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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雜學

타이거마스크와 손풍기

ㅋㅋ

2009-07-05 오후 7:43:09 입력 / 2009-07-05 오후 7:46:54 수정

●…신경전이래도 좋고 해프닝이래도 좋고

누차 말하지만, 요즘은 대국시간이 짧아지다 보니 대국이외에 쓸데없는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 조금 퍽퍽해진 느낌. 그러나 ‘여유’가 있었던 과거에는 심심치 않게 별의별 사건 사고가 다 일어나곤 했다.

프로의 대국 때 일어나는 지극히 인간적인 경쟁심에서 출발한 신경전에 대해 알아본다. 어떤 경쟁이라도 신경전은 생기게 마련이고 신경전은 승부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원초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두뇌게임인 바둑에서 신경전은 마치 비신사적이고 비인도적인 것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사실은 심리를 잘 타는 사람일수록 고수일 경우가 많으니 그 또한 전략이다.

●…흑 나와라, 흑!


흑백 가리기는 단위가 높은 쪽에서 백돌을 한 움큼 쥐면 상대가 흑 돌을 하나 또는 둘을 올려놓아 돌 가리기가 시작된다. 백돌을 한 움큼 쥐었던 사람은 주먹에 담았던 돌을 두 개씩 나란히 배열하며 홀짝을 가려보는데, 흑 돌을 하나 올렸다면 그 주먹의 돌 수 전체가 홀수일 경우 내가 흑을 쥐겠다는 뜻이 된다.

만일 주먹에 쥔 돌이 짝수일 경우라면 상대가 흑 돌을 하나 올려놓은 쪽에서 못 맞힌 것이니 백을 든다.(요즘은 돌의 홀짝을 맞힌 사람이 선택권을 갖는 방식도 있다.) 

문제는 덤이란 것이 있어서 흑을 들든 백을 들든 피차간의 이해득실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아니, 가까워야 정상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에 여러 가지 진풍경이 벌어지곤 한다.

지금은 고인이 된 객원기사 오송생(표기법상으로는 ‘우쑹성’이지만 좀 더 친근하게 오송생이라 부르자.) 무척 흑을 들기를 좋아했다. 비공식대국에서야 큰 신경을 쓰지 않는데, 공식대국에서는 유독 돌 가리기 때만 되면 ‘반칙’을 일삼았다.

10번을 만나면 대략 5번은 흑백이 번갈아 나와야 하는데, 이상하게 그와 만나면 백을 들게 된다는 경우가 많다고 동료기사들이 푸념했다. 당시만 해도 덤이 5집반이었으니 불만은 불만이었다. 필자도 오송생의 대국을 수 십 차례 보아왔지만 그는 확실히 흑을 들 때가 2배는 많았다.

아무래도 그가 선배가 되기 때문에 돌을 쥐게 된다는 데에 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흑을 들고 싶은 오송생은 백돌을 한 움큼 쥘 때마다 백돌이 짝수가 되도록 무진장 노력을 하는데, 실제로 그는 짝수를 만들기 위해 어린애처럼 바둑알을 한 움큼씩 쥐고 눈물 나는 연습까지 했다고 한다.

보통 자신보다는 나이가 적은 기사와 대국을 하게 되고, 그 기사가 통상 1개의 돌을 올리므로 자신은 짝이 되도록 돌을 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펼쳐놓은 주먹 안에서는 짝수가 홀수보다 배는 많았던 건 당연지사.

아무리 흑을 들고 싶다고 한들 실제 짤짤이 연습까지 하겠는가 싶겠지만, 그 사실은 진실이다. 동료기사에게서도 그 얘기가 전해 나오기도 했고 필자가 오송생과의 술자리에서 확인한 적도 있으니 말이다.

오송생은 바둑이 대륙적이어서 두껍고 세력지향적인 바둑이다. 그는 ‘대륙풍’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바둑이 ‘현실 외면적’이어서 독특함을 자랑했는데, 그런 기풍을 제대로 살리려면 덤의 크기와 상관없이 그는 흑을 들어야 했던 것이다.


●…서봉수의 기가 막힌 짤짤이 실력


기력이 아니라 기세로 바둑을 둔다는 서봉수. 그도 짤짤이에서 이득을 본 적이 있다. 99년 LG정유배 도전5번기 최종국, 유창혁과 서봉수의 대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엄밀히 말하면, 둘 사이의 신경전이 아니라 혼자만의 신경전이었는데 그 주인공은 서봉수였다.

서봉수는 당시 그 대국을 이겨 6년 만에 무관에서 탈출하였는데 1,2국을 이겨서 타이틀 획득이 유력시되던 서봉수는 그만 3,4국을 내줘 타이틀 획득이 물거품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면서 맞이한 마지막 제5국.

서봉수는 흑을 들고 싶었다. 마지막 대국이 되면 다시 돌 고르기를 하게 된다. 그는 같은 9단이지만 서열이 높은 관계로 그가 백돌을 한 움큼 쥐는 위치임을 착안하여, 앞서 소개한 오송생의 ‘짤짤이’를 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서봉수는 오송생과 같이 기사실에서 자주 짤짤이에 대한 덕담을 나눈 바도 있음)

드디어 대국 당일. 돌가리기 현장이다. 서봉수는 백돌을 돌 통에서 한 움큼 꺼낸다. 물론 유창혁은 평소처럼 흑 돌을 하나 반상에 올려놓고는 ‘홀이면 제가 흑을 들겠습니다.’고 했다. 그런데 서봉수는 오송생의 그것처럼 매끄럽게 손이 돌 통에서 나오질 못하고,  잠시 머뭇거린 후에 주먹이 나오는 게 아닌가. 그 시간으로 말하자면 0.5초도 안되겠지만 그것은 분명 어색한 광경이었다.

