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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사신기

19로의 風車 - 기왕사신기 완결편

2008 라이벌 열전! 기왕사신기

2009-01-02 오후 3:31:53 입력 / 2009-01-02 오후 6:04: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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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삼국의 고수들이 총출동해 파란만장한 승부의 드라마를 연출했으나 정상 8부 능선의 윤곽을 보면 4인의 강자가 포착되었으니 그들은 이창호, 이세돌, 구리, 창하오.

타이젬 간판 김종서 작가가 올 한해 바둑계 승부의 드라마를 황해대전(한·중 4인방의 시대), 유아독존(이세돌vs구리), 첩혈쌍웅(이창호vs이세돌), 와호장룡(이창호vs창하오), 19로의 風車 등 5개의 스토리로 나눠 화려한 필체로 구성됐다.

타이젬에서 준비한 강력한 연말·연시특집은 12월 29일 부터 1월 2일까지 차례로 연재된다.


* 춘추전국시대 - 절대제왕은 없다.

천하가 찢기며 사방에 크고 작은 영주들이 세력을 다툴 때 현자(賢者)들은 자신의 사상을 구현하기 위해 각국을 주유(周遊)하며 지혜를 가다듬었다. 그리하여 까마득한 기원전의 시대에 놀라운 지적(知的) 성취를 이루었으니 그들을 일컬어 제자백가(諸子百家)라 한다. 오늘의 바둑 천하를 조감하면서 문득 전국시대 제자백가들과 4강을 묶어보고 싶은 충동이 든다.

이창호는 묵가(墨家)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무자비하게 중원의 성들을 닥치는 대로 싹쓸이해버린 절대군주 이창호에게 평등과 검소를 주창한 묵자를 빗대는 게 이상할지 모르나 필자가 체감하는 인상은 그렇다. 겸손할뿐더러 모든 바둑 팬들에게 싫어하는 기색 없이 사인을 해주는 모습을 생각해보시라.

이세돌은 도가(道家) 쪽에 포함시키고 싶다. 인위적인 것을 거부하며 유가와 묵가의 장점, 법가의 합리성을 취해 간략하게 사물과 우주 섭리의 본질에 접근하는 스타일이다. 노자와 장자가 대표적 인물이다. 노장(老莊)은 다분히 정적이지만 직관을 존중한다. 쎈돌의 기풍에는 빠른 직관이 흐른다.

창하오는 유가(儒家)의 법통을 잇는 장손이다. 내면적으로 도덕을 중시하고 외면적으로는 예의를 갖춘다. 충성, 효도, 우애, 신의를 생명처럼 여긴다. 4화에 누누이 언급했던 것처럼 창하오의 인격은 전형적인 유가 형이다. 의젓하고 묵직하다. 이창호를 이 계보에 넣어도 무리가 없지만 이창호는 좀 더 유연하지 않은가? 뭔가 약간 느낌이 다르다.

구리의 이미지는 법가(法家) 계통이다. 혼란기에 강력한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 법가의 요체다. 진나라가 법가 한비자의 충고를 받아들여 천하를 통일했었다. 말 그대로 에누리 없는 법 집행으로 질서를 바로 잡는 것. 구리의 바둑에서는 엄정한 군기가 풍긴다.

(이 밖에도 음양가, 명가, 농가, 종횡가 등의 학파가 있었고 小說家 또한 제자백가에서 유래된 명칭인데 기왕 엊그제 살짝 거론한 타이젬의 영웅 joonki 9단은 소설가 쪽에 밀어본다. 두는 바둑마다 반전의 미학이 뭔지 보여주는 소설을 쓰곤 하니까.^^)


▲ 세계무대를 주름잡는 한중 4인방. (왼쪽부터 - 이창호, 이세돌, 구리, 창하오)

세계대회의 풍향계에 따라 4강을 선정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분석해보았지만 사실 바둑 천하는 춘추전국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4강의 성적이 비교적 두드러지나 세계 프로바둑이 전반적으로 상향평준화되어 그 누구를 만나도 방심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한때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던 이창호의 절대왕정 시대는 다시 구경하기 어려우리라고 전망한다.

제한시간이 줄어들고 대회는 늘어나니 한 사람이 모든 성(城)을 장악하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초인적인 무공을 지닌 영웅이라도 연간 100회가 넘는 전투에서 모조리 이길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필요한 것이 선택과 집중이다. 구리와 창하오는 차치하고 이창호와 이세돌이 2009년에 어떤 성을 노리고 군마와 창검을 정비하는지 주목하면 기축 년의 판도가 보일 것이다.

