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바둑사
저녁에 마신 음료수 값만 48만원
프랑스 바둑사 제1편 - 1981년 연맹회원 300명 클럽 30개로 발전
2010-01-12 오후 3:25:44 입력 / 2010-01-12 오후 3:31:07 수정
| 1. 사상 최고의 더위 2003년 8월 중순. 이 날 파리의 기온이 41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기상 측정을 한지 3백 년 만에 최고의 더위라고 한다. 이 날 프랑스에서 폭염으로 죽은 사람이 2만 명이 넘었다. 대부분이 병약자나 노인들이라고 한다. 선진국에서 천재지변으로 2만 명의 사망자를 내는 건 아주 드문 일이다. 이런 날 우리가 파리에 도착했다. 우리 일행 20 명은 ‘파리 바둑클럽’에서 오늘 저녁에 교류전을 하기로 되어 있다. 그런데 사고가 났다. 3 주 전에 러시아 상 페테르부르크에서 나하고 이 일을 주관하기로 약속한 파리 바둑클럽의 끌로드(Claude)와 연락이 안 된다. 이틀 전부터 그의 휴대폰에 계속 전화를 걸었으나 대답이 없다. 파리로 들어선 우리는 낭만의 거리 몽마르트 언덕을 먼저 찾아갔다. 언덕 위에 있는 동네라 옛날에는 가난한 예술인과 학생들만 살았다. 고흐, 고갱 같은 인상파 화가들이 살고 빅토르 위고가 살았던 곳이다.
나는 오페라극장 앞에서 학생들에게 두 시간의 자유시간을 주었다. “점심 먹고 오페라극장 구경하고 시간 남으면 이 옆에 있는 라파이에트 백화점을 구경해라” 했는데 거의 다 점심 후 백화점으로 들어 갔다고 한다. 너무 더워서 에어컨이 된 곳을 찾아들 갔다고 한다. 나는 제자 중 서재학만 데리고 그 근처에서 PC Café를 찾으려 이리 저리 뛰어다녔으나 못 찾았다. 할 수 없이 재학이와 중국집에 들어가서 점심만 먹고 나온 후 학생들에게 샹젤리제 거리도 보여주고 PC Café도 찾을 겸 우리의 장소를 옮겼다.
나는 알렉산드리아 다리 근처에 버스를 세우고 우리 일행에게 “저 밑에 보이는 길부터가 유명한 샹젤리제 거리인데 왕복이 약 4km다. 그 끝에 가면 개선문이 있으니까 거기까지 가서 보고 오면 된다. 지금부터 자유시간이다. 3시간 후에 버스로 모인다” 하고 해산시켰다. 나는 다시 서재학만 데리고 PC방을 찾아 나섰다. 재학이는 A+행진만 하는 모범생. 이번 한달 간 여행 중 버스 제일 앞 자리 교수들 옆에 붙어 앉아 내가 유럽에 대해 설명만 하면 다 받아 적는다.
나는 PC Cafe에서 파리 바둑클럽 주소를 찾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나 프랑스 내에서 바둑으로 연락처가 나와 있는 곳은 남쪽 도시 리용(Lyon) 클럽 밖에 없다. 내가 리용 클럽에 전화를 했다. 내가 상황 설명을 하자 그 쪽에서 자기네를 어떻게 찾았느냐며 놀랜다. 인터넷에 연락처가 떴더라고 하니까 그것도 모르고 있다. 그들이 한참 만에 파리클럽의 주소를 찾아 주었다. 나는 우리 일행을 데리고 먼저 에펠탑에 가서 잠깐 들리고 노트르담 사원은 차로만 지나치고 바둑클럽으로 갔다. 파리에서 유일하게 항상 여는 바둑 카페 '레스코(Café Le Lescot, 26 rue Pierre Lescot 75001 Paris)'는 퐁피두센터 근처에 있다. 레스코 호텔의 1층과 2층이 파리 바둑인들의 아지트이다. 2. 교류전
이 날 더위는 가히 살인적이었다. 박영진이가 나에게 와서 “교수님 오늘 저녁 우리 일행이 음료수로 먹은 값만 48만원입니다”한다. 이 곳이 너무 더워서 나는 전에 잤던 한국 민박집을 찾아 보려고 재학이와 둘이 밤 11시가 지나서 1 시간 이상 중국촌 근처를 돌아 다녔으나 못 찾고 말았다. 내가 항상 자랑하는 나의 ‘귀신도 곡할 방향감각(Uncanny sense of direction)’이 이제는 맛이 갔나 보다. 자정이 되었는데도 모든 노천 카페가 만원이다. 클럽 쪽에 오니까 도로에 우리 식구들이 패잔병처럼 여기 저기 들어 누어 있다. 누가 “돌 위에 누워 있어도 더워요” 한다. 우리가 바둑을 둔 곳이 호텔인데 방에 에어컨이 없어서 들어가면 숨이 막힌다. 다른 때 유럽에 가면 여름에도 스웨터 입고 다녀야 할 경우가 많다. 그래서 보통은 에어컨이 없다. 나는 남녀 샤워용으로 방을 두 개만 빌리고 대부분의 멤버들은 길과 바에서 밤을 지새웠다.
