면 전쟁에 의한 재해 같은 것, 파국 또는 종말을 뜻한다. 카타스트로피 이론에서 쓰이는 카타스트로피는 작은 변화에 의한 급격한 상태의 전환을 뜻한다. 이것은 르네 톰이라는 프랑스의 수학자가 연구한 수학적 모델로 카타스트로피는 두가지 상태 즉, 안정과 불안정한 상태에서 급격한 변이를 의미한다.
세상에는 지진, 화산의 폭발, 눈사태, 곤충·식물의 이상발생, 전쟁발발, 주가의 폭등·폭락, 인간의 돌연사 등 갑작스러운 일이 많다. 이처럼 에너지가 고여서 폭발하는 사건들이 일어날 징조나 그 과정이 어떠한가를 연구해 그것을 미리 알아내는 것이 카타스트로피다.
한 판의 바둑을 두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변화를 겪는가? 패싸움으로 인해 흑 집이 백 집으로 바뀌고, 한 수 늦은 패를 이기기 위해 살아있는 대마를 버리는 상전벽해(桑田碧海)는 비일비재하다. 전쟁의 축소판이라는 반상에서 타이젬의 강9단들은 짧은 속기 대국에서도 많은 변화도를 그리지만 대부분은 쓰이지 못한 채 버려지기 일쑤다.
바둑판 안의 돌들은 어떻게 보면 무질서하게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질서 정연하게 놓여있다. 갑자기 이상(李箱)의 ‘거울’이란 시가 떠올라 적어 보았다.
거울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요.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요.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못하는구료마는 거울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져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께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또닮았소.
chaos(P)의 기풍은 접근전을 즐기는데 권투로 치면 인파이터다. 그는 초반부터 적극적으로 싸움을 걸고 잽을 주고 받으면서 끊임없이 결정타를 노린다. 이렇게 쌈꾼인 그의 바둑은 항상 변수로 가득 차 있지만 파괴력 하나는 일품으로 그가 대마를 잡는 장면을 보면 철권의 폴 피닉스가 생각난다.
전문기사 Y는 예전보다 chaos(P)의 시야가 넓어졌다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또한, 전문기사 M은 chaos(P)의 바둑은 초반보다는 중종반에 중점을 두는 편이라고 했다. chaos(P)의 절친한 친구 C는 그가 대기만성형이라면서 수읽기와 집중력이 향상됐다고 평가했다. 그의 또 다른 친구 H는 불리한 바둑에서 chaos(P)의 버티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라고 말하면서 진한 동료애를 과시했다.
다음은 중국의 hua와의 대국으로 chaos(P)의 백 차례다.
| | | 흑1은 예전에 제1회 진로배 세계바둑최강전에서 일본의 미야자와고로 九段이 유창혁 五段을 상대로 둔것(1992년 12월 10일)을 본 기억이 난다. 흑3은 또 무엇인가? 책에 나오지 않는 변칙적인 포석으로 하변에서 백4의 갈라침을 유도해 살려주고 세력을 쌓겠다는 의도다. 백도 14로 갈라치고 16이 좋은 수다. 단순히 두칸벌리면 귀를 일자로 굳히는 수가 제격이다. 우변의 백 한점을 버렸지만 선수를 잡아 우상귀에 걸쳐갔다. 역시 바둑은 기자쟁선! |  | | | | | | 흑1로 우상귀에 말뚝을 칠때 백2가 멋진 행마다. 단순하게 한칸 뛰면 왼쪽에서 들여다보는것이 아프다. 흑17은 기세다. 이후는 필연. 백22로 하나만 젖혀놓은것이 절묘한 꼭 배워둘만한 행마다. 이것을 교환하지 않고 그냥 24에 내려서면 흑22로 뻗는수가 힘차다. 실전의 백30때 나와서 끊는것은 단점 때문에 불가하다. 백22의 효과! 백44까지 상변에 큰 패가 났다. |  | | | | | 상변 패싸움이 발생하면서 팻감의 차이가 중요한 국면이다. 백28은 흑의 팻감을 없애는 수이고 백40으로 상변 백의 삼궁도를 메우면서 두집을 내고 사는것은 상변 오른쪽 백이 흑을 놓고 따야하므로 큰 손해다. 백40으로 좌변을 두자 흑도 다음수가 어렵다. 초속기 대국에서 대국자의 고통이란! 이런때 아마추어가 행복하다. |  | | | | | 흑1부터 계속 패의 연속이다. 이러한 바둑은 팻감을 잘 못 세거나 한 수만 잘 못 둬도 승패가 갈리고 만다. 흑27은 상변에서 패를 들어가고 싶지만 아쉽게도 흑이 우하귀를 연타하더라도 우하귀의 백은 그냥 죽지는 않고 패가 난다. 이것이 흑의 아픔이다. 백38까지 상변 패를 해소하는 동안에 흑은 중앙과 우변을 확정가로 만들고 있다. 이제는 좌상귀의 흑집이 얼마나 날 것인가가 중요하다. 갈 길은 아직 멀다! |  | | | | | 흑2로 들여다본것은 백이 꽉 이어주면 좋겠지만 백3으로 반발을 당해 좌변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 같다. 흑6은 10으로 철주를 내렸으면 그것으로 흑이 유리하지 않을까 싶다. 실전에서는 흑6을 두는 바람에 좌상귀에서 뒷맛이 생겨 중앙 흑세가 많이 깨졌다. 흑도 짧은 시간안에 정확한 수읽기를 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백도 바로 수를 내지 못하고 시간연장책을 써가면서 수를 냈다. 쌍방 어려운곳이었다. 백39까지 백의 승세다. |  | | | | | 전보에서 이미 바둑은 백의 우세다. 중앙에서 패가 났지만 백의 꽃놀이패로 국면은 큰 변화 없이 진행됐고 우변 백2에 이르러 흑이 돌을 거두었다. 이 바둑은 초반 흑이 변칙 포석을 들고 나오면서 쌍방 어려운 바둑이었는데 좌상귀에서 흑이 크게 지키는 바람에 수가 났고 승패는 그곳에서 결정났다. 상대방의 실수를 놓치지 않고 그 틈을 기민하게 찔러간 chaos(P)의 기민함이 돋보였다. |  | | | | | 얼마 전 국제 대회에서 대마 사활을 착각해 고개를 들지 못했던 그가 한층 성숙한 모습을 보이면서 다가오는 큰 대회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지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