아울러 이 시리즈를 기왕사신기라 명명했지만 올해 연말에는 기왕팔신기도 좋고 기왕독재기도 좋으니 화끈한 전사를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4강 이외의 또 다른 영웅들이 등장해 혼돈의 시대로 몰아가도 좋고, 아예 한 사람이 파천황의 기세로 세계대회 트로피를 염주처럼 꿰버려도 좋다. 그 과정에 피비린내 나는 혈전이 전개된다면 바둑 팬들은 열광할 것이다. 바둑에서 전쟁은 본질이고 승리는 미덕이기 때문이다.

* 영웅만이 아니라 준걸도 있고 복병도 있다.

중국 네웨이핑 위기학교에서 바둑을 연구하는 리루이 2단 같은 신예는 언제든지 구리와 붙어도 자신 있다고 말한다. 구리의 기보를 거의 다 연구했는데 해 볼만 하다는 거였다. 리루이의 확신에 찬 표정을 보면 중국바둑의 잠재력이 팍팍 피부에 와 닿는다.

농심 배에서 4연승을 거두며 충격을 던진 퉈지아시라는 이름을 우리가 언제 들어본 적 있었던가? 퉈지아시처럼 언제든지 국제무대에서 난데없이 돌출해 한일 정상급 고수들과 맞장을 뜰 수 있는 일류들이 꽤 많다고 한다.


▲ 중국기원에 마련된 프로기사들의 숙소.

중국기원은 한국의 태능선수촌을 연상케 하듯 국가적 시스템으로 기사들을 관리하고 있다. 식당이나 숙소가 잘 갖춰져 있어 기사들은 마치 국가대표 선수들처럼 지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저변이 갈수록 확장될 수밖에 없다.

한국의 경우는 중국에 비해 여러 가지로 답답한 구석이 많다. 행정은 말할 것도 없고 굵직한 기전들이 하나둘 없어질 정도로 위기를 겪고 있지 않은가? 90년대 활발했던 젊은 기사들의 공동연구의 풍토도 약간 식은 기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젊은 프로기사들에게 전망을 타진하면 의외로 싱싱한 반응이 돌아온다.

“비슷하지 않겠어요? 5:5로 붙는 농심 배는 대표들의 컨디션에 따라 기복이 심하겠지만 10:10이나 20:20 아예 30:30으로 한중 전면전을 치른다 해도 질 것 같지는 않아요. 원생 시절 입단을 못해 퇴출 직전에 놓인 친구가 천신만고 끝에 초단 면장을 받았는데 곧바로 세계대회 결승까지 오르는 경우도 있거든요.”

신예기사라면 누구나 비장의 한칼을 품고 있다는 이야기다.

중국의 랭킹 1위 구리가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정도로 독하고 초반 중반 마무리까지 거의 흠이 없는 바둑을 둔다고 하지만 2008년 한중 천원전에서 원성진의 양 훅 펀치에 녹아났고, 삼성화재 배에서 진시영의 안다리에 걸려 로또 에피소드를 낳았으며 마인드스포츠대회 준결승에서는 스나이퍼 강동윤의 조준사격에 가슴을 움켜쥐지 않았던가?

강동윤, 목진석, 박영훈, 원성진, 박정상, 조한승, 최철한, 홍성지, 강유택, 한상훈, 윤준상, 김지석, 고근태...... 은하수처럼 무더기로 한반도 상공에 떠 있는 스타들. 그들에게도 언제든지 중원의 큼직한 성(城) 하나쯤 차지할 기회는 주어질 것이다.


▲ 한국기원.

한국기원은 2009년 1월 1일부터 기존의 랭킹시스템을 레이팅 제도로 수정 실시하기로 했다. 기존의 랭킹 제도는 바둑의 정확한 실력을 측정한다기보다 기전의 성적을 반영한 시스템이다. 여기에는 보너스 점수라는 변수가 작용한다. 전년도 대회 상위권자들에게 주어지는 시드가 진정한 랭킹을 가늠하는데 방해요인이 될 수도 있다.

상위권의 기사들이 8강, 4강, 준우승, 우승의 보너스 점수를 왕창 획득하기 때문에 랭킹 포인트가 절대적인 기력의 눈금으로 작용하기 어렵다.

