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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雜學

바둑과 군대 이야기

ㅋㅋ

2009-04-01 오후 4:51:05 입력 / 2009-06-13 오후 6:39:54 수정

바둑과 군대이야기
40대 이상의 남자들이라면 대부분 바둑을 안다. 바둑을 둘 줄도 안다. 다만 바둑을 둔다고 말하기가 뭣할 뿐이라서 그렇지 대략 10급은 될 것이다. 한 번도 책을 본 적도 없고 고수의 강의를 들어본 기억도 없지만, 어깨너머로 배운 실력이 그 정도는 된다.

그 ‘어깨너머’의 대부분은 군대에서 배운 ‘꼰바둑’이라는 것이다. ‘꼰바둑’은 모양은 아예 없고 다만 생명력만 있을 뿐이다. 삶과 죽음도 모르고 살아있으되 고참이 죽었다고 우기면 죽는 것이고 죽어있어도 살아있다고 하면 산 것이다. 생명력에 있어서 시공을 초월한다. 어쨌든 한국바둑의 젖줄은 군대바둑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군에 관한 여러 가지 잡설을 모아본다.


▲ 전두환 前 대통령과 바둑을 두고 있는 조훈현 9단.

병법과 바둑은 일맥상통
아무래도 땅따먹기인 바둑이 전투에 임해서 적을 제압하는 것이 최우선명제인 군에서 즐겨했다. 반면운영에 있어서 바둑은 병법적인 면이 있어 바둑과 상통하는 면이 제법 있었을 것이다.

전두환 노태우 등 군 출신 대통령들이 바둑을 즐겨했고, 역시 군 출신인 김종필 전 총리도 바둑광이라는 얘기는 어쩌면 군과 바둑의 상관관계를 말해주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전전대통령은 4급 정도이며 노전대통령은 6급 정도 되며 김전총리는 3급 정도의 기량이라고 한다.

그중 전두환 전 대통령은 케이스롤 소개한다. 10년전 쯤 전 전대통령은 조훈현 9단에게 한 수를 배운 적이 있다. 얼마를 깔았느냐? 9점을 접히고 두었다. “9점은 좀 심하고 7점 정도면 딱 어울리겠다.”는 국후 조훈현의 평이었으니, 4급은 되지 않을까 싶다.

전두환 대통령은 젊은 시절 같은 장교인 중대장에게서 바둑을 배웠다고 한다. 그러다 줄곧 바둑을 잊고 살다가 청와대에 들어와서 약 10개월 동안 정수현 9단으로부터 일요일에 개인지도도 받았다고 한다. 재임시절 프로에게 개인지도를 받은 최초의 대통령인 셈.

조치훈이 은관문화훈장을 받은 것도 전 전대통령시절이었고, KBS바둑축제를 만들어 준 것도 전 전대통령의 바둑에 대한 호감 탓이었다.

이창호를 군에 보내면 바둑계는 문 닫아야 할 것
우리나라에서 병역 특혜를 최초로 받은 사람은 1996년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한 이창호였다. 10년 뒤 같이 혜택을 받은 최철한 박영훈의 경우도 근무 장소가 한국기원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면제나 다름없다. 이창호가 입대하게 되면 바둑계의 질서가 송두리째 무너진다는 위기감에서 출발했다.

당시만 해도 우리 바둑계는 도전기가 주류였는데, 평균 한 해에 10개의 타이틀을 허리춤에 찬 이창호가 만약 입대한다면 모든 기전이 올스톱되는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한 달에 3차례 이상 도전시합이 있을 것인데(당시만 해도 5번기가 주류였고 7번기도 있었다.) 그때마다 부대와 사회를 들락날락하다가는 바로 직업군인처럼 되어버리는 것.

또 당시 세계기전의 홍수 속에 ‘국위선양’이라는 대의명분에 발맞춰 이창호를 군에 보내서 애국하느니 차라리 국제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이 훨씬 애국하는 길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바둑계는 국방부 정계 관계 등 요로를 통해 ‘이창호군에 안보내기 프로젝트’를 가동하였던 것이다.


▲ 군 복무시절의 조훈현 9단. 윗줄 왼쪽에서 두 번째.

지면 포복으로 내무반에 들어와라!
군대하면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단연코 조훈현이다. 일본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던 조훈현은 1972년 병역 복무를 위해 한국으로 귀국했다. 조훈현은 일본을 주름잡고 싶은 욕망이 들끓었으나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의무 때문에 귀국한 것이다.

