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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저수첩

억대의 유산보다 바둑이 좋아

-93세에 바둑을 즐기는 김기상 할머니

2012-01-05 오후 2:23:21 입력

▲ 93세 할머니(오른쪽)와 필자의 대국 장면.

S#1. 닥치고 공격

무서운 기세였다.
2단 3단 젖힘은 물론이고 끊을 곳이 보이면 가차 없이 끊었다.
당연히 노타임이었다.
아생(我生) 연후에 살타(殺他)라는 격언이 무색했다.
K리그에서 닥공(닥치고 공격) 전술로 우승을 차지한 전북 현대 최강희 감독이 떠올랐다.
그녀는 무시무시한 공격수였다.
타이젬 4단 기력의 필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도망 다녀야 했다.
반상에 곡(哭)소리가 진동하고 시산혈해가 흘러 넘쳤다.
분명히 기력이 필자보다 약간 낮은 건 확실한데 마구잡이 초식으로 밀고 들어오니 대처하기가 곤란했다.
물론 사나운 주먹을 살짝 피하고 강력하게 역습을 했으면 거꾸로 그녀의 대마를 무수히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그래선 안 될 것 같았다.
가능하다면 부드럽게 판을 짜서 친선대국의 묘를 꾀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녀가 타협을 거부했다.
바둑판 위에서 뭔 놈의 타협이냐?
맞장을 떠서 누가 살든 죽든 판가름을 하자고 시종일관 인파이팅을 구사하는 거였다.
존경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분했다.
무참하게 당했다.

▲ 바둑판 위의 인파이터 93세 할머니.

"호호 져준 거 다 알아. 그렇지만 기분이 좋네. 난 이래서 바둑이 좋단 말야."
그녀가 바둑돌을 쓸어 담지 않고 포만감 가득한 눈빛으로 반상을 훑어본다.
행마는 좀 둔탁했지만 그녀의 파괴력은 대단했다.
그 바둑을 주변에서 지켜보던 여성연맹 회원들이 입을 모아 필자에게 탄원했다.
“저 어르신이 글쎄 이런 식으로 우리 하수들 대마를 맨날 때려잡는다니까요. 어찌나 손이 매운지 한 번 당하면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아마추어계의 루이나이웨이, 어지간한 시니어 기사들보다 두 배는 더 살고도 남을 93세의 김기상 할머니가 오늘 유저수첩의 주인공이다.
그냥 고령의 어르신이 바둑을 두시는 것만으로도 화제일텐데 기력이 짱짱하다.
타이젬 1단은 충분할 것으로 보인다.

▲ 바둑을 배우는 중년 이상의 여성연맹 회원들.

S#2. 바둑이라는 유산(遺産)

매주 두 차례 한국기원 4층 여성연맹 사무실에서 중년 이상의 회원들이 나와 바둑을 배운다.
현미진 사범이 기초를 강의하고 실전대국으로 이어진다.
회원들 사이에서 93세 김기상 할머님은 기피대상 1호로 손꼽힌다.
그녀의 바둑이 워낙 터프하기 때문이다.

▲ 김기상 할머니가 질문하자, 현미진 2단이 바둑판으로 직접 지도하고 있다.

김기상 할머니는 정해진 날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출석한다.
사는 낙 중에 바둑이 최고라고 하셨다.
“이 나이에 어디론가 나갈 때가 있고 친구들이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하지 않냐고? 나는 바둑이 너무 좋아.”
지난해 11월 5일 강진에서 열린 김인 국수 배 국제시니어 바둑대회에서 최고령 참가자로 특별상을 받은 김기상 할머니.

▲ 상 받은 기념턱. 모두 건배!

1920년생.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로 넘어가는 시대에 태어나셨다.
그런데 너무 젊어 보인다. 동안이다.^^
염색을 하지 않는데도 숱이 검고 피부도 고우시다.
"오늘은 내가 점심을 쏘는 날이야. 같이 가자구."
김인 국수 배 국제시니어 바둑대회에서 특별상을 받은 그 상 턱을 내는 날이라고 했다.
기원 입구에서 점심을 사기 위해 따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둑교실 회원들은 물론이고 우연히 식당에서 조우한 한국기원 직원들 점심까지 할머니가 사셨다.
참 맛있고 소화도 잘 되는 식사였다.

▲ 김기상 할머니(가운데)의 이야기를 들으며 걸었다.

- 바둑을 언제 배우셨어요?
"오래 됐지. 영감님한테 배웠으니까."
- 오호, 할아버님이 굉장히 자상하셨나 봐요.
“그랬어. 돌아가신지 오래 되셨는데 그 양반한테 억대의 유산을 받은 것보다 바둑을 배운 게 훨씬 고맙고 좋아.
1937년 18세의 나이에 그녀는 대구 근교로 시집을 왔다.
남편과 사과 과수원을 일구며 열심히 살았다.
그 당시 사과는 대구의 특산물이었고 값이 비싸서 사과나무 한 그루를 논 한 마지기와도 안 바꿀 정도였다고 했다.
가을이 되면 일꾼을 두 명 쓰고 시동생들까지 불러 사과를 수확했다.
남자들은 낮에 열심히 일을 하고 밤에는 할 일이 없어 바둑을 두었다.
그녀는 남자들이 즐기는 바둑이 재미있어 보여 곁눈질을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남편이 두 집 내고 사는 법과 호구 등 기본을 가르쳐주었다.
이후 1남 3녀를 뒷바라지 하느라 바둑을 가까이 하지 못했다.
1980년 상경해 광장동에 터를 잡았는데 아파트 상가에 바둑교실이 보여 호기심에 들어갔다가 바둑과 상봉하게 된다.
그리고 여성바둑연맹 회원으로 가입해 본격적으로 바둑 친구들과 어울리게 된 것.

▲ 현미진 2단의 지도를 열심히 따라가는 중년의 학생들.

S#3. 나랑 바둑 두고 싶으면 언제든지 찾아 와!

성격도 활달하고 기력도 탄탄한 김기상 할머니는 바둑계의 꽃이다.
이토록 상징적인 바둑애호가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녀는 노인대학에 나가 춤과 노래를 배우면서 한국기원에 나와 바둑도 즐긴다.
그 중에서도 바둑이 가장 재미있다고 밝힌다.
그녀가 항상 도시락을 싸오기 때문에 여성바둑연맹 바둑교실의 풍경도 바뀌었다.
회원들과 함께 점심을 직접 지어 먹게 된 것이다.
식어버린 도시락밥에 뜨거운 물을 말아 점심을 해결하는 할머니를 보고 후배들이 모두 마음을 합친 것이다.
함께 밥을 지어 먹고 바둑을 두는 어머니들의 모습을 연상해보시라.
진정한 식구(食口)의 그림이 보이지 않는가?

▲ 김기상 할머니."사진이 예쁘게 나오려면 화장을.." 

"나랑 바둑 두고 싶으면 언제든지 일루 오셔."
김기상 할머니의 작별인사가 정겹다.
까마득한 어르신이지만 너무 귀엽고 애틋해 와락 안아드렸다.
할머니 100세 넘어 오래오래 장수하시고 앞으로 대마 1천 마리만 더 사냥하시기 바랍니다.
TYGEM / 김종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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