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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자도 세 자매의 바둑 스토리

2011-08-17 오전 9:39:55 입력 / 2011-08-17 오전 11:49:59 수정

(사진출처- 네이버)

S#1. 인연의 실마리

오늘은 시원한 바다로 여러분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수채화 같은 남해 청정해역 추자도를 배경으로 피어난 한 편의 바둑 환타지를 들려 드릴까합니다.


▲ 청풍명월에서 춤을 추는 세 자매.

7월 제천의 청풍명월 바둑축제에서 필자는 '바둑가요제'를 맡았습니다.
출연신청 마감을 앞둔 시점에서 한 소녀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뒤늦게 소식을 들었는데 꼭 참가하고 싶어요.”
세 자매로 이뤄진 팀이란 설명을 듣고 명단 마지막에 올렸습니다.
가요제에서 아주 깜찍한 춤을 추었던 세 자매 원생들을 기억하시는 분들 많으실 겁니다.

그런데 가요제 시상식 때 자매 팀은 상을 받지 못 했습니다.
상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어린 학생들에게는 사기를 북돋아주는 동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배려해 주는 게 옳았지요.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해서 따로 조그만 선물과 편지를 적어 건넸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전화를 걸었더니 세 자매는 부모와 함께 완도로 가고 있었습니다.
“가족 피서를 가시나요?”
“아닙니다. 집에 내려가는 중입니다. 저희는 추자도에 살거든요.”

그 순간 전류 한 줄기가 등골을 거슬러 올라 머리를 뒤흔들었지요.
“아아! 언젠가 박성균 사범님을 소개할 때 언급했던 그 아이들이로군요?”
“맞습니다. 저희도 그래서 작가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집이 추자도인데 어떻게 바둑을 배우죠?”
“셋 다 이세돌 바둑도장을 다닙니다. 서울로 유학을 보낸 거죠.”
“우와, 대단합니다. 그러면 지금은 방학이라 추자도에 가는 거로군요.”
“네에. 섬 아이들이니까 바닷바람을 좀 쐬게 해줘야죠.”

그때부터 그 아이들의 모습이 뇌리에 필름처럼 돌아가기 시작했지요.
도대체 그 머나먼 남쪽 섬에 사는 아이들이 어떻게 바둑을 배우게 됐으며 세 자매가 나란히 프로 입단을 꿈꿀 수 있는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 추자도.

S#2. 낙원과 가장 가까운 곳

추자도로 가려면 제주까지 항공편으로 간 다음 훼리를 타야 합니다.
여름휴가철이라 항공권 예약하기가 어려웠고, 때마침 추자도 참굴비 축제가 시작돼 선박의 좌석도 가득 차 있었습니다.
세 자매가 사는 곳은 추자도 항구에서도 가장 멀리 떨어진 하추자도 남쪽 바닷가였습니다.

▲ 세 자매의 추자도집.

무슨 요새처럼 보이는 저 건물이 바로 세 자매의 집입니다.
오래 전 자매의 부모들이 전복 양식을 위해 추자도에 들어와 지었습니다.
앞마당이 바로 바다입니다.

▲ 세 자매의 뒷모습.

그 집은 갯바위가 담장이고 바다가 마당입니다.
수평선에 바다낚시터로 유명한 사자 섬이 보입니다.
날씨가 좋은 날은 제주도가 보이고 밤이면 어선들의 집어등이 성좌처럼 빛난다고 합니다.

▲ "우리집 앞 바다는 세 자매의 전용 놀이터에요."

아이들은 하루 종일 바다에서 물놀이를 합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한적한 곳이라 전용 해수욕장이죠.
이런 쾌적한 환경에서 자란 까닭에 세 자매의 성격은 무척 활달하고 구김살이 없습니다.


▲ 세 자매의 어머니가 손수 차린 밥상.

아이들과 바다에서 놀다 들어오니 휘황찬란한 밥상이 차려져 있었습니다.
합자(자연산 홍합) 부침개와 굴비구이.
소라물회와 게우젓(전복내장).
그리고 싱싱한 삼치회까지 모두 추자도에서 채취한 해물입니다.


▲ 하추자도 신양분교교.

세 자매가 다녔던 하추자도 신양분교교입니다.
아담하지만 운동장에 천연잔디가 깔려있어 참 아름다웠습니다.

▲ (왼쪽부터) 둘째 이유민, 첫째 이유경, 셋째 이시연.

유경이는 이 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서울로 올라와 선린고등학교(2학년)를 다닙니다.
유민이는 충암중학교 3학년입니다.
막내 시연이는 아직도 이 분교에 적을 두고 있습니다.


▲ 아이들과 필자.

잔디밭에 동그랗게 앉아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너희들 공부는 잘 했니?”
“그럼요. 전교 1등 2등을 도맡아 했어요.”
“오오! 대단하구나. 전교생이 몇 명이었는데?”
“호호 일곱 명이요!”
그렇게 대답하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립니다.

▲ 빈 교실을 들여다보는 막내 시연이.