파리는 프랑스의 수도 일 뿐 아니라 세계 문화의 중심지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빛의 도시” 라고 부른다. 인구는 약 1 천만 명. 10층 미만의 3~4백 년 전 건물로 전 시내가 꽉 차여 있다. 나는 어릴 때 유트릴로가 그린 “잿빛 하늘의 파리”를 보고 또 에디뜨 삐아프가 부른 샹송을 들으며 파리에 대한 동경을 키웠었다. 그 더위에 밤새 시달리고도 다음 날 아침 8시에 버스에 모인 학생들 얼굴을 보니까 다 활기찬 모습이다. 젊음이 좋긴 좋다. 나는 어제 노트르담 사원에 오늘 들리겠다고 약속했는데 시내로 들어가면 시간을 많이 잡아 먹기 때문에 일행에게 “우리가 룩셈부르크로 가는 길 목에 있는 랭스(Reims)에 가도 노트르담과 똑 같은 사원이 있으니까 그리로 가자” 하고 떠났다.
3. 랭스 노트르담 사원 내가 성당에 대해 설명하는데 너무 더워서 다들 뿔뿔이 흩어져 두어 명만 서서 듣는다. 내가 일행을 다시 모아 놓고 “오늘 룩셈부르크를 보고, 독일 트리에(Trier)에 가서 공산주의 이론을 만든 칼 마르크스(Karl Marx) 집에 가고, 경치 끝내주는 라인 벨리(Rheine Valley) 중심 도시 코블렌츠(Koblenz)까지 가서 시내 구경을 하고 숙소인 코블렌츠 성(城)에 가려면 시간이 없다. 그 중 하나를 제치고 점심을 먹을래 아니면 컵라면으로 얼른 때우고 그 걸 다 볼래?” 하니까 다 합창으로 “라면이요” 한다. 우리는 서둘러서 성당 뒤편에 가서 버너로 물만 끓여서 컵라면을 서서 먹었다. 이렇게 서두른 덕택에 이 날 내 계획대로 룩셈부르크에 가서 두 시간 자유시간을 주고 독일 국경을 막 넘으면 있는 트리에에 가서 칼 마르크스 집을 방문했다.
4. 재고해 봐야 할 바둑천재들의 교육 이 날 우리는 시간 내에 코블렌츠 성에 가서 잘 수 있었다. 내가 장난으로 자기 전에 “이 성은 옛날에 전쟁을 많이 치러 죽은 원혼이 떠 도는 곳이다. 너희가 밤에 화장실에 가려고 복도에 나가면 중세 복장을 입은 사람이 복도에 서서 너를 물끄러미 쳐다 보고 있으면 그 건 귀신이다” 등의 얘길 했더니 최유진과 두어 명이 무서워서 잠을 못 자고 앉아서 새웠다고 한다. 그 말을 해 준 나는 신나게 푹 잤는데. ^^ 우리는 그 다음 날 라인강에 가서 두 시간짜리 유람선을 탄 후에 프랑크푸르트에 가서 시내 관광을 먼저 마치고 교류전을 무사히 치르게 된다. 러시아 유럽대회가 끝난 후 나는 명지대 바둑학과 팀을 인솔하고 유럽 9개국을 돌며 교류전을 치러 가는 곳 마다 한국바둑을 알렸다. 우리 일행의 바둑 실력은 유럽인에게 경탄의 대상이 되었다. 내 학생들은 가는 곳마다 그 나라 바둑인들을 만났다. 그러나 영어실력 부족으로 친구를 사귀지는 잘 못했다. 유럽인들이 나에게 “다음 올 때는 학생들에게 영어 좀 가르쳐서 와 달라”고 한다. 한국 바둑의 세계화를 위해선 바둑강자들에게 조직적인 영어교육 방안이 연구되어야 하겠다. 그들이 영어로 무장만 되면 엄청난 ‘불루오션(Blue Ocean)’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내가 유럽 여름은 추우니까 스웨터를 가져가야 한다고 떠나기 전 오리엔테이션 자리에서 학생들에게 말했다. 그런데 유럽 역사상 가장 더운 날씨가 한달 간 계속 될 줄이야. ‘동토(凍土)의 땅’ 러시아까지도 무지 더웠다. 학생들이 나를 놀리느라고 “교수님, 스웨터 언제 입어요?” 하며 심심하면 한 번씩 묻는다. 그러다가 융프라우 3700미터 정상에 올라 갔다. 그 때도 여러 명이 반 팔 차림이었다. 정말 올라가니까 추운 줄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한 동안 밖에 서 있으니까 슬슬 추워온다. 특히 얼음 동굴에 들어 갔을 때 바짝 마른 반팔의 강나연이 바로 내 앞에서 걸어 가는데 와들와들 사시나무 떨듯 한다. 할 수 없이 내가 기사도 정신을 발휘해 내 윗도리를 벗어 주었는데 이번엔 내가 떨기 시작한다. 동굴에서 나온 학생 중 추워서 입술이 새파래진 사람이 몇 명 보인다. 우리가 유럽을 떠나는 날 갑자기 날씨가 선선해지기 시작한다. 더위가 끝난 것이다. 내가 하늘을 보며 말했다. “누굴 놀리는 거요?”
