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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암신화] 바둑사관학교 ②

바둑계 최대 학맥 충암학원을 소개한다

2010-09-22 오전 9:26:09 입력 / 2010-09-22 오전 9:56:02 수정


▲ 1993년 충암학원 프로기사 100단 돌파 기념식에서 기사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는 조남철 국수.

S#1. 조남철 국수의 추억


충암고에 바둑부가 생기자 김수영 사범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바둑영재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로 선발된 학생이 바로 허장회(현재 9단)였습니다.
그는 원주고를 다니다 충암으로 전학 오게 됩니다.
지방학생이라 거처를 구하기 힘들어 이홍식 이사장은 자택 2층을 비워 기숙사 겸 연구실로 제공합니다.
그 방을 유창혁, 조대현, 김영환, 정현산 등 후배들이 대를 이어 사용했습니다.
영재들이 하나둘씩 모여들면서 김수영 사범은 스승인 조남철 국수를 초빙해 학생들에게 당대 최고수의 강의를 듣게 해주었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가까워진 조남철 국수와 이홍식 이사장은 술친구가 됩니다.

“그 무렵 김인 사범이 일본에서 돌아와 압도적인 실력으로 각 기전의 본선무대를 평정했지요. 그리고 도전자가 되어 조남철 국수를 압박했습니다. 불과 몇 년 만에 두 분의 입장이 바뀌게 됩니다. 언젠가 명동 세종호텔에서 도전기가 벌어져 저도 참관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당시 조남철 국수는 가죽점퍼를 입고 나왔더군요. 꼭 이겨야 할 대국에 그분은 꼭 그 옷을 입었습니다. 그만큼 의지가 강했던 거죠. 그런데 패배해서 타이틀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날 명동에서 위로의 술자리를 함께 했는데 무척 허탈해 하셨습니다. 이 땅에 바둑의 씨앗을 뿌리고 오래 정상에 군림했는데도 패배를 견디지 못하는 모습을 볼 때 승부사는 승부사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충암을 바둑사단으로 만든 조남철 국수와 김수영 9단. 이홍식 이사장으로 부터 감사패를 받고 있다.

그렇게 정을 쌓은 두 사람은 한국기원 기사파동 때 의기투합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조남철 국수가 충암고를 찾아왔습니다.

“기원 하나 만들어야겠는데 이사장께서 자금 좀 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조남철 국수가 자신의 집문서를 내밀었습니다.
누구한테 신세지기 싫어하는 국수가 그 정도로 절박하게 부탁하는데 깊은 사연이 있겠다 싶어 이홍식 이사장은 두말하지 않고 1천만원을 건넸습니다.
70년대 초반에 그 금액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환산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조남철 국수의 진정성을 믿고 이홍식 이사장은 적극 후원했습니다.
조 국수는 곧바로 대한기원을 만들었고 입단대회를 충암고에서 열었습니다.
오래 가지 않아 기사파동이 마무리됐고 조남철 국수는 빌린 돈을 깔끔하게 갚았다고 합니다.
자신의 집을 잡혀서라도 바둑계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조남철 국수와 의리 하나로 거금을 빌려준 이홍식 이사장의 관계가 참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더 나아가 1982년 이홍식 충암 이사장은 한국기원 이사장직을 맡아 바둑계의 살림을 꾸리게 됩니다.



▲ 허장회 9단.

S#2. 꿈에서도 바둑을 둔 허장회


충암 출신 1호 바둑특기생은 허장회였습니다.
학생 허장회는 기력도 강했지만 바둑에 대한 열정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하루 10시간 이상 바둑을 연구했는데 늘 자세가 바르고 오직 바둑 외엔 한눈을 팔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사장이 퇴근해서 2층을 둘러보면 항상 허장회는 바둑판과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밥 먹고 화장실 가는 시간 말고는 바둑판과 함께 붙어 있었습니다.

“잘 되니?” “어제 꿈에서 바둑을 두었는데요. 귀신처럼 끝내기를 잘해 이기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바둑판에 재현해보려는데 그게 잘 안되네요.”

그렇게 대답하는 허장회의 머릿속에는 온통 바둑만 들어있었던 모양입니다.
이사장이 대견해서 영화 관람을 시켜주겠다고 했습니다.



“너무 방안에 박혀 있어도 좋을 게 없어. 모처럼 모두 나가서 영화나 한 편 보고 오자.”

