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초에 세계바둑계의 4강 라이벌전을 유니크한 구성으로 조명한 특집 [기왕사신기]의 김종서 작가가 기축 년 설날을 맞아 다시 한 번 타이젬 회원들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다. 이번에는 [이붕전설]이다. 지난해에 억대바둑판 소송사건으로 새삼스럽게 바둑 팬들의 뇌리에 각인된 이름, 고(故) 김영성 한국기원 이사의 삶과 바둑 사랑에 관한 에피소드를 다룬 다큐멘터리다.
1월 24일부터 27일까지 설 연휴 동안 네 차례에 걸쳐 연재될 [이붕전설]을 통해 우리 바둑계를 뒤숭숭하게 흔들었던 바둑판 사건의 전모와 배경, 그리고 바둑계에 무한한 사랑을 바쳤으나 아스라이 기억의 저 편으로 사라질 뻔했던 고마운 은인(恩人)한 사람의 존재를 되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1월 24일 : 제1화 - 이붕 선생을 아십니까?
1월 25일 : 제2화 - 바둑애호가 김영성과 잉창치
1월 26일 : 제3화 - 바둑판이 말을 하다
1월 27일 : 제4화 - 仙과 俗의 경계에서
반야암 가는 길
바둑 팬들이라면 이붕이라는 호가 낯설지 않을 겁니다. 중국에 같은 이름의 총리가 있었지만 우리는 이붕 바둑대회를 통해 친근한 이름으로 기억합니다. 이붕은 한국기원 최장기 이사로 활동했던 부산의 기업가 김영성 님의 아호입니다.
붕(鵬)은 전설 속의 새를 뜻합니다. 연작(燕雀)이 어찌 대붕의 뜻을 알리요? 이런 말로 흔히 쓰는 단어지요. ‘붕’은 북쪽 바다에 사는 상상의 물고기 ‘곤’이 변해서 된 새라고 합니다. ‘곤’은 크기가 몇 천리나 되는데, 붕 또한 등의 길이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크다고 하지요.
한번에 9만 리를 날아오르는데 날개는 구름처럼 하늘을 뒤덮고 파도가 3천 리에 이를 정도로 큰 바람을 일으킵니다. 이 새는 살고 있는 북쪽 바다를 벗어나 끊임없이 남쪽 바다로 날아가려 합니다. 이는 세속의 삶(곤)에서 벗어나 영적인 깨달음을 얻은 상태(붕)로 거듭나서 하늘나라(남쪽 바다)로 가려고 하는 인간을 비유하여 나타내는 이야기입니다. 즉 붕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마음껏 누리는 위대한 존재를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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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알프스에 속하는 영취산은 통도사로 유명합니다. 한국 3대 사찰 중 하나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셔 불보사찰로 알려진 양산 통도사에는 13개의 암자가 영취산 자락 곳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붕 김영성 선생의 혼백이 그곳 반야암 앞산에 모셔져있다는 소식을 듣고 대한(大寒)날 산악인 곽수웅 씨와 함께 찾아갔습니다.
곽수웅 씨는 1977년 고상돈과 함께 에베레스트에 올랐던 원로산악인입니다. 그는 젊은 날 등반으로 관절을 혹사시킨 바람에 걸음걸이가 자유롭지 않은데도 반야암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앞산 오솔길을 셰르파처럼 안내했습니다. 앞산은 경사가 아주 심해서 구둣발로는 좀처럼 오르기 힘들었지요. 거듭 미끄러지고 우회하면서 등성이에 오르자 돌탑이 나타났습니다.
“형님, 수웅이가 왔습니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거구의 산악인이 돌탑에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리고 작은 배낭에서 소주를 꺼내더니 한 잔을 따라 돌탑에 뿌립니다.
“형님, 한 잔 드이소.”
그는 그렇게 돌탑과 대화를 한참 하고 나서 필자를 돌아봤습니다.
“이 돌탑 반경 40미터 안으로 형님의 유골을 뿌렸습니다. 아마 저 홍송(紅松)의 뿌리로 스며들었을끼라예. 나머지는 수습해서 돌탑 밑에 묻었으니 여기가 바로 묘소인기라요.”
급경사의 등성이에 세워진 돌탑은 이채로웠습니다. 큰 바윗돌을 어떻게 구해 저런 탑을 쌓았을까? 대답이 바로 날아왔습니다.
“부산의 산악인들이 뜻을 모아 쌓았지요. 우리들에게 이붕 형님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은인이자 동지였습니더.”
“아아, 바둑계만 후원한 게 아니었군요?”
“바둑계요? 그 쪽은 말만 들어서 내는 잘 모릅니더. 부산 산악인들에게 형님은 든든한 후원자였심더. 1970년대에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상상을 초월하는 거액을 후원해주셨지예. 우리들은 세계 명산을 등정하기 전에 염치불구하고 형님을 찾아가 애로를 호소했심더. 그라믄 두말 하지 않고 도와줍니다.”
곽수웅 씨는 한사코 이붕 김영성 선생을 산악인으로 부르고 싶어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붕 선생은 부산등산학교 초대 교장을 역임했고, 부산 알파인 클럽 멤버로 오랜 세월 활동했습니다. 생전에 산악박물관을 부산시청 부근에 세우는 게 꿈이었다고 합니다.
바둑 인들과 어울릴 땐 격조 있는 식당이나 술집에서 함께 했는지 몰라도 산악인들과는 고등어구이나 막회를 놓고 소주를 즐겼다고 합니다. 이붕 선생의 자취를 찾아가는 길에 산악인과 동행했기에 고인의 이런 일화부터 먼저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대붕이 항상 남쪽을 염원하듯 지금 이붕 선생의 혼백은 영취산 기슭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돌탑 앞에 서서 대붕의 전설을 곰곰이 되새겨봅니다. 선생은 지금 이 곳에서 속세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까요?
