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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암신화] 비장의 충암대연구 ③

바둑계 최대 학맥 충암학원을 소개한다

2010-09-23 오전 11:21:05 입력 / 2010-09-23 오전 11:50:56 수정


▲ 인터뷰를 하고 있는 유창혁 9단.

S#1. 일지매 유창혁의 학창시절

한국바둑의 황금기는 1989년 잉창치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 우승과 함께 시작됩니다.
그 깃발을 든 주인공은 70~80년대 초반 국내 타이틀을 휩쓸었던 조훈현 9단이었지요. 그러나 조9단이 잉씨배를 차지할 무렵에는 제자 이창호에게 1인자의 자리를 내주고 있었습니다.
조.이 사제가 투톱으로 맹활약하고 유창혁, 서봉수가 가세하면서 공포의 한국 4인방이 구성됩니다.
사제 투톱이 체계적인 바둑수업을 했던 것에 비해 유창혁, 서봉수 9단은 스스로 일어선 야생바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유창혁 9단은 초등학생 시절 어린이 국수전을 3연패하고 1984년 세계아마추어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바둑계의 주목을 받았던 천재였습니다.
그 화사한 천재가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춥니다.
중학생 시절 3년 동안 바둑판을 등진 것입니다. 가정환경과 진로에 대한 고민이 엉켜 3년을 진공상태로 보내게 됩니다.
그래도 항상 마음속에 19로가 어른거려 유창혁은 바둑명문 충암으로 진학합니다.
당시 집이 경기도 시흥이었는데 두 시간씩 버스를 타고 등교해 수업을 받았습니다.
충암에서 다시 바둑 친구들과 만나 기력을 재보니 과거에 상대도 되지 않았던 상대들이 일취월장해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바둑부 교실에서 또래 친구들과 연구하는 시간은 즐거웠습니다.
선배이자 교관인 허장회 사범이 두 눈 부릅뜨고 바둑부를 지켰지만 호기심 가득한 바둑부원들은 감시의 눈을 피해 학교 근처의 영화관(도원, 신영극장)을 찾아가 동시 상영되는 영화를 감상했다고 하네요.

“하하하, 많이 놀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탈도 꼭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교실에 틀어박혀 바둑만 두라고 했다면 견디기 힘들었을 테니까요.”


▲ 이홍식 이사장.

그는 고2때 입단해 이홍식 이사장의 자택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유창혁이 가장 기억나는 학생이었습니다. 공부도 열심히 했고, 바둑의 발상이 아주 신선했지요. 뭐랄까? 옹졸하지 않고 의연하면서도 유연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식사시간에도 꼭 ‘잘 먹겠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이렇게 인사를 합니다. 식사 후에 그릇과 수저를 개수대에 가져가 담가놓곤 했어요. 또 함께 생활하는 후배들을 잘 챙겼습니다. 예의 바르고 정과 의리가 넘치는 학생이었습니다.”

이홍식 이사장은 아직도 유창혁 9단의 팬이라고 강조합니다.
프로기사가 된 이후에도 유창혁은 김영환, 정현산, 이재일, 장성계 등이 함께 2층에 합숙하며 꿈 많은 고교시절을 응암동에서 보냈습니다.


S#2. 충암연구회, 시간을 단축하다

프로기사를 많이 배출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지만 충암의 이름이 바둑으로 통하는 진정한 이유는 바로 ‘충암연구회’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바둑이 80년대부터 세계를 주름잡은 데는 바둑 인프라가 빈약하고 허리층이 약한데도 불구하고 걸출한 천재들이 계속 출현해 대를 이어 배턴을 주고받았기에 가능했다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한국바둑의 힘이 전체적으로 강해진 것은 80년대 후반 젊은 프로기사들의 공동연구에서 비롯됐다는 게 정설입니다.
1988년 바둑올림픽이라는 잉창치배와 후지쯔배가 만들어지면서 바야흐로 바둑의 세계화가 시작됩니다.
이때 충암출신 최규병 사범이 군에서 전역하고 관철동에 돌아왔습니다.
당시 한국기원은 아주 비좁아 기사실에서 따로 공부할 공간이 부족했지요.
한국기원 이사장까지 지냈던 충암고 이홍식 이사장이 그를 보다 못해 제자들에게 연구 공간을 마련해주었습니다.
대부 격인 허장회 사범을 주축으로 최규병, 양재호, 유창혁, 김승준 등이 모여 ‘충암연구회’를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최강 이창호까지 가세하면서 연구회는 강한 추진력을 얻게 되지요.
이들은 많은 시간을 함께 하며 머리를 맞대고 신 포석과 이후의 변화를 집중 연구합니다.
그때까지 세계최강이라던 일본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시스템이었습니다.
각 도장 문하를 중심으로 폐쇄적인 일본에서는 비장의 기술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당시 우리바둑계에서도 꽤 많은 연구회가 있었지만 정보공유는 활발하게 이뤄지지 않았던 상태였지요.
또 위계질서를 중시해 선배의 복기 검토에 후배들이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풍토였습니다.

“그때 참 답답했습니다. 진리를 논하고 능률적인 수를 논하는데 선후배가 중요한 건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반론을 내놓으면 버릇없는 후배로 매도당하기 일쑤였습니다. 저도 욕을 많이 먹었지요.”