그 때 나이에 영화라면 혹할 만도 할 텐데 허장회는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습니다.

“이사장님, 며칠 후면 중요한 대국이 있는데 저는 다음에 영화를 보면 안 될까요?”
“안 될 거야 없지. 네가 힘들까봐 걱정돼서 그래.”
“전 바둑 두는 게 가장 재미있습니다.”


▲ 허장회 9단이 김종서 작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참 의젓한 학생이죠?
그 학생 허장회는 바둑 한 길에 매진해 1977년 입단하고 1983년 바둑문화상 신예기사상을 수상했으며 각종기전 본선멤버로 활약하다 현재 허장회 바둑도장을 운영하며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충암 바둑특기생 1호 출신으로 100여명에 달하는 충암출신 프로기사들의 좌장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충암고 3회인 허장회 사범을 필두로 4회 정수현 9단, 6회 문용직 5단, 11회 양재호 9단을 비롯해 최규병, 김성래, 유창혁, 김영환 등 기사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바둑보급에 열과 성을 바치고 있습니다.


▲ 이창호 9단과 김성룡 9단의 훈련 모습.

S#3. 한 가지만 잘하면 된다

바둑사관학교로 통하는 충암학원은 초,중,고 모두 바둑특기생을 두고 있습니다.
지금은 과거처럼 숙소가 없고 바둑특기생들의 경우 학적만 두고 학교 밖에서 바둑에 몰입하는 시스템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학맥의 농도가 다소 희석됐다는 말도 나오고 있습니다.
아예 진학을 포기하고 바둑에 올인하는 바둑영재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교육을 중시하는 우리나라의 정서로 볼 때 최소한 고등학교 교육까지는 기본으로 마칠 필요도 있지요.
학교 앞 이사장의 자택을 숙소삼아 바둑공부를 하던 시절은 어느덧 까마득한 옛날의 추억이 되었습니다.
충암고 23회 이창호 24회 김성룡, 양건, 윤성현 세대까지 오전 수업 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충암고 야구부.

야구부 학생들과 바둑부 학생들은 오전 수업을 받고 자신의 특기에 따라 공부를 하는 방식이죠.
그러나 당시 이창호는 이미 정상에 오른 기사였습니다.
그때 학교에서 과감하게 특기학생들의 수업을 파격적으로 조정합니다.
일체 수업을 듣지 않아도 되고 시험을 보지 않아도 되는 방식이죠.
교육계에서 우려의 소리가 높았습니다.

“청소년기에 최소한의 학업이 필요한 것 아니냐?”


▲ 300단 돌파 기념식에서 이홍식 이사장과 이창호 9단.

그러나 이홍식 이사장이 단호하게 주장합니다.

“수업 때문에 학교 오가느라 많은 시간을 뺏기면 비능률적입니다. 수업시간에 배우지 못하는 것들은 독학으로 익히면 되고, 제도권 교육은 초등학교로 충분해요. 한 가지만 잘 하면 됩니다.”

그런 배려로 이창호 이후 세대들은 학교대신 [충암연구회]에 나가면서 바둑에 전념할 수 있게 됐다고 합니다.
송아지띠 삼총사인 최철한, 박영훈, 원성진 등이 그런 시스템 속에서 고교를 졸업했고 바둑에 집중해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지요.
그런 방식의 진학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개를 갸웃하실 분들도 있겠지만 그에 대한 답은 충암 출신 프로기사들에게 들어보면 간명하게 나옵니다.
필자가 만난 충암사단 기사들은 대부분 긍정적이었거든요.


                        ▲ 이홍식 이사장의 최근 모습.

‘나무의 완성은 거목이 아니라 숲이다.’
이 말은 음미할수록 아하! 감탄하게 됩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걸출한 신(神)과 영웅들을 보면 각각의 능력이 대단하지만 독립적으로 우뚝 서지 않고 모두 어우러져 장대한 신화를 구성합니다.
우리 바둑계도 우람한 거목들이 시대와 함께 계보를 잇고 있습니다만 결국은 한국바둑이란 숲을 이뤄 위용을 떨쳤습니다.
충암의 바둑학맥도 같은 이유에서 하나의 숲으로 바라봅니다.

내일 9월 23일은 제3화 : 충암대연구 편이 소개됩니다. 어제 예고한 에피소드 타이틀이 바뀌었음을 양해바랍니다.
TYGEM / 김종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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