10살 때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일본기원 5단 때 귀국한 그는 “당시 나와 비슷한 처지였던 조치훈 9단은 명인타이틀을 획득하면서 병역혜택을 받았고 그것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많은 부러움을 느꼈다.”고 말한 바 있다.

일본기사들이 젊은 시절 군 문제를 고민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찌그러져 갔을까? 젊은 시절 군복무란 기사생활의 결정적인 사유는 아닐 수 있다. 어쩌면 조훈현의 9년만의 귀국으로 인해 한국바둑은 세계 속에 우뚝 설 수 있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부대 대대장은 조훈현의 복무 중 시합은 허용하기로 하였지만 한 가지 단서를 붙였다. “이기고 오면 걸어 들어오고 지면 부대 정문에서부터 연병장을 거쳐 포복으로 들어와라!”는 것.

당시만 해도 ‘조․서 시대’의 서막이었던 까닭에 분명 조훈현이 패한 적도 있을 것임에, 실제로 포복으로 내무반으로 들어간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한 정신력을 강조한 덕일까, 조훈현은 74년 공군복무 중 최고위를 획득하며 타이틀 획득에 시동을 걸게 된다.

진짜 정창현이면 시험기를 거쳐라!
호방한 성격, 시니컬한 화법의 정창현 3단(당시)이 있었다. ‘꾀중이’ 김희중 9단과 함께 ‘기왕전의 사나이’로 불리며 원조 ‘기사실 룸팬’이었던 그는 1974년 제1기 기왕전을 따내며 타이틀 홀더의 반열에 올랐던 사람.

정창현이 훈련을 마치고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자대배치를 받으려고 할 때였다. 보충대에서 “잠꼬대 잘하는 것이라도 좋다. 특기가 있으면 손을 들라.”고 말했다. 그러자 자기 생각으로는 군대에서 필요한 특기가 없을 것 같아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때 그 옆을 지나가던 선임병이 “멀대 같이 키만 큰 놈이 특기가 그렇게 없어?”하면서 툭 치는 것이 아닌가. 화들짝 놀라서 엉겁결에 그는 손을 들었다.

“바둑? 오호! 좋은 특기를 가졌구나. 이름이 뭐냐?”
“정창현입니다!”
“정창현? 바둑취미가 아니랄까봐 이름도 정창현이야? 하하하"

당시만 해도 정창현은 바둑계에서는 이름을 익히 아는 사람이 있었고 그 선임병은 정창현이란 이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진짜 정창현을 동명이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래? 그럼 나와 한판 둬 보자.”

물론 당시 내무반에 모인 고수라는 고수는 전부 다 대령해봤지만 전부 만방으로 보내주었다. 수십 판의 바둑을 둔 후에야 ‘시험기’를 마칠 수 있었다. 그날 이후 정창현이 바둑을 좋아했던 부대장에게 ‘상납’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바둑을 알아서 불행했던 기억
70~80년대 씨름판을 휘저었던 김성률 장사를 기억하는가. 바로 김성률의 형이 바로 지금은 작고한 김판율 2단이다. 동생은 피지컬 스포츠의 독보적인 고수가 되었고 형은 멘탈스포츠의 고수가 되었으니 바둑이 스포츠는 스포츠인가 보다.

이창호가 입단한 직후, 그와의 대국에서 손이 반상에 떨어질 듯하다 다시 이륙하는 등 신중치 못한 태도를 취하자, “고얀 놈! 빨리 내려놓지 못할까!”하고 큰 소리로 훈계를 내린 바 있었던 김판율.(이 부분에 대한 관한 에피소드는 이후에 다룬다.) 그는 고지식하고 숨김없이 표현하는 쪽이었다. 평생을 바둑만 사랑했던 사람이었으니 조금은 이해가 됨 직하다.

그에게는 그리 아름답지 못한 군대의 추억이 있었다. 70년대 군생활을 장군 밑에 가서 거의 개인 비서로서 바둑지도를 하게 되었다. 대대장도 아니고 장군이었으니 그의 바둑 선생이었던 김판율은 세상에 더 없이 행복했다. 한번은 장군이 “김일병! 군생활의 애로점은 없는가?”하고 물었다. 즉석 소원수리였다.

그러자 천성이 고지식한 김판율은 “기합이 좀 심한 것 같다.”며 곧바로 부대 내 사정을 얘기를 한 것이다. 장군은 화들짝 놀라면서 비서장교를 불러서 “부대 내의 폭력을 근절하라.”고 엄명을 내리게 된다. 그 소리를 듣고 나서 김판율을 ‘안되는 게 없구나.’ 하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 후 부대의 공기가 그렇게 상쾌할 수 없었다. 평소 훈련도 자주 빠지고 장군의 비서로서 계급에 맞지 않게 행복한 생활을 하던 김판율을 안 그래도 눈엣가시처럼 보고 있었던 장교였다. 장군의 꾸지람을 들은 장교는 김판율을 이제나 저제나 보복할 찬스를 엿보게 되었다. 한 남자에게는 한을 심어준 것이다.