5. 프랑스 바둑 약사(略史) 그러나 가장 큰 변화는 1969년에 한국인 임갑(林甲) 씨가 파리에 와서 "Le trait-d'union" 란 커피숍에서 제자들에게 바둑을 가르치기 시작한 일이다. 그는 한국에서 경기고등학교 독어 교사였는데 그 부인이 의사라 파리에 유학을 왔다고 나는 들었다. 임갑선생은 초기 프랑스 바둑인 전체의 스승이었다. 80이 넘은 지금도 그 분의 바둑에 대한 열정은 여전하다. 프랑스 바둑인은 누구나 임갑선생을 “Master Lim”이라고 칭한다. 1972에 첫 고등학교(Lycée Louis-le-grand)에 바둑클럽이 생긴다. 지도교사는 젬(Patrick Zemb). 73년에 들어와 ‘삼삼’이란 소책자가 발간되고 2~3월에는 64쪽의 첫 바둑 잡지가 격월지로 1년에 6번씩 출간을 시작한다. 프랑스 바둑계가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기 시작한 것이다. 이 해에 프랑스가 주최하는 첫 국제바둑대회가 Pentecost에서 열린다. 63명이 참가했는데 그 중 37명이 프랑스 사람이었다. 다음 해인 74년에는 에르베 디키(Hervé Dicky)란 사람이 “바둑의 ABC”를 출판하고 임갑선생이 “9점 접바둑”을 출간한다. 당시 프랑스에는 유단자가 15명에 이르고 바둑클럽이 다음과 같이 7군데 도시에서 운영된다(Paris, Clermont-Ferrand, Grenoble, Marseille, Nice, Langres and Reims). 75년에는 피에르 아루셰프(Pierre Aroutcheff)가 월간 과학지에 ‘프랑스 바둑 연대기(Chronicles of Go)를 싣는다. 76년에 프랑스 초대 챔피언인 메리쎄르(Patrick Merissert) 4단이 유럽 챔피언이 된다. 그러나 무슨 이유엔지 그는 바둑을 더 이상 두지 않게 된다. 이 자리를 메운 사람이 앙드레 무싸(André Moussa)다. 그는 13번이나 프랑스 챔피언을 지내며 1인자로 군림한다. 그는 세계대회에서 나를 처음으로 이긴 서양 바둑인이기도 했다. 그가 나에게 “Master Lim을 아느냐?”고 하길래 “안다’고 했더니 “He is my teacher”한다. 1978년에는 큰 사건이 많이 일어 난다. 프랑스 바둑협회(FGA)가 프랑스 바둑연맹(FGF)으로 확대 발전하고 22회 유럽 바둑대회(EGC)를 유치한다. 세느강 복판에 있는 씨테(Cité) 섬에 있는 씨테 대학교에서 개최되었는데 150 명이 참가한다. 이 대회에 네웨이핑을 비롯 3 명의 중국고수가 참가했다. 이 해 프랑스 챔피언 전이 처음으로 파리가 아닌 루엉(Rouen)에서 열렸다.
1979년에는 프랑스 바둑저널이 바둑연맹으로부터 독립하여 창간호를 내면서 프랑스의 14 개 클럽이 소개된다. 이 때 참가한 바둑협회 총무였던 랄로(J.P. Lalo)는 20년 이상을 이 저널을 위해 일하게 된다. 이 해에 도쿄에서 첫 세계대회가 열리는데 프랑스 대표로 제롬 위베르(Jérôme Hubert)가 출전한다. 프랑스 바둑 역사는 출판물의 발간과 함께 발전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81년에 이르러 프랑스 바둑연맹은 회원 300 명에 클럽 30개를 갖게 된다 81년 이후부터의 프랑스 바둑약사는 다음 편에 계속하겠다. 에피소드 하나. 1971년으로 돌아가서 제 1회 프랑스 챔피언 전이 열렸을 때 얘기다. 파스칼 레쎄(Pascal Reysset)와 르노 당쎄(Renaud Dancet) 간의 대국에서 르노가 한 수를 물렀다. 당시는 바둑 두다가 물리는 경우가 흔했고 둘 이는 친구라 그대로 바둑을 계속 두어 르노가 이겼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심판 텐(Tehn)은 그 결과를 무효로 하고 르노의 패배를 선언했다. 공식 바둑대회를 경험 못해본 프랑스 바둑인들에게는 당시에 이 사건이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한상대 전 시드니대학 교수 sdhahn@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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