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미리 초단. |
지난 7월 26일 한국바둑리그 KIXX와 한게임의 격돌에서 좀처럼 믿기 어려운 사건이 발생했다. 양 팀이 1승1패를 기록한 상태에서 맞붙은 3장들의 대국. KIXX팀에서 박정환 2단이 출전했고 한게임에서는 김미리 초단이 나왔다.
박정환은 현재 최연소 프로기사이며 원익 배 십단전에서 이창호 백홍석을 꺾고 타이틀을 차지한 초 강자, 그에 비해 김미리는 프로기사 238명 중 서열 232위인 입단 1년 차 새내기다.
양 팀 출전오더로만 따진다면 3차전 대진은 한게임에서 버리는 카드로 배치하지 않았나 싶었다. 그런데 그 판에서 김미리 초단이 큰일을 내버린 것이다. 초반 포석부터 당차게 짜더니 중반 격렬한 전투에서도 밀리지 않고 박정환의 도발에 카운터펀치를 날리며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녀는 한국리그 참가자들 중 유일한 여류기사다. 그 점 하나만으로도 잠재력은 충분하지만 김미리는 박정환이라는 대어를 낚아 자신이 버리는 카드가 아니라 비장의 히든카드임을 확실하게 입증시켰다. (김미리의 선전에 힘입어 한게임은 4차전과 5차전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그 한판의 충격이 워낙 컸던 까닭에 박정환은 눈물을 떨굴듯한 표정으로 돌을 던졌고 대국 후 팀원들끼리 나누는 복기도 포기하고 그냥 귀가했다고 한다. 반대로 김미리는 그 한판에 뜨거운 열정을 실어 확실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바둑계에 알렸다. 언론의 조명을 한 몸에 받았고 ‘잔다르크’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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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기뻤지만 정환이 얼굴 보기가 좀 미안했어요. 아주 친한 동생이거든요. 이틀 후엔가 기원에서 마주쳤는데 씩 웃더군요. 저도 그냥 씩 웃었어요.”
여고생 김미리(세명컴퓨터고 3년)는 유쾌하고 거침없이 활달한 성격이다. 뭘 물어도 짧고 간결하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는다.
십단 박정환을 이겼다고 해서 최근 부쩍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이는데 고맙기는 하지만 그런 시각에 ‘여류’라는 핸디가 전제되어 있는 것 같아 기분이 묘하다고 밝힌다.
사실 이전 한국리그에서 상반기의 히어로 김지석과 맞붙어 종반까지 접전을 펼친 적도 있었으므로 소속 팀 한게임 감독이나 동료들은 김미리를 진정한 비밀병기로 아끼는 듯싶었다.
이후 8월 들어 그녀는 삼성화재 배 예선에 참가했는데 날마다 연전연승하며 부드럽게 상승기류를 탔다.
아주 소박하지만 조금 특별한 소원 하나
1991년 3월 24일 서울 상계동 출생. 허장회 도장 수학, 8년 동안 한국기원 연구생, 6차례 입단 대회 참가, 2008년 제34회 여류입단대회에서 3전 전승으로 프로 입단.
김미리 초단이 걸어온 길은 간단명료하다. 군더더기가 없다. 어찌 보면 전형적인 바둑 엘리트 코스를 밟은 걸로 느껴진다. 그래도 꽤나 오랜 기간 입단 문턱에서 애를 먹었으니 눈물겨운 에피소드깨나 들려줄 법한데 그녀는 머리를 매만지며 웃기만 한다.
“연구생 시절에 일년 내내 내신관리를 해야 하니까 스트레스가 없진 않았죠. 그렇지만 바둑으로 프로가 되겠다고 맘먹은 이상 어차피 겪어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어요.”
십여 년 전 미국 LPGA에 상륙해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던 박세리의 눈웃음과 겹쳐진다. 미소도 그렇고 당돌한 패기도 그러하며 뭔가 닮은 느낌이다.
바둑은 부계(父系) 가문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 김재연 씨(47)가 타이젬 5단 기력이고 작은 아버지 김재희 씨는 타이젬 8~9단 기력으로 바둑학원을 운영했었다.
어릴 때 미리가 다소 말괄량이 기질을 보이자 아버지가 기질을 순화시키기 위해 바둑교실에 보냈다고 했다. 그런데 그 딸이 돌을 만지고 놀기를 즐거워했다. 특별히 천재성을 발휘하진 않았지만 배우면 배운 만큼 기력이 향상되어갔다.
9살 때 미리가 바둑교실 대항전에 참가해 6학년 언니와 맞붙은 적이 있었다. 그 상대는 다른 교실 원장의 딸이라 기력도 강했다. 아마 미리보다 두어 점은 상수였을 것이다. 그래서 상대 소녀가 미리를 쉽게 보고 초반 좌하 귀 정석 과정에서 꼭 가일수를 해야 하는데 손을 빼 다른 큰 곳을 차지했다.
“그 순간 미리가 힐끔 상대를 한 번 쳐다보더라고요. 그러더니 천연덕스럽게 서너 수 정도 상대의 장단에 손 따라 두는 겁니다. 상대가 안심을 했겠죠. 그런데 갑자기 미리가 좌하 귀에서 마무리되지 않은 상대의 대마 급소를 확 찌른 겁니다. 그리고 또 한 번 그 언니를 쳐다봤어요. 상대의 얼굴이 빨개졌지요. 그때부터 한참 동안 그 언니는 대마를 살리느라 애먹었죠. 그렇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미리가 끝까지 대마를 쫒아가 안형을 없애고 잡아버린 겁니다. 저는 그 때 미리의 눈빛에서 승부사의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 어린 시절의 김미리 초단. 유치부 대회에 출전하고 있다. |
아버지 김재연 씨가 들려준 에피소드다. 프로기사들의 유년 시절 에피소드는 천재성에 관한 것들이 많은데 김미리의 승부 끼에 관한 에피소드는 좀 특이하지 않은가?
