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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맨, 석양에 돌아오다

- 수유리에 바둑연구실을 차린 김철중 3단

2011-07-28 오전 9:33:03 입력 / 2011-07-28 오후 7:29:49 수정

▲ 전설의 총잡이 김철중.  

S#1. 전설의 총잡이

관철동 시절. 길다란 장발 머리에 검은 재킷과 바지를 폼나게 맞춰 입고 기원을 드나들었던 청년이 있었다.
부드러운 미소의 눈 꼬리가 한없이 사람 좋아 보이지만 반상에 마주앉으면 서부의 무법자로 변해 가차 없이 권총 방아쇠를 당겨대는 사나이.
특히 하수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어서 어지간한 프로기사들보다 한두 점 더 접고 둔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아마추어지만 프로만큼 유명했던 스트리트 파이터 김철중.

그 시절 그에게 매료된 홍시범 A7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관철동에서 그 분을 처음 봤을 때 마치 영화 속 주인공처럼 다가 왔습니다. 진짜 승부사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아들에게 청 커버와 청바지로 의상설정을 해주었지요.”


▲ 김철중.

프로기사 김철중 3단을 기억하는 이들은 대개 ‘댄디보이’로 기억한다.
패셔너블하고 매너가 깔끔하다.
지갑이 텅 비어야 귀가한다.
내기바둑의 승률이 상상을 초월한다.
노래 실력이 가수 급이다.
다 맞는 이야기다.
필자는 단 하루에 그 모든 평판을 겪어봤으니까.^^

▲ 김철중(왼쪽)과 부산바둑협회 백승이 전무.

어느 주말에 우연히 부산바둑협회 백승이 전무로부터 기별이 왔다.
수유리에 있는데 당장 달려오라는 거였다.
밤 11시의 호출이 뜬금없었지만 취재차 부산에 가면 밤낮 가리지 않고 동행해주는 백전무의 의리를 생각해서 달려갔다.

▲ 왼쪽부터 하늘문 문주, 김철중, 김희중.

네비게이션의 주소검색에 따라 차를 세운 곳이 바로 김철중 바둑연구실.
전설의 김철중 사범을 그 심야에 만난 것이다.
그들은 하늘문 동호회 정기모임 때문에 하루 전날 만나 회포를 풀고 있었다.
처음 대면하는 자리였지만 서로 익히 알고 있던 터라 금방 대화의 물꼬가 터졌다.
아니, 너무 궁금한 게 많아서 다짜고짜 질문세례를 던졌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꼬박꼬박 대답했다.
일정 기간 동안의 부재(不在)와 행로(行路)의 모호함에 관해 담백하게 고백해주었다.
“저 말고도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실 텐데 갑작스럽지만 공식 인터뷰를 청해도 괜찮겠습니까?”
“그거야 뭐, 상관없습니다.”
바둑매체 타이젬의 공식인터뷰라고 거듭 강조했는데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아슬아슬한 수위의 고백을 꾸미지 않고 털어놓기 시작했다.
정제되지 않은 육성으로 소개되면 파장이 만만치 않을 수준의 사생활 비하인드 스토리인데 너무 진솔한 거였다.
소설로 구성해도 흥미진진한 그의 승부세계는 언젠가 기회가 닿을 때 소개하기로 미룬다. 

그러나 한때 아마추어 최고봉에 장기간 군림하고 프로에 입단해서도 괄목할 만한 성적을 냈던 김철중 3단이 왜 한동안 뜸했는지에 관해서는 그의 고백 한 마디로 여운을 남기고자 한다.
“바둑에 전념하지 못하고 다른 데 한 눈을 팔았습니다. 프로답지 못했던 거죠.”

▲ 김희중과 옛 시절을 이야기하고 있는 김철중(왼쪽).

S#2. 영원한 아마 국수 김철중

김철중은 아마바둑계의 황제로 80년대를 주름잡았었다.
1981년 오규철을 꺾고 국수에 등극한 뒤 1982년 2연패, 그리고 1983년에는 유창혁에게 자리를 내주었다가 1984년과 1985년 다시 2연패에 성공했다.
게다가 1987년에도 다섯 번째로 국수에 올랐으며 통산 15개 타이틀을 획득해 80년대 아마 최고수로 통하며 세계 바둑선수권대회에도 계속 출전했다.

1955년생인 김철중은 충남에서 태어나 서울 효창동에서 자랐다.
중1때 바둑을 배웠는데 용산 쪽 기원을 출입하며 1년 만에 1급에 도달했다.
어느 정도 기리를 깨우쳤다 싶을 때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바둑을 놓았다.
2년 정도 바둑을 쉬었는데 희한하게도 다시 돌을 쥐었을 때 바둑이 늘어 있었다.

▲ 김철중이 필자에게 접바둑 강의를 하고 있다.

그리고 20대 청년이 되면서 그는 내기바둑의 세계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기력이 강하지 않았으나 버티는 근성이 좋고 한 번 겪어본 상대에게 좀처럼 지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내기바둑의 승률이 높아지는 것과 비례해서 치수가 불리해지기 시작했다.
그와의 대결을 두려워한 상대들이 자꾸 유리한 치수를 주장한 것이다.
승부를 보기 위해서는 치수의 벽을 넘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집중력이 생겼고 접바둑의 노하우가 쌓였다.
그래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터무니없는 치수로 접바둑을 둘 때가 많았다.
그래도 처음에 몇 판 지다가 이기는 길을 찾아내 역전하곤 했다.
그때 주머니가 늘 두둑했다.
바둑동네에서 함께 어울리는 친구와 후배들에게 기꺼이 용돈도 나눠주고 술도 샀다.
통음하고 뻗고 속을 풀고 바둑 두고, 그런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프로 입단에 큰 미련은 갖지 않았다.
왠지 바둑 말고 더 괜찮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바둑은 그냥 게임의 취미 정도로 즐기고 싶을 뿐이었다.
전성기 시절에 독하게 맘먹고 정진했더라면 20대 중반에라도 언제든지 입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바둑 친구와 후배들이 차례로 입단할 때도 그는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렇게 마음을 정하지 못하다가 마지막 일반인 입단대회를 앞두고 때를 놓치면 영원히 재야에 묻힐 것 같아 출전했고 1990년 36세의 늦깎이로 프로 면장을 받았다.

