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雜學
두 판 합계 반집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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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9 오전 10:16:33 입력 / 2009-06-13 오후 6:40:34 수정
| 반(半)이란 것은 가공의 숫자이다. 프로대국이나 각종 대회에서 무승부를 없애기 위한 가공의 숫자이다. 반(半)이란 것은 0.1집이라고 해도 되고 0.9집도 된다. 6집을 넘긴다는 뜻이며 7집이 채 안 된다는 의미만 확실하다. 그렇다면 바둑시합에서 덤이 탄생한 것은 언제부터이고 반집이란 개념은 언제부터 나왔는지, 그리고 덤의 변천과정에서의 ‘뒷담화’를 살펴보자. ●…덤의 생성 과정 1939년 일본 본인방전이 창설될 때 덤 제도는 탄생했다. 본래 본인방(本因坊)은 고대 일본의 권위 있는 바둑가문의 명칭인데, 본인방 가문은 오랜 세월 동안 바둑계를 지배해왔고 단위(段位)의 면허장도 그 가문에서 발행했다. 그러다 1924년 일본기원이 창설되고 단위의 면허장 발행권이 일본기원으로 넘어가자 본인방 가문은 돈줄이 막히다 보니 위세가 떨어진 것은 당연지사. 본인방가는 너무 오랫동안 ‘전횡’을 일삼아 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너무 오랫동안 바둑계의 패권을 쥐고 있었기에 ‘고인 물’이 되고 있었던 차였다. 당시 본인방 슈샤이(秀哉)도 본인방의 이름을 오래토록 빛나게 하려면 본인방을 개방하여 전국의 기사 중에 실력이 가장 뛰어난 사람에게 넘겨주어야 한다는 여론에 밀리고 있었다. 마이니치 신문사는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고자 슈샤이 명인에게 “본인방이라는 기전을 만들 테니 그만 은퇴하심이 어떠하냐?”고 설득하여 승낙을 받은 후, 일본기원에 본인방전의 기보 독점권을 넘겨주면서 역사적인 본인방전이 개시된다.
제1회 본인방전의 규정에는 단위와 상관없이 총 호선으로 두어서 흑이 4집을 공제한다는 규정이 들어있었다. 당시에도 흑 쪽이 상당한 프리미엄을 가지고 대국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곧장 덤 제도가 시행되자마자 4집이라는 것은 상당한 파격이었다. 일례로 ‘살아있는 기성’ 우칭위엔이 활약하던 시대의 기보를 보면 거의 흑 차례를 이기고 백 차례일 때 얼마나 이기는지가 승률의 핵심이 된다. 남자테니스의 서브권을 가진 쪽에서 게임의 우위를 확보하는 상황과 흡사하였다. 거의 흑을 든 기사가 이기기 마련이었다. 1939년 본인방전을 실시하려할 때 고루한 프로들은 덤 제도는 받아들이겠지만 총 호선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고리타분한 프로들은 지나친 파격에 불만을 가져 대회를 보이콧하기도 했다.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흑 4집 공제’제도가 탄생했으나 또 다시 말썽이 났다. 예선대회를 3번씩이나 빅이 만들어지는 바람에 덤 제도는 초기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이 난관은 바로 프로가 짜고 세 판이나 연속으로 빅을 만들어 대국료를 자꾸 타 가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때나 지금이나 예선을 두어서 먹고살기에 벅찬 프로기사가 짜고서 계속 빅을 연출해낸 것. 세 판이나 연속으로 무승부가 나오자 빅바둑을 없애기 위해 ‘반집’이라는 가상의 용어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1961년 요미우리신문에서는 4000만 엔의 거금을 내걸고 명인전의 개최했다. 이 대회의 진행방식은 예선을 통해 13명의 강자를 선정하여 풀리그로서 제1기 명인을 선발하는 방식이었으며 ‘흑5집 공제’를 채택했다. 그러나 빅이 되면 백 승으로 인정하되 완전한 승리와는 차별을 둔다는 얘기였다. 과거의 프로축구에서 승점제를 채택하면서 이기면 3점, 지면 0점을 주고, 비길 경우 연장전에서 골이 나면 서든데스제를 적용하여 2점, 연장전도 무승부가 되면 승부차기를 해서 이긴 팀에게 1점을 주었던 때가 있었다. 따지고 보면 복잡한 것 같지만 비기는 승부를 없애기 위한 조처였다. 프로축구의 그러한 승점제와 이 ‘흑5집 공제’ 제도는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비기면 2점 내지 1점을 주는 축구의 승점과 같이 ‘빅승’은 완전한 승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조커 낀 포커와 오리지널 포커의 차이 덤5집 제도도 희한한 일을 만들어냈다. 당시 일본기원의 섭외이사로 후지사와(藤澤秀行)가 있었다. 요미우리 신문사와 거액의 명인전 개최권을 계약한 사람이 후지사와였고 ‘흑 5집 공제’의 ‘괴상한’ 규정을 창안해 낸 사람도 역시 후지사와. 그런데 자기가 만든 규정의 최대 수혜자가 되었으니 그것은 운명의 장난이었다. 제1기 명인전은 1년 8개월에 걸친 리그전 결과, 마지막 두 판을 남겨 놓고 있었다. 3명의 우승후보가 나타났다. 후지사와가 9승2패, 우칭위엔(吳淸源)이 8승3패, 사카다(坂田榮男)가 8승3패. 최종대국은 후지사와-하시모토(僑本昌二), 우칭위엔-사카다의 대국이었다. 즉, 후지사와가 이기면 무조건 10승2패이니까 초대명인에 오르게 되며, 지게 되면 우칭위엔, 사카다 간의 승자와 재 대국을 벌이게 된다. 바둑은 종반까지도 사카다가 유리했는데 끝내기에서 조금씩 후퇴하더니 결국 흑이 반면 5집을 남긴 것. 따라서 ‘흑 5집 공제’규정을 들이미니 후지사와의 ‘승리’. 따라서 최종결과는 후지사와 우칭위엔이 똑같이 9승3패를 기록했다. 그러면 동률재대국을 벌이는 걸까? 우칭위엔은 ‘빅승’이 있었기 때문에 재수 없게도 후지사와에게 초대 명인을 양보해야 했던 것이다. 후지사와는 ‘규정승’을 거둔 것이다. 포커 판에서 조커를 쓸 경우, 조커를 포함한 포커와 조커 없는 오리지널 포커가 만날 땐 오리지널이 이긴다는 규정과 같이, 너무나 억울하게 ‘반 끗발’ 차이로 ‘밟힌’ 것이다. 물론 후지사와는 명인이 된 것도 모른 채 술에 한바탕 취해 있었으며, 요미우리 신문사에서는 새 명인 탄생 기사를 쓰기 위해 후지사와를 사방으로 찾아다녔다. 새벽 1시쯤 제 발로 만취상태에서 집에 들어온 후지사와 왈, “내가 명인이 된 겁니까? 미안해요. 슈코는 악당이라니까.”
