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1.
‘데쓰노트’는 말 그대로 죽음의 노트다.
사람의 이름이나 사망시각, 사인 등을 적어 넣으면 그대로 실현되는 사신들의 명부인 것이다.
고스트 바둑왕을 그려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오바타 다케시의 만화 ‘데쓰노트’는 영화로도 제작되어 빅 히트를 날렸다. 데쓰노트에 등장하는 사신(死神)은 사람의 삶과 죽음을 결정한다.
타이젬 대국실에서 월간 랭킹 2위를 달리고 있는 사신(P)의 미니홈피 캐릭터가 바로 데쓰노트의 사신과 동일하다.
만화 캐릭터를 자신의 아이디로 차용한 걸로 미루어 젊고 푸른 세대라는 걸 짐작할 수 있지만 적어도 타이젬에서 그는 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9단이니 입신이요, 9단 중에서 누구와 겨뤄도 지고 싶은 생각이 없다 하니 그가 데쓰노트에 특정 상대를 기록하면 조만간에 보내버릴 수 있을 것 같은 믿음도 따른다.
사신이라는 아이디는 다소 어둡고 음습하지만 엄청난 자신감이 배인 이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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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2. 사신의 한가위 특집 빅 매치
오늘은 9월 14일, 추석이다.
사신은 정확히 12시에 타이젬 대국실로 들어와 추석특집 빅 이벤트를 연출했다.
상대는 ‘시끄러9단’. Goldhammer, 구렛나룻걸, 타이트, 준키, 야맛있다, 카카46, 절대지존 등의 강자들을 꺾은 적 있는 일류검객이다.
12시 첫 판은 55수만에 사신9단이 시간 승을 거두었다. 다시 리턴매치가 벌어진다.
어이없이 패배한 첫 판 때문에 벼르고 벼른 시끄러 9단이 불계승으로 복수를 하고 만다.
3판 2승 어때?
대국실을 가득 메운 유저들이 결승전을 종용한다. 두 기사 역시 두말없이 재 대국에 응한다.
치열한 공방 끝에 3번기 결승은 사신이 승리를 거둔다. 몹시 아쉬웠던지 시끄러 9단이 ‘한 판 더?’를 부른다.
사신9단, 기백 넘치게 콜을 받고 백을 잡는다. 유저들은 흥미진진한 강자들의 대국에 양쪽으로 갈려 베팅을 하고 열심히 응원을 한다. 사신9단 쪽에 90억, 시끄러9단 쪽에 70억의 티머니가 걸린다. 베팅 목록을 보니 눈에 반짝 띄는 아이디가 보인다.
한심한 9단과 절대지존 9단이 상당히 많은 금액을 시끄러 9단 쪽에 걸고 대국을 지켜보고 있었다.
타이젬 안에서 초일류로 통하는 그들이 사신의 반대쪽에 베팅을 했다는 것, 이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사신보다 시끄러9단이 더 세다고 판단하거나 아니면 사신이 패배하길 바라고 있는 것 아닐까? 사신9단의 전적을 유심히 보면 그 의문에 대한 힌트가 보인다.
추석 하루 전날인 9월 13일.
오후 1시에서 3시 사이에 사신9단과 절대지존9단의 혈전 3번 기가 벌어졌었다. 결과는 사신의 2:1 승리. 자존심 강한 절대지존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고 용납할 수 없는 결과였던 것이다.
최근에 절대지존9단과 사신9단은 타이젬에 동시입장했다 하면 망설임 없이 상대의 옷자락을 붙잡고 맞장을 뜨는 앙숙관계로 발전했다. 그 원인제공자가 바로 절대지존이었다고 사신은 투덜댄다.
9월 9일 새벽에 사신은 절대지존을 만나 1승을 거두었는데 그만 지존의 분노를 사 무려 네 판을 연속으로 난타 당했다고 밝혔다.
곧 죽어도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사신의 아이디에 프로기사라는 (P)자 인식표를 달고 있는 입장에서 연속 4패를 당한다는 건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칼을 갈고 데쓰노트에 절대지존9단의 아이디를 적은 다음 추석 이브 날 통쾌하게 복수를 하고 만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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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3. 사신을 만나다
추석을 앞두고 홍대 앞 카페에서 사신을 만났다.
유저수첩도 추석을 맞이해 독자들에게 뭔가 그럴듯한 특집기사를 선물하고 싶어서 섭외한 거였다. 만나자마자 그의 전적표를 보고 꼬치꼬치 따져물었다.
“절대지존한테 연속 4패를 당했더군요. 그러면 기분이 어때요?”
“잠이 안 오죠. 인터넷 바둑은 우리 같은 프로기사들에게 피로를 풀어주는 가벼운 게임인데 역 스트레스를 받아요. 오기도 생기구요.”
“공부도 되겠네요?”
“그럼요. 특히 중국기사들과 대국을 통해 최신 유행 포석과 감각을 습득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절대지존이 누구인지 아시나요?”
“대충 압니다.”
“본인보다 세지요?”
“랭킹이나 실력 모두 윗길이죠. 그러나 지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요즘은 젊은 기사들의 기량이 상향평준화되어서 그 누구를 만나도 승부는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사신9단의 화법은 아주 간단명료하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질문에 답한다.
그런 명료한 성격 때문에 최근 소소회 회장으로 추대된 것이리라.
“젊은 기사들의 리더로서 책임감이 크겠네요?”
“당연히 느껴야겠죠. 하지만 리더라는 표현은 거북하구요. 그냥 대학교 과대표처럼 심부름꾼으로 궂은일이나 도맡아 하려구요.” 돌아오는 대답이 겸손하다.
그는 올해 23살.
입단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엘지 배 4강까지 파죽지세로 올라 다크호스로 이름을 날렸던 주인공이다. 그때 8강에서 중국의 일인자 구리를 꺾었다. 그리고 매년 한국리그 시드 멤버로 참가해 세 번이나 우승을 한 행운아이기도 하다. 한국리그 우승 팀에게는 2억 5천만 원의 상금이 돌아간다. 그러니 우승 팀 멤버들 다섯 명에게는 각각 5천만 원이 분배된다.
신예기사들에게 한국리그 우승은 엄청난 행운이자 축복이 아닐 수 없는데 그 덕분에 사신9단은 4년 연속 억대의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고 한다. 스물 셋의 억대 연봉자라니 화사하지 않은가?
아무튼 사신9단, 괜찮은 청년이었다.
겸손하고 바둑에 대해 순수한 열정이 가득해보였다.
그런데도 타이젬 대국실에서는 사신으로서 카리스마를 뿌리고 다니니 그 선악의 양면성이 더 흥미롭게 다가왔다.
(추석 이브 날 절대지존과의 혈투 3번기에서 2:1 승리를 거둔 데는 필자의 역할이 상당히 컸다고 우겨본다. 그 전날 인터뷰하면서 절대지존9단한테 4연속 패배한 사실을 놓고 무진장 갈구면서 그의 자존심에 수많은 생채기를 재봉틀질해놓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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