프로가 된 후 김철중은 고단자 킬러로 악명을 떨치며 본선무대를 드나들었다.
1992년 동양증권배 본선, 1993년에도 동양증권배와 명인전 제왕전 본선 멤버로 활약했으며, 1995년에는 롯데배 한중대항전 대표로 선발되었다.
큰물에서도 유유히 역영(力泳)하던 그가 어느 순간 본선무대에서 자취를 감주고 바둑 팬들의 시야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 젊은 시절을 회상 중인 김철중.

김철중 3단은 이렇게 고백한다.
“2단으로 동양증권배 도전자결정전에 진출했었습니다. 이창호와 1:1로 한판씩 주고받은 상태에서 3국을 패배했습니다. 맥이 쫙 빠지더군요. 뭐랄까 단순한 한 판의 패배라기보다 삶의 생기가 빠져나가버리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승부사들에게는 그런 고비가 있거든요. 그 한 판이 분수령이었습니다. 만약 그 승부에서 이겼더라면 운명이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 거라고 봐요. 그때의 좌절감이 무척 오래 지속됐습니다. 바둑에 대한 집중력을 상실하고 다른 쪽을 기웃거리기 시작했습니다. 20대에 방황했던 것처럼 운명의 나침반 바늘이 마구 흔들렸어요.”

고해성사 하듯 그는 방황기의 에피소드를 생각나는 대로 들려주었다.
필자는 그 스토리를 차마 전할 수 없다.
붉고 뜨겁고 쓸쓸하며 처절한 한 사나이의 행로를 이 지면으로는 도저히 전할 자신이 없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필자는 김철중 3단의 솔직담백한 스타일에서 또 다른 승부사의 호흡을 느낀다.
인터뷰라면 누구나 자랑거리를 주워 올리기 쉬운데 그는 훈장의 영광보다 아픈 환부를 먼저 보여주고 있었다.
깨달음이거나 아니면 선언의 의미로 읽힌다.
그래서 울컥 손을 쥐고 싶었다.

▲ 라이브까페 앞에서 한 컷.

S#3. 그는 노래한다

그의 연구실 바로 위층에 라이브 카페가 있었다.
가끔 올라가서 목을 푼다고 했다.
노래를 청하니 군소리 없이 발길을 옮긴다.
정확한 음정과 박자, 절제를 잃지 않으면서도 리듬을 타는 몸짓.
가수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실력이었다.
선곡도 장르를 넘나들고 심지어 박진영의 '허니'까지 소화해냈다.
마이크를 잡은 그의 표정은 즐거워 보였다.

알고 보니 집안 내력이 화려했다.
누나가 씨름대회 출연으로 유명한 김중자 무용단장이고, 동생 김달중은 보컬리스트다.
어머니가 왕년에 악극단을 이끌고 전국 순회공연을 다녔다 하니 김철중 3단의 혈액 속에 광대의 인자가 흐르고 있었던 것.

“이제 바둑 팬들에게 얼굴을 자주 보여주세요.”
청풍명월 바둑가요제에 출연 요청을 했더니 흔쾌히 응했다.
아울러 동호회원정대 출연까지 약속했다.

▲ 김철중(오른쪽)과 그의 애제자.

“결국 내 길은 바둑이었습니다. 차음부터 정해져 있는 길인데 한사코 부정하고 싶은 뭔가가 마음속에 있었나 봐요. 입단할 때도 그랬고, 중년이 되어서도 자꾸 엇나갔으니까요. 이제 바둑에 진 빚을 좀 갚아보고 싶습니다. 수유리에 연구실을 차리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이 부근의 바둑지망생들도 가르치고 생활이 어려운데 기재가 있는 아이들은 내제자로 키워보고 싶습니다. 또 아마추어 동호인들께도 언제든지 연구실을 제공해드리고 싶습니다. 타이젬 회원들 중에서 수유리 쪽 들를 기회 있으시면 놀러 오십시오.”

어쩐지 자주 만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드는 사나이.
김철중 사범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뭔가 가슴이 묵직했다.
예전에 월간 바둑 지를 통해 접했던 날카로운 청년 승부사 김철중의 이미지, 동네 기원을 통해 들었던 접바둑의 달인 김철중의 전설을 나는 방금 접하고 나온 것이다.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
그것은 아마도 십 년 가까이 우리들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이름.
그 사이 우여곡절을 겪었을 승부사에 대한 호기심.
그러나 다시 돌아와 건재를 선언한 그에 대한 반가움이 혼재된 감정이었다.
흘러간 추억은 아름답다.
추억이 아름다운 이는 더 아름다운 추억을 빚을 수 있다.
석양에 돌아온 건맨 김철중 사범의 새 출발을 축하하며 타이젬 회원들의 친근한 바둑 멘토로 활동해주시길 부탁드리고 싶다.
TYGEM / 김종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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