홀인지 짝인지 알아볼 차례. 백돌을 둘씩 나누다 보니 딱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서봉수는 그리도 몽매하던 흑을 들게 된다. 그리고 그 한판을 서봉수의 소원대로 이기게 되고 서봉수는 6년만의 무관탈출을 이룬다.

물론 흑을 들었다고 이길 수 있었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한판이 각별한 승부사에게 자기가 흑이든 백이든 쥐고 싶은 돌을 쥐었다는 건 어쨌든 기분 좋은 일임에 틀림없다.

“글쎄, 느낌에 내 주먹에 든 돌이 홀수인 것 같더라고. 그래서 슬쩍 돌 하나를 떨어뜨린 다음에 주먹을 뺐지. 하하하하. 내 예감이 맞잖아.”


●…타이거마스크를 아는가


지금은 자연스레 사라졌지만 담배에 얽힌 이야기는 엄청나게 많다. 그 중 신경전에 관한 재미난 얘기를 소개한다. 김수장은 ‘빛나리’ 고 김수영의 실제(實弟)로서 묘수풀이의 대가로 유명하다. 몸집은 형 김수영보다도 더 큰 듬직한 학구파 기사. 그는 형과 마찬가지로 담배연기를 무척 싫어한다.

김수장은 92년과 94년 연거푸 지금은 사라진 동양증권배에 출전한다. 물론 예선전을 거쳐서 힘들게 올라간 국제대회였다. 정확한 연도와 상대 선수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상대는 중국기사였을 것이다.

김수장은 그때 마스크를 준비하여 대국장에 들어섰는데, 그 이유는 지독한 감기 때문이 아니라 지독한 담배연기를 퇴치하기 위한 고육지계. 큰 홀에서 한 중 일 애연가 그룹이 전부 뿜어대는 담배연기를 이겨낼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신사’ 김수장에게는 화생방 가스실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김수장은 처음부터 마스크를 착용할 마음을 가진 건 아니었다. 그리고 설사 마스크를 가지고 갔다고 해도 수읽기에 골몰하다보면 까먹기 마련이고, 또 설사 포연이 자욱하다고 해도 막상 마스크를 상대가 보고 있는데 착용하기란 또한 쉽지 않은 것.

중반을 넘어서고 바둑이 점차 무르익어가자 여기저기서 약속이나 한 듯이 담배연기가 피어오른다. 사실 16강전이나 24강전 쯤 이면 16명이 동시에 큰 홀에서 대국을 하게 되는데, 한 중 일 담배연기에다 서양담배연기까지 믹스가 되니…

‘가스’가 피어오르자 기어코 김수장은 ‘써!’를 외치며 하얀 마스크를 착용했다. 당장 그 광경을 본 사람은 상대 대국자뿐이지만 시간이 지나자 여기저기서 김수장의 마스크를 보게 되었고 선수들은 미안해서 전부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비고 말았다.


●…차민수의 손풍기


차민수는 김수장의 마스크보다 더 기묘한 발상으로 담배연기를 퇴치했다. 그가 88년 89년 연속으로 후지쓰배 8강까지 오른 사실은 이미 유명하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차8강.’

차민수는 74년에 입단하였지만 줄곧 미국생활을 한 터여서 사실 기력은 그리 세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다. 그러나 국제대회가 생기고 그 구색을 맞추기 위해 미국이나 유럽대표도 생색용으로 끼워주면서 그에게도 숨은 실력을 과시할 기회가 생긴다.

그런데 차민수가 후지쓰배에 출전하면서 연속으로 8강까지 치솟은 과정은 사실 드라마틱했다. 구색 갖추기로 출전한 그가 중국의 네웨이핑(聶衛平)을 꺾는 등 대 파란을 몰고 왔기 때문.

여기서 소개하고자 하는 건 16강전의 일화. 김수장은 문익점의 목화씨 마냥 마스크를 숨겨 들어왔지만 차민수는 좀 더 큰 물건을 소지하고 들어왔다. 바로 손풍기(?). 왜, 장난감 같기도 한 휴대용 선풍기 말이다.

조훈현은 입담배(일명 뻐금 담배)지만 네웨이핑은 옆에서 구경하기에도 맛있는 속 담배 체질. 그의 입에서 뿜어 나오는 중국산 담배연기는 실로 매섭기 그지없다.

차민수는 네웨이핑과 마주 앉자마자 손풍기를 지그시 꺼내놓아 네웨이핑을 자극시킨다. 엄밀히 말하면 상대의 자극이 아니라 정당방위였다. 대국 중의 흡연이 구속받지 않는다면 그 매연을 마시지 않을 권리도 스스로에게 있다고 판단한 차민수는 당당히, 전혀 상대를 의식하지 않고 상대의 면전에 턱 갖다 놓았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다.

‘웨웨웨웨…’

손풍기가 촐랑거리며 돌아가는 소리 또한 상당히 신경에 거슬리게 하는 것이었다. 그 또한 민폐. 각 국 선수들이 차민수에게로 향한 건 불문가지. 그래도 그는 네웨이핑에게 했던 것처럼 ‘씨익’ 한번 웃으며 ‘미안하다’는 뜻을 전했을 뿐 결코 손풍기를 멈추지 않았다.

바둑이 만만치 않아지자 담배 피우는 속도도 빨라지고 손풍기가 돌아가는 속도도 빨라진다. 네웨이핑은 그 손풍기에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까지 벌어지기 마련. 하기야 그렇게 기계에 신경을 쓰다 보니 바둑도 원만해질 리가 없다.

그가 국후 한마디를 걸쭉하게 내뱉은 건 불문가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TYGEM / 진재호 바둑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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