막내 시연이는 프로기사가 되면 꼭 추자도에 다시 내려와 섬 아이들에게 바둑을 가르치고 싶다고 했습니다.
아직 어리기에 더 없이 소박한 꿈이지요.
그러나 그런 마음의 바탕이 성취의 동기가 되는 법입니다.
시연이가 그런 꿈을 간직한 이유는 그 자신도 어느 날 추자도를 찾아온 바둑선생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S#3. 인연의 고리

6년 전 어느 날 추자도 면사무소 문화센터에 바둑 과목이 생겼습니다.
여행 차 추자도에 들렀던 박성균 아마 7단이 섬 아이들을 위해 잠시 정착해 바둑을 가르치기로 결심했습니다.
박성균 7단은 필자가 타이젬 인물포커스 코너에 2009년 9월 28일 소개한 적 있습니다.


☞ [나그네는 길에서 쉬지 않는다] 바로가기

박7단은 고양시, 홍천, 인제, 태백, 증평, 지리산, 서광사 등 전국 각지를 돌며 오지의 어린이들에게 바둑의 씨앗을 뿌린 방랑기객입니다.
지금은 대구 어딘가에서 전통가옥을 짓고 있다네요.

박 7단이 추자도에 왔을 때 세 자매와 인연을 맺은 겁니다.
아이들은 유달리 바둑에 흥미를 느끼며 열심히 배웠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사부가 섬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자 부모는 아이들을 위해 서울로 바둑 유학을 보냅니다.

바둑교실에 보낼 수준의 아이들인데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몰라 인터넷 검색으로 바둑도장을 찾았다고 하네요.^^
그랬더니 이세돌 도장이 떴고 전화로 연락해 입문을 간청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알다시피 이세돌 이상훈 이세나 남매는 신안군 비금도 출신입니다.

그들에게 추자도 세 자매의 사연은 예사롭지 않았겠지요.
당시 6학년의 유경이, 5학년의 유민이, 그리고 유치원생이던 시연이는 가방 하나씩 메고 서울의 이세돌 도장으로 올라오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씩씩하게 바둑을 공부해 타이젬 기력으로 각각 7단, 6단, 5단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 기력은 나이순대로 차이가 나지만 막내의 가능성이 가장 높은 셈이다.

섬을 찾아온 나그네 사부와 같은 섬 출신 이세돌 도장의 인연이 참 흥미롭지 않습니까?
그러나 세 자매가 바둑의 길로 접어들게 된 배경에 유전자의 비밀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할아버지가 제주도에서 소문난 바둑 광이었던 겁니다.
제주도의 의사였던 이동일 원장(87세)이 자매들의 할아버지입니다.

이 원장은 까마득한 시절부터 제주도의 바둑 고수들을 한 달에 한 번씩 집으로 초대해 바둑대회를 열었다고 합니다.
그 바람에 자매들의 어머니이자 이 원장의 며느리인 이정란(44세)씨가 제주도로 시집와서 바둑 손님들의 수발을 드느라 고생했다고 합니다.

▲ 할아버지가 물려준 바둑판을 설명하는 이태협씨.

▲ 바둑판의 휘호.

할아버지의 바둑유전자가 마치 소설처럼 손녀들에 이르러 돌출한 것이지요.


▲ 가족들.

S#4. 사랑의 힘을 믿고 싶습니다

“추자도에 살게 된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거기서 바둑을 만났기 때문이에요.”
자매들이 입을 모아 말합니다.
조금도 꾸미지 않은 진심의 언어로 다가 옵니다.
정말 아이들은 바둑을 둘 수 있어 행복한 표정입니다.


▲ 가족들.

“딸 셋을 바둑의 길로 보낸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바둑을 좋아하고 도전하고 싶어하니까요.”
부모들 역시 유쾌하게 대답합니다.
어린 아이들이 얼마나 걱정되겠습니까?
아이들 없는 섬 생활이 얼마나 쓸쓸하고 허전하겠습니까?

그러나 부모는 아이들의 꿈을 위해서 뭐든지 도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대개 바둑을 지망하는 어린이들이 부모의 권유에 의해 입문하고 다소 억지로 떠밀려 공부하게 됩니다.
그러나 추자도의 세 자매는 좀 다릅니다.
아이들 스스로 바둑을 발견하고 배우고자 했으며 부모들은 선선하게 아이들의 뜻을 밀어준 것입니다.

땅 끝 외로운 섬 추자도에서 저는 사랑의 힘을 새삼 실감합니다.
바둑을 사랑했던 제주도의 할아버지.
섬을 찾아와 아이들에게 바둑돌을 쥐게 해준 방랑기객.
딸들의 꿈을 위해 기꺼이 서울로 올려 보낸 부모들의 결단.
비금도 출신 이세돌, 이상훈, 이세나 삼남매가 친딸처럼 추자도 세 자매를 보살펴 주고 있다는 소식.

저는 세 자매가 앞으로 바둑의 길 어디까지 걸어갈지 예측할 수 없지만 한 가지는 감히 점칠 수 있습니다.
이 아이들은 무엇을 하더라도 자신들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고 열심히 할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사랑의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 달려라 세 자매!
TYGEM / 김종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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