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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이 어디 따로 있으랴

EBS바둑교실 1000회 녹화를 앞둔 양상국 9단

2010-03-17 오전 10:52:44 입력 / 2010-03-17 오전 11:23:58 수정


S#1. 4월 4일, 금자탑이 세워진다


바둑계에 또 하나의 경사가 들려온다. 요란하진 않아도 내용을 들여다보면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소식이다.
양상국(61) 九단이 진행해온 'EBS바둑교실'이 현재 997회를 기록 중이다. 1990년 12월 첫 방송 후 단 한 차례의 결방(缺放)도 없이 만 21년 동안 이어져와 오는 4월 4일이면 대망의 1000회를 맞는다. 바둑은 물론이고 웬만한 문화 프로그램을 통틀어도 흔치 않은 장수(長壽)일 것이다.
말이 이십 년으로 부르기 쉽지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그 기나긴 세월 동안 완벽한 개근으로 바둑 프로그램 시청자들과의 약속을 지킨 양상국 사범의 은근과 끈기는 백 번 박수를 쳐도 과하지 않으리라.
연말 바둑문화 시상식 같은 자리에서 꼭 성적 위주로 수상자를 정할 게 아니라 이런 보급의 공로를 높이 평가해준다면 얼마나 흐뭇할까?


▲ 문경에서 열린 STX배 문경조령컵에서.

양상국 사범은 뚝심의 사나이다.
최근 바둑의 메카로 거듭 나고 있는 경상북도 문경시의 경우 바로 양상국 9단이 20년 가까이 공들여 바둑문화를 보급한 도시라고 해도 무방하다.
단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그는 문경시를 방문해 크고 작은 시민바둑대회를 참관했다.
뿐만 아니라 1980년 5월 천호동에 강동기원을 차린 뒤로 현재(잠실)에 이르기까지 어린이들에게 바둑을 가르치고 있으며 성균관대 사회교육원 바둑학 강의를 14년째 지속하고 있으니 그 성실성에 입이 떡 벌어질 정도 아닌가?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80년대 세실 배를 만들어 16년을 지켰고 지송배 8년에 김성준배 5년을 주관했으며 일반 시민들을 위한 무료강의를 7년 가량 베풀었으니 이쯤 되면 양상국 사범은 보급의 황제라 칭해도 부끄럽지 않을 기록을 보유한 셈이다.
EBS 초창기 6~7년간은 바둑전문 채널 개국 전이어서 특히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고 했다. 새벽에 방송되는 요즘도 매주 고정 시청자 수가 1만 명이 넘는다니 EBS 시청률 확장에 지대한 공을 세운 공신일 것이다.


▲ 2008년 부경교류전에 참가한 양상국 9단.

"제가 음성이 좀 탁합니다. 술을 워낙 좋아해서 자리가 만들어지면 사양하지 않는 스타일인데 음주 뒷날이면 여지없이 목소리가 갈라지는 겁니다. 그래서 되도록 술자리를 피하고 등산을 시작했습니다. 녹화 전날이면 항상 산에 오릅니다. 운기조식하는 거죠. 하하하"

양 사범은 현역 프로기사들 중에서 가장 말이 빠른 해설자일 듯싶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는 당황하지 않고 논리정연하게 말을 잇는다.
두뇌의 탄창에 질서정연하게 언어의 실탄이 쌓여있는 것 같다.
입을 열면 발칸 포를 사격하듯 좌르르 말이 쏟아져 나온다.
표적을 겨누고 발사하는 사격이 아니라 아무렇게나 제압사격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의 언어들은 여지없이 타깃 쪽에 몰려가 파바박 꽂힌다.

필자는 여러 지방도시의 바둑축제 뒤풀이 자리에서 양 사범과 함께 한 적 있었다.
그런 자리에서 양 사범은 어김없이 MC본능을 발휘한다.
그가 고사성어와 한시를 섞어 음주의 도와 바둑의 이치를 풀어내기 시작하면 연방 폭소가 터진다.
자리를 마련한 지방의 초청자들과 금새 격의가 허물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그와 한 번 인연을 맺으면 중독이 되어 자꾸 부를 수밖에 없다.