반면 레이팅 제도는 복잡하지만 통계적으로 기력을 비교적 정확하게 잴 수 있다. 인터넷 바둑사이트의 제도와 흡사한데 강자와의 대국에서 승리하면 더 높은 포인트가 주어지는 형식이다. 랭킹은 순위를 매긴다는 뜻이고 레이팅은 점수를 매긴다는 개념이다. 기사순위에 좀 더 과학적인 방법을 적용하겠다는 한국기원의 선택은 바람직하다.

그렇지만 국가의 지원을 받고 강력하게 마인드스포츠 상징종목으로 부쩍 힘을 키우고 있는 중국바둑에 맞서기 위해서는 한국기원도 보다 유연하고 탄력적인 조직으로 변화해야 하리라. 미래의 영웅을 지속적으로 배출하기 위해서는 요람이 부드럽고 따뜻해야 가능하지 않겠는가?

* 올드 보이들도 보고 싶다.

바둑의 세계대전은 올해로 대략 20년 째 접어들었다. 1989년 한국이 초대 잉창치 배를 가져오며 본격적으로 바둑삼국시대를 열었다. 21세기가 열리면서 확실히 세대교체가 이뤄졌지만 20년 전 그때도 또 다른 바둑의 황금시대로 기억한다. 저마다 독특한 기풍을 지닌 일류들이 처음 한 자리에 모였을 때 바둑 팬들은 환호했다. PGA골프에 시니어 대회가 있듯이 이쯤해서 바둑계도 멋진 시니어 기전이 하나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신년 초의 꿈이니 아무렇게나 상상한다면 - 한국의 포항제철, 중국의 상해철강, 일본의 신일철 이렇게 세계 굴지의 제철회사들이 연합해서 ‘영원한 철기시대’란 컵을 만들면 어떨까? 쇳덩어리의 역사가 오래 됐지만 산업의 근본으로 영원히 제 구실을 할 거란 구호로 흘러간 스타들을 불러 모아 바둑 페스티발을 벌이는 거다.

조훈현, 네웨이핑, 고바야시, 조치훈, 마샤오춘, 다케미야, 류샤오광, 서봉수, 린하이펑, 오오다케, 왕리청...... 이런 면면에 우칭위안, 후지사와, 김인까지 가운데 모셔놓고 전야제를 열면 아름답지 않을까? 우승컵을 고철로 주어도 좋으니 바둑의 세계화에 청춘을 바친 이들에게 뿌듯한 자긍심도 안겨주고 팬들에게 기쁨을 주는 이벤트를 꿈꿔본다.


▲ 왼쪽부터 - 조훈현, 서봉수, 녜웨이핑, 마샤오춘, 조치훈, 린하이펑, 고바야시 고이치.

* 에필로그 - 훈훈한 미담 하나 추가

이창호가 농심 배에서 5연승의 드라마를 쓰며 한국의 우승에 기여했을 때 사실 컨디션이 최악이었다는 거 알만한 분들은 다 아시리라. 대국이 끝나면 깜빡 졸도를 할 정도였고 숙소로 돌아오면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쓰러졌다고 동생 이영호 씨가 전한다. 주위에서 대국을 포기하라고 권유했다니까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가의 명예가 걸린 단체전에서 이창호가 보여준 책임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래서 그 이듬해 농심 배에서 이창호는 4장으로 출전했다. 그런 부담감을 덜어주기 위해서 한국선수단이 오더를 안배한 것이다. 지난 연말 부산에서 농심 배 5연승을 거둔 강동윤의 인터뷰.

강동윤 : 이창호 사범님을 이젠 좀 쉬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이 한 마디에 후배의 존경심이 다 녹아있지 않은가? 올해 처음 농심 배에 출전한 이세돌도 이창호의 노고를 외면하지 않는다. 세계마인드스포츠 대회가 열렸을 때 중국, 일본은 최정예선수단을 출전시켰는데 한국은 당초 어정쩡한 입장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세계 챔프 이세돌이 상황을 지켜보더니 자진해서 마인드스포츠대회에 참가하겠다고 뜻을 밝혔다. 상금이 없는 대회지만 명예가 걸렸으니 좌시할 수 없다는 거였다. 그래서 이세돌은 단체전 멤버로 참가해 선수단의 사기를 높였다. 우리 대표기사들 정신무장이 잘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새해에도 그런 동료애, 애국심 두루 반죽해 심장 속에 간직하고 멋진 기보 켜켜이 쌓아주길 바란다.

- 황해대전(한·중 4인방의 시대)①
- 유아독존(이세돌vs구리)②
- 첩혈쌍웅(이창호vs이세돌)③
- 와호장룡(이창호vs창하오)④
- 19로의 風車⑤

TYGEM / 김종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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