그 뒤로 아버지는 딸을 데리고 숨은 고수들의 내공을 전수받고자 서울의 여러 기원을 전전하기 시작했다.
“그때 바둑이 조금 지겹기도 했어요. 동네 기원들은 대부분 담배 연기가 자욱하잖아요? 그리고 전부 어른들만 앉아계셔서 불편했구요. 또 어른들의 바둑은 책에서 본 적이 없는 괴 초식들이 많아서 힘들었어요. 그렇지만 그런 시기가 또 어떻게 보면 실전감각을 익히는데 도움이 됐다고 볼 수도 있겠죠.”
아버지는 미리를 교육시키기 위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수행했다. 그런 고행 끝에 서울 컵 바둑대회에서 우승했고, 오리온 배 바둑대회 저학년 부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우승은 강동윤)
“미리는 한 마디로 듬직한 아이예요. 스스로 뭘 하겠다고 맘먹으면 알아서 헤쳐가는 스타일이죠. 지금까지 미리 때문에 골머리를 앓아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또 아빠가 무척 엄하게 가르쳤어요.”
김미리 초단의 어머니 하경희 씨는 바둑 에피소드로 이붕 배 스토리를 들려준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바둑이 한창 늘면서 여러 대회에 참가하기 시작했어요. 부산의 이붕 배 바둑대회 규모가 컸었는데 미리와 아빠가 청운의 뜻을 품고 기차를 타고 내려갔는데 그만 초반에 탈락했습니다. 아침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했는데 그 길로 서울에 돌아와 부녀가 방으로 들어가더니 몇 시간 동안 복기를 하는 거예요. 그 분위기가 어찌나 진지하고 무거웠던지 들어갈 엄두가 나질 않았습니다. 아빠가 잔뜩 화가 나서 바둑을 그만 두라고 했나 봐요. 그런데 미리가 바둑 말고 따로 할 게 없다면서 바둑을 계속 공부하게 해달라고 사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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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생 시절 미리는 부모에게 입버릇처럼 소박한 소망을 털어놓곤 했었다.
“저는 한국리그 검토 실에 들어가서 프로기사들과 바둑을 검토하는 것이 소원이에요.”
그랬던 미리가 몇 년도 채 되지 않아서 검토실의 주역으로 활동하고 있으니 일단 간절했던 꿈 하나는 성취한 셈이다.
남자랑 두는 게 훨씬 편하다
2008년 말에 입단한 김미리 초단은 강렬한 입단소감을 밝혀 바둑 팬들의 주목을 받았다.
“대진표에서 내 이름을 발견한 상대가 피곤함을 느끼도록 해주고 싶다.”
얼마나 도발적이고 당당한 소감인가.
그 누구와 붙어도 지고 싶은 생각이 없으며 끝나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포부를 미리는 그런 식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그녀는 2009년 여름 그 소감을 어김없이 현실로 이끌어내는 중이었다.

▲ 한국리그에서 박정환을 꺾고 팀 승리에 수훈한 김미리 초단. |
현재 프로 총 전적이 14승 14패. 정확히 5할의 승률을 기록하고 있지만 승점의 가치 면에서 김미리 초단의 승률은 좀 각별한 구석이 있다. 이제 갓 출발한 새내기지만 승부를 두려워 하지 않고 즐길 줄 안다는 점에서 그녀의 행보를 유심히 지켜보고 싶다.
“강한 상대와 대국 일정이 잡히면 뭐랄까? 피가 끓는 기분이에요. 아무래도 강자와 두는 게 기분 좋죠.”
그녀, 구김살없이 그렇게 대답한다. 그래서 우리는 강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믿고 전진하는 오를레앙의 처녀 잔다르크 이미지를 그녀에게 선사한 것이다.
* 김미리가 8월 7일, 한국기원에서 열린 제14회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통합예선 4회전에서 여자랭킹 1위인 루이나이웨이를 물리치고 예선결승에 진출했습니다. 김미리는 내일(8일) 중국의 탕이와 본선진출을 다투게 됩니다.
●…10문 10답
1.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 파울로 코엘류의 연금술사(7번 독파)
2. 가장 존경하는 프로기사?
이창호 9단(어떤 장소에서도 바둑을 생각하는 진정한 프로) 루이 나이웨이 9단(바둑을 즐길 줄 아는 선배)
3. 좋아하는 컴퓨터 게임? 테트리스(김지석, 원성진 등 ‘테트리스 패밀리’에 속함)
4. 감명 깊었던 영화? 타이타닉
5. 잊을 수 없는 한 판? 한국리그에서 김지석에게 졌던 판.
6. 싫어하는 것? TV(거의 보지 않음)
7. 어울리는 ‘절친’ 프로기사? 이슬아, 김혜림, 문도원(4총사로 통함)
8. 취미? 뉴 에이지 악보 수집
9. 별명? ‘김말이’(이름 때문에 붙여진 다소 어이없는 별명^^)
10. 그녀의 주간 스케줄
월 - 허장회 도장 프로리그
화 - 허장회 도장, 피아노 수업
수 - 충암연구실 개인공부
목 - 허장회 도장, 피아노 수업
금 - 소소회 연구회에서 공동연구
토 - 소소회 리그전
일 - 일본어 과외수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