S#2. 바둑 정승이라 부르고 싶다


"대국만큼이나 방송도 프로 정신이 필요합니다. 그게 제 신조지요."
그 프로 정신으로 21년을 지켜온 EBS 바둑교실이 앞으로 어디까지 달려갈지 궁금하다.
함께 진행하는 '파트너'도 21년간 수십 명이 거쳐 갔다.
이정원, 김효정, 현미진 등 여성 프로기사만 10명이 넘는다.
만화가 강철수씨, 전욱 변호사, 개그맨 엄용수씨 등과도 한때 호흡을 맞췄다.
현재 하호정 三단(사진 왼쪽)과 함께 진행하는 'EBS바둑교실'은 이달 28일부터 공중파에서 위성채널로 옮겨 방영될 예정. 같은 일요일이지만 시간도 오후 3시로 변경된다.

"매주 일요일 방송 분량을 월요일에 녹화합니다. 장인께서 별세하셨을 때도 녹화가 잡혀 발인을 지켜보지 못했습니다. 불효막심하지만 하늘의 장인께서도 사위의 입장을 헤아려주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또 언젠가 설날 녹차를 끓이다가 찻잔을 떨어뜨려 화상을 크게 입었지요. 병원에 입원할 정도였는데 진통제를 맞고 촬영한 적 있습니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지켜온 방송 프로그램이었다.


▲ 20년간 이어온 EBS바둑교실.

양상국 사범이 바둑을 접하게 된 것은 17세 때였다.
위로 형님 두 분이 바둑을 즐겨 두었는데 그 중 작은 형이 월남전에 참전한 상태에서 바둑세계 발행인과 국내 최초로 '서신대국'을 연출한 주인공이었다. 엽서에 한 수 씩 표기해두는 서신대국은 1964년부터 1967년까지 28수까지 진행됐다가 귀국해 종로의 운당여관에서 마무리되었다.
형님들 어깨너머로 바둑을 배우기 시작한 양상국은 6개월 만에 물1급에 도달했고 만 3년 동안 6회의 입단대회에 참가한 끝에 1970년 서봉수와 함께 프로면장을 받았다.

"그때 기세가 괜찮았지요. 입단리그전에서 일찌감치 7전 전승을 기록하고 입단을 확정해버렸습니다. 마지막 대국이 서봉수 사범과 잡혔었는데 승패에 관계없었습니다. 그 대국에서 패배해 둘이 나란히 7승 1패로 입단했지요. 하지만 제가 하루 먼저 확정됐기에 입단서열은 하루 앞섭니다. 하하하"

천하의 서봉수 명인보다 한발 앞설 정도로 쾌속행마를 선보였던 양상국은 1975년 왕위전, 국수전, 국기전 본선에 진출해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천하는 조훈현과 서봉수가 양분했고 뒤를 이어 도전 5강이 본선의 성문을 지키고 있어 정상의 꿈은 요원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성적이 떨어지더라고요. 절에 가서 공부도 많이 해봤습니다. 정말 바둑은 어려운 세계라는 걸 실감했지요."

그때부터 그는 보급 쪽으로 방향을 돌리고 전력투구했다.
바둑에 왕(王) 자를 붙여 명명된 타이틀이 많지만 양상국 사범은 왕위에 올라보지 못 했다.
그러나 꼭 왕위에 올라야 그 분야의 정상이란 법 있던가?
TV해설과 지방도시에 바둑을 보급하고 사회교육원 강사로 그만큼 뛰었으면 최소한 정1품 정승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으리라.
바둑대감 양상국, 필자는 그렇게 별명을 붙여드리고 싶다.


S#3. 바둑의 본질은 소통과 배려입니다


1949년생으로 벌써 환갑을 훌쩍 지났지만 양상국 사범의 발걸음은 언제나 가볍고 빠르다.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두말없이 달려가 바둑을 서비스한다.

"바둑은 소통이고 배려의 게임입니다. 혼자서 둘 수 없잖습니까? 흑과 백이 철학을 나누면서 기승전결의 스토리를 풀어가는 거죠."

그의 저서 [바둑의 길 삶의 길](나남출판사)을 펼치면 따뜻한 기운이 충만한 바둑 스토리가 가득하다.

"하수는 똑같은 잘못을 수없이 되풀이하면서도 복기를 싫어한다. 상수는 던지는 시기를 선택하고 하수는 숨통이 끊길 때까지 기다린다. 상수는 생각한 후에 돌을 잡고 하수는 돌을 잡고 생각한다."

그가 던지는 말들은 그대로 명언이 되어 독자의 뇌리에 벼락처럼 꽂힌다.
한국기원 기사회장을 역임했고, EBS바둑해설위원, 바둑TV해설위원, 한겨레신문 바둑칼럼 필자, 성균관대학 객원교수의 명함으로 동분서주하는 양상국 9단의 삶은 후학들에게 또 다른 이정표로 우뚝 설 것을 확신한다.

TYGEM / 김종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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