1975년 하면 떠오르는 것이 한국기원 기사파동. 그 무렵 한국기원 소속기사들이 침체상태에 있는 기원운영을 비판하더니 이사진과 충돌하여 이른바 기사파동이 악화되어 대다수 기사들이 한국기원을 탈퇴하고 대한기원을 설립하는 바람에 바둑계가 두 쪽으로 쪼개졌으며 모든 기전을 대한기원에서 주관했다. 30년 전 쯤 국기전에서도 해괴한 반집승이 한번 발생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시대상을 반영하듯 공제가 4집반에서 5집반으로 왔다 갔다 하던 때였다. 이야기는 1976년 제2기 국기전 본선토너. 백흥수와 홍종현과의 대국인데 공제와 연관된 아주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백흥수가 홍종현을 쳐다보며 물었다. “국기전은 공제가 얼마지? 요즘 변동이 하도 심해서…” “글쎄요. 저도 모르겠는데요. 4집반인가 5집반인가…” 그 시절은 4집반 공제에서 5집반 공제로 넘어가는 과도기여서 어떤 신문은 4집반 공제, 또 어떤 신문은 5집반 공제를 적용했기 때문에 항상 시합에 임하면서 그 규정을 물어보곤 했었다. 그때 기록을 맡은 연구생이 아는 척을 했다. 씩씩하게. 그런데 사실 국기전의 공제는 4집반이었다. 당시 백흥수는 대한기원 총무이사를 맞고 있었으며 홍종현은 출판이사였으며 운당여관에 예약했던 다른 대국이 취소되어 예정에 없던 대국이 갑자기 두어졌기 때문에, 관전기자도 나오지 않아 기록자의 ‘착각’이 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오후 4시 바둑이 끝났으며 계가는 공교롭게 홍종현이 5집을 반면으로 남겼다. 국기전의 공제가 4집반이었으니 원칙대로라면 홍종현의 반집승. 그들은 당초부터 5집반 공제로 알고 대국을 시작했기 때문에 백4단의 반집승으로 ‘결말’이 난 셈. 홍종현은 자신의 대국 중 실수를 거듭 후회하며 복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 대한기원 섭외이사을 맡고 있던 정동식이 운당여관 대국장을 찾았다. 그는 검토 장면을 구경하다 대국결과를 보고받고는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무슨 소리냐! 국기전의 공제는 4집반이다. 내가 며칠 전에 시합을 해서 잘 알고 있다. 이 판은 홍종현이 이긴 것이다.” 대한기원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심사위원회가 열렸다. 심사위원장 조남철 심사위원 윤기현 하찬석 등이었다. “모든 일에는 규정이 있다. 설사 대국규정을 잘못 알고 있다 고는 할지라도 나중에 잘못이 밝혀졌으면 규정대로 시행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본다.” (윤기현) “규정이 그렇더라도 사실이 더 중요하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5집반 공제로 잘못 알고 바둑을 두었고 그렇게 해서 승부가 났으니 마땅히 그 사실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하찬석) “양측이 모두 정당한 사유를 갖고 있어 판정하기가 어려우니 재대결을 붙이도록 하지요.” (조남철) 결국 조남철이 캐스팅 보트를 던져야 하는 상황이지만 양쪽 다 주장이 옳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대국 전에 덤을 물어봤고 패자인 홍종현도 처음엔 패국을 인정했을 정도이니까 사실 규정을 들이밀기도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그리하여 꼭 한 달 뒤 백흥수와 홍종현의 재 대국이 열렸다. 이야기가 여기까지면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닌 것이다. 다시 돌을 쥐어 흑백을 정했는데 이번에는 백흥수가 흑을 잡았으며 대국결과는 백흥수가 반면 5집을 남겼다. 이번에는 백흥수가 ‘진짜’ 반집승을 거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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