이붕 김영성 선생은 많은 이들에게 따뜻한 후원자로 기억됩니다. 바둑 인들과 산악인들 그리고 불교계에 성심을 다해 후원했습니다. 물론 그런 선을 쌓기 위해 먼저 기업가로서 힘을 비축했겠지요. 힘이 있어야 누군가를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에게 관대하고 자신에게 엄격했다
선생은 경남 마산의 진동면에서 태어나고 자라 마산상고에 진학했습니다. 한국전쟁 직후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상고에 들어갈 정도면 시골에서 상당히 우등생이었겠지요. 주산과 암산 실력이 뛰어나 전국대회에 입상했으며 졸업 후 한국은행에 입사해 근무하다가 퇴직하고 삼원섬유를 차립니다.
삼원섬유는 양모(Wool)를 수입해 가는 실, 극세사로 만드는 방적회사입니다.
70년대에 한국의 대표적인 산업분야였지요. 선생은 그렇게 부산의 기업가로 성공하면서 자선활동을 병행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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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한국기원 이사로 바둑계와 관계를 맺은 뒤 2004년 작고할 때까지 무려 30년 가까이 바둑계의 은인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조남철 국수 다음으로 2호 한국기원 이사이자 최장기 이사로 바둑계의 버팀목을 자처한 것이지요. 아울러 1988년 이붕 배 어린이 바둑대회를 개최해 2003년까지 이어오면서 많은 꿈나무들에게 성취동기를 안겨주었습니다. 목진석, 최철한, 김지석, 김만수, 권오민, 홍맑은샘, 등이 이붕 배를 차지한 주인공들이었습니다. 그리고 1993년부터는 부산, 베이징, 오사카, 타이페이 4도시 소년소녀 대항전을 만들어 2003년까지 주관했습니다.
한국기원 부산지회 본부장 직을 맡아 지방바둑과 어린이 바둑 활성화에 이붕 선생이 들인 공은 지대합니다. 그렇게 왕성하게 활동했던 이붕 선생은 2004년 7월 8일 지병으로 별세했습니다. 향년 65세. 결코 장수했다고는 볼 수 없는 삶입니다. 생전에 그토록 다양한 분야의 많은 지인들을 도우면서도 정작 자신의 안녕은 돌아보지 못했음이 고스란히 드러남을 확인하게 됩니다.
부산을 방문한 프로기사들에게는 융숭한 대접을 하면서도 귀가할 땐 반드시 전철이나 대중교통을 이용했다는 일화를 부산 바둑 인들은 입을 모아 들려줍니다. 바둑행사와 관련된 만찬은 부산에서 최고급 호텔이나 식당을 예약하면서도 당신은 항상 소주와 생맥주로 목을 축였다고 합니다. 감색 양복 한 벌로 십여 년을 버틴 단벌신사가 에베레스트 원정대에게 선뜻 거금을 후원하는 장면을 연상해보시기 바랍니다.
타인에게는 한없이 관대하면서도 자신에게는 엄격했던 이붕 선생. 한국기원은 2004년 한국바둑대상 시상식에서 이붕 김영성 이사에게 평생공로상을 수여했습니다. 참석했던 모든 이들을 숙연하게 했던 시상이었지요. 그 순간은 최우수기사부문 시상보다 빛나는 이벤트였을 겁니다. 아마도 그때가 이붕 선생의 이름을 모든 바둑 인들이 다시 한 번 불러보는 마지막 자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고마운 은인이지만 세월의 침식작용에 의해 서서히 잊혀져 갈 이름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선생의 이름이 바둑계에 되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과히 반가운 소식은 아니었지요. 억대바둑판 송사를 통해 알려졌으니까요. 송사의 관련자들은 물론 프로기사들과 바둑 팬들 모두 설레설레 고개를 젓는 뼈가 시린 사건이었습니다.
1심과 2심을 통해 법원이 내린 판결은 여러분도 이미 아실 겁니다. 지금 피고 측에서 대법원에 다시 상고한 상태입니다. 인정과 상식으로 해결되었으면 더 없이 좋았을 일이 폭주기관차처럼 정면으로만 돌진해 마침내 법의 잣대로 매듭을 지어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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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과연 법이 진실을 밝혀줄 수 있을까요? 누군가 억울한 입장인데 법이 그 아픔을 해소해줄 수 있을까요? 또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채기 나버린 당사자 및 관련된 증인들의 명예가 회복될까요?
이 사건 소식이 알려질 때마다 바둑 팬들은 진상을 명확하게 알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재판이 진행 중이므로 섵불리 언급해서는 안 된다는 우려가 선행해 바둑저널리스트들은 극도로 말을 아꼈습니다. 한국기원도 같은 입장이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최종 3심의 판결문이 떨어지면 모든 문제가 깔끔하게 정리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다는 게 필자의 견해입니다. 어떤 판결이 나더라도 송사로 전개된 이 사건에 승자는 없습니다. 원고와 피고는 물론이고 지켜보는 바둑 팬들조차도 환멸의 패배자로 씁쓸한 입맛을 다시지 않을까요?
바둑판의 행방이 어떻고 가치가 어떻고 하는 문제들은 사실 호사가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소문에 불과합니다. 들여다볼수록 두통이 가중되는 소유권 쟁탈전을 떠나 이 사건은 우리에게 이붕 김영성 선생의 존재를 반추하게 하는 계기로 작용한다고 봅니다.
기축 년 설날을 맞아 이붕 선생 스토리를 들려드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붕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억대바둑판 분쟁을 넘어서 아름다운 바둑 사랑의 훈기를 느끼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