그러나 그 후의 일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는 군대를 갔다 와 본 사람이면 다들 알 것이다. 수개월이 지난 후 그 총애하던 장군이 그만 전역할 시기가 온 것이다. 바로 잔소리를 들었던 장교는 비로소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얼마나 모질게 맞았던 지 실신까지 했다고 한다. 실신할 정도로 맞아서 입원까지 했다는 것을 보면 모질게 기합을 받았던 것이다.

군대는 자신을 이기는 법을 터득하는 공간
사실 군대 갔다 와서 성적을 내는 기사가 많다. 조남철 선생은 한국전쟁 때 전선의 첨병에 배치된 실제 전투에 참가한 적이 있는 상이병 출신이다. 김인도 67년 제대를 하고 나서 수많은 타이틀 맛을 보았다. 현역병만 있는 것은 아니다. 끈질긴 생명력의 보유자 서봉수는 방위병이고 유창혁도 방위병 출신이다.

특히 유창혁은 소년시절 두각을 나타내었지만 사춘기 시절 바둑과 학문의 두 갈래 길을 놓고 고민하던 유창혁이 결정적으로 바둑계 몰입하게 되는 계기를 군입대를 계기로 로 마련한 것이다. 유창혁은 1988년 대왕전에서 서슬 퍼렇던 조훈현을 이기고 첫 타이틀을 차지했던 것이다.

군을 다녀와서 성적이 좋아진 기사가 또 있다. 김승준은 당시 연구생출신 가운데 그렇게 촉망 받던 신예기사는 아니었지만, 군복을 입고 나서도 용감해져서 돌아온 것이다. 1994년 지금은 사라진 국기전에서 비록 이창호에게 1-3으로 패퇴했지만 첫판에서 이창호의 대마를 잡아버린 후 확실한 강자로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다.

무명기사 옥득진은 이창호와의 대결도 프로생활 6년 만에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금세 군에서 제대를 한 입장이었고 군에서 신문기보 쪼가리로서 공부한 것이 전부였다. 2005년 왕위전 도전자가 된 그 역시 첫판을 이긴 후 내리 3연패를 당했지만, 군인정신으로 거함을 격침했던 기억은 생생하다.


▲ 2004년 10월, 전자랜드배 결승전에서 김주호를 꺾고 우승을 차지한 김성룡. 대국이 끝난 뒤 복기를 하고 있다.

김성룡 군 예찬론
기회가 되면 군을 회피하려는 이 시절에 거꾸로 군을 가지 않아도 되는 입장이지만 군을 제 발로 찾아간 케이스도 있다. 프로기사보다는 해설자로 불리길 바라는 김성룡이 바로 주인공이다.

1999년 기무사령부 전역한 김성룡은 고2 때 전 가족이 이민을 갔다. 따라서 김성룡에게도 영주권이 있었다. 당시 병역법으로는 미국에 들어가서 6개월, 한국에서 6개월을 체류하면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김성룡은 바둑이냐 군대냐의 양 갈래 길에서 결국은 바둑을 택했다. 어차피 미국과 한국을 왔다 갔다 하다 보면 바둑도 깊어질 수가 없을 뿐 아니라 설사 대국을 한다고 해도 지속적이지가 못하기 때문에 기권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 그럴 바엔 차라리 기분 좋게 갔다 오자고 생각을 굳힌 것이다. 오히려 그가 군을 다녀와서 전자랜드배에서 생애 첫 타이틀을 따냈으니 프로기사로서 평생의 목표는 이룬 셈.

그는 과거의 기사와는 달리 바둑으로 장군에게 불려간 일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그때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고. 그는 군대에서 돈을 주고도 살 수 없었던 교훈은 ‘바둑 잘 두는 나만 최고’라는 생각을 버린 것이 평생의 깨달음이 되었다고 단언한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군에서 취미생활 조사를 하는데 바둑 줄 줄 아는 사람이 100명 중에 5명 정도였다. 그때 충격을 받았다. 군 생활이 기술적으로는 손해일지 몰라도 정신적으로 담금질할 수 있기 때문에 결코 손실이 아니다.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바로 군대였다.”



TYGEM / 진재호 바둑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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