자유인 유창혁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충암 동문들로 구성된 연구회는 아주 자유로웠습니다.
이미 이창호, 유창혁 등의 후배세대들이 정상급이었기 때문에 바둑에 관해서는 위계질서를 따질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 연구회의 분위기가 많은 청년들을 끌어들였습니다.
아직 입단하지 못한 원생들도 연구회에서는 자유롭게 의견을 발표했고 타당하면 선배들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충암연구회는 진정한 양산박이 되어 강호의 고수들이 즐비하게 모인 겁니다.
이창호의 부동심과 유창혁의 공격전법이 연구회 멤버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면서 한국바둑 젊은 층의 기력이 보이지 않게 상승했습니다.



“실제로 저도 세계대회 나가기 전에 충암연구회를 통해 비장의 훈련을 했습니다. 거기서 연구한 수를 바탕으로 재미를 좀 보았지요. 하하하.”

유창혁 9단이 후지쯔, 잉씨, 삼성화재, 춘란, 엘지 등을 차례로 석권하며 세계대회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것도 충암연구회의 덕이 크다고 하네요.
충암연구회를 통해 분석된 자료들은 기록을 맡은 김성룡 9단을 통해 [충암대연구]란 책으로 발간되었습니다.
중국과 일본에서 그 자료들을 입수하게 위해 촉각을 곤두세웠다는 해프닝을 여러분들께서도 들으셨을 겁니다.
아무튼 함께 공유하고 나누는 충암연구회의 미덕이 우리 바둑을 한 점쯤 향상시켰다는 주장에 필자는 이견을 달고 싶지 않습니다.


▲ 학교 내에 있는 충암학원의 설립자 이인관 선생의 동상.


S#3. 신화의 완성을 위하여

80년대 후반에 만들어진 충암연구회는 현재 소소회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한국기원 건물 뒤쪽에 위치한 소소회 연구실은 50평 정도로 아주 넓고 쾌적합니다.
거기 가면 요즘 성적을 내는 젊은 기사들이 거의 다 모여 있습니다.
인터넷 환경도 괜찮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오늘 두었던 자신들의 대국을 복기하는 장면도 보기 좋습니다.

“관철동 시절에 젊은 기사들은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충암연구회가 만들어진 뒤로는 늘 그 방에 머물렀지요.”

유창혁 9단이 과거를 회상하며 미소짓습니다.
이창호, 유창혁 투톱이 세계대회에 자주 출전하면서 바빠지자 충암연구회의 구성에 변화가 생깁니다.
충암연구회란 간판이 붙어 충암을 나오지 않은 후배기사들이 소외감을 느낄까 싶어 소소회로 개명을 했고, 젊은 기사들이라면 누구나 들어와 함께 연구할 수 있는 모임으로 바뀌었습니다.

충암연구회에서 기록을 맡았고 소소회 회장을 지냈으며 직설과 유머러스한 화술로 많은 팬을 확보한 김성룡 9단은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 최근 소소회는 바둑연구 뿐만 아니라 보육시설 등에 봉사활동도하며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충암고는 한국바둑의 디딤돌입니다. 바둑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언제부턴가 우리 바둑계에 ‘천재 만들기’ 열풍이 불고 있잖습니까? 전국의 수많은 바둑교실과 도장들이 앞 다퉈 바둑에 재능 있는 아이들을 다짜고짜 바둑에 올인시키고 봅니다. 공부고 뭐고 돌아보지 않은 채 하루에 열 시간 이상 바둑만 집중 교육시킵니다. 물론 반짝 성과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둑계의 경제는 아직도 열악합니다. 이창호 같은 성취를 이루기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습니다. 최상위층에 도달하지 않으면 막말로 밥 먹고 살기 힘듭니다. 그런데 여기저기서 천재를 양성하다 보면 훗날 어떤 문제가 생기겠습니까? 그래서 기본적으로 학교교육도 필요하다는 겁니다. 최소한 고등학교까지는 나와야 한다고 저는 주장합니다. 바둑을 넘어 사람 사는 사회에 언제든지 적응하려면 어느 정도는 배워야 하지 않겠어요?”

김성룡 9단의 주장에 바둑 명문 충암의 존재이유가 어느 정도 설명되지 않나 싶습니다.


▲ 김종서 작가와 이홍식 이사장.

한국 바둑의 대부 조남철 국수로부터 바둑을 배운 김수영 사범이 동네에 위치한 학교 충암을 찾아가 바둑부 창설을 권유했습니다.
이홍식 이사장이 흔쾌하게 바둑특기생을 받아들여 장학금을 주고 자택을 숙소 겸 연구실로 제공하고, 수업 편의를 봐줍니다.
충암 출신 프로기사들이 연구회를 만들어 공동으로 바둑의 진리를 발굴합니다.
그 모임에 많은 바둑청년들이 가세해 힘이 더해집니다.
그리고 엄청난 정보가 축적되고 알려지면서 후배들은 과거보다 훨씬 능률적으로 수의 가치와 비밀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한국바둑의 저변이 넓어지고 국제무대에서 강국으로 대접받게 됩니다.
논리가 자꾸 비약합니다만 충암학원의 바둑사랑이 우리 바둑에 아주 풍성한 자양분을 제공해주었다는 점 간과할 수 없을 것입니다.


▲ 충암중고등학교 전경.

타이젬스페셜은 바둑계의 은인들을 찾아 떠나는 여행입니다.
이붕 김영성, 낭만기객 권재룡 박사, 덕영 이재윤, 충암학원의 이홍식 이사장까지 소개해드렸습니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논란이 많아 접근하기 어렵고 표현하기 힘든 이후락, 김우중 전 대우회장에 관한 이야기도 바둑사적인 측면에서만 조명해보고 싶기도 합니다.

즐거운 한가위되시길.
TYGEM / 김종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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