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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창호는 이런 사람이다.

[칼럼] 이창호는 이런 사람이다.

2005-03-01 오전 12:54:37 입력

수준 높은 이창호론이 많아서 무척 기쁨니다. 이번 이창호 9단의 거사에

이어 바둑 문화도 한층 성숙하리라고 믿습니다.

이창호는 어떤 사람인가...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본 견해를 한 번 보시죠

 

 

이창호에 대한 재발견  2005/02/28 19:24

이창호에 대한 재발견


이창호가 지닌 덕목은 워낙 많아서 한두 가지로 정리되지 않는다. 인간적 품성, 승부사적 자질 어느쪽을 막론하고 두루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번 상하이에서 치러진 제6회 농심배 최종라운드를 동행하면서 나는 그의 ‘전혀 새롭지 않은(?)’ 모습들을 ‘매우 새롭게’ 만나곤 했다. 이창호 캐릭터에 대한내 나름의 복기(復棋) 과정이었다고나 할까. 때때로 그는 승부사라기보다 도인(道人) 쪽에 가까웠고,대중적 인기인은커녕 수도승 같은 모습으로 내게 다가오곤 했다. 그 조용하기 그지없는 몸짓이 한 번펼쳐질 때마다 5명의 자객(刺客)들은 차례로 쓰러져갔다. 외경(畏敬)과 두려움의 5일 간이었다.


성실성>

금 강산 대국 사흘 만에 또 한 번 반복된 외지 원정. 폭주에 가까운 스케줄이었다. 일정이 이렇게 밖에 안나오는 걸까. 한국기원 스케줄러를 향해 이창호는 분명히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하지만 그는 눈자위가 푸석푸석한 채로 가장 먼저 인천 공항에 나타났다. 그리고 묵묵히 비행기에 올랐다. 평소 늦게자고 늦게 일어나는 생활방식 이지만 언제 어디서나 약속에 늦는 법이 없다. 절대 자세가 흐트러지지않는다. 이번에도 예외 없이 그의 손에는 책 한 권이 들려있었다.


근성>

첫 날 대국에 앞서 오전에 열린 기자회견. 이창호 장쉬 등 오후에 대국할 당일 출전 기사들은 빠졌다.마이크를 넘겨받은 한국 팀 김인 단장은 “우리 선수단이 포기한 모양이다”라며 탄식했다. 그 소식을나중에 전해들은 이창호가 펄쩍 뛰었다. “그럴 순 없죠. 꼭 이기겠습니다.” 양처럼 순하기만 한 이창호의 손바닥엔 매(鳶)의 발톱이 숨겨져 있었다. 훗날 그는 ‘김국수’의 자극 요법이 큰 힘이 됐다며 웃었다.


자기 조절>

뒤 로는 올 들어 1승 5패란 최악의 전적. 앞에 보이는 것은 5연승이란 태산 같은 짐. 그는 도착 직후부터 외부와의 접촉을 일체 차단했다. 동행했던 한국 팀 관계자들과 식사조차도 어울리지 않았다. 마음이 풀어질 수도 있고 부담감이 가중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체력 비축의 의미도 강했다. 베이징서 사업을 하는 한 살 아래 동생 영호 씨가 날아와 형의 일거수일투족을 수발했다. 식사는 동생이 거의 매 끼를 사다 날라 해결했다. 호텔 방에서 가족들의 근황을 반찬삼아 함께 식사를 마치면 날이 어둑해지곤 했다. 형이 바둑판을 당겨놓는 동안 동생은 방을 치웠다.


치밀함>

첫 날 도착 후 바둑판부터 요청했다. 그리곤 미리 준비해 온 다음 날 대적할 상대의 기보를 놓아보며 포석을 구상했다. 제한 시간 1시간짜리 준(準) 속기인 농심배는 사전 구상이 잘 맞아떨어지면 절반은 먹고 들어간다. 그는 이런 식으로 매일 밤늦게 까지 다음 ‘제물’감을 바둑판 위에 눕혀놓고 숙달된 조리사처럼 기보를 해부했다. 이 번 대회 기간 중 그가 거의 매 판에 걸쳐 초속기로 빠른 운석(運石)을 보인 이면엔 이 같은 비결(?)이 있었다.


여유>

중 국 기자들은 집요했다. 4명의 중, 일 기사들이 모두 탈락하고 21세의 애송이 왕시만을 남겼을 때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지금까지 처음 만나는 상대에겐 약한 모습을 보여 왔다. 혹시 그 전통대로 마지막 단계에서 무너지는 건 아닐까?” 이창호는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승부란 상대적인 것이다. 그리고 맞상대는 안 해봤어도 간접적으로 기질(棋質)을 파악할 수 있다.” 그 바둑은 이번 이창호의 5승 가운데 가장 편한 바둑 중 한 판이 됐다.


극복력>

초1류 승부사가 되기 위한 조건은 2가지. 하나는 승부처를 찾아내는 동물적 후각이고, 또 하나는 승부처에서 자기 쪽으로 물줄기를 돌려내는 감각이다. 출국 비행기 안에서 이창호는 "농심배 우승을 하긴 해야겠는데, 그러려면 상하이에서의 첫 판, 즉 장쉬와의 대결이 결정적 승부처인 것 같다"고 했다.

그 바둑서 이창호는 초반 여유 있는 우세를 잡고도 갑자기 두 세 차례의 헛손질을 범해 미세한 형세까지 쫓겼다. 엄청난 부담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막판 혼신의 힘으로 결정타를 꽂아 넣는데 성공한다. 극적 5연승으로 대회가 끝난 뒤 그는 “장쉬와의 첫 판 고비를 넘은 뒤 둘째 판부터는 컨디션이 상승하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고 술회했다. 출국 직전 최철한에게 당한 3연패, 연 초 1승5패로 몰렸던 난조는 그 뒤부터 급격히 물줄기를 돌렸다. 이창호만이 할 수 있는 위기 관리 능력이자 극복력이었다.


소탈함-예의바름>

스 타들에게 이른바 ‘팬’이란 사실 무섭고도 성가신 존재다. 특히 중국 내에서 이창호에 대한 인기는 일반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그는 가는 데마다 쫓겼다. 심지어는 시상식 도중에, 화장실 갈 때까지도 사인 부대는 강력한 공격을 감행하곤 했다. 그러나 이 번에도 역시 이창호의 찡그리거나 거절하는 모습은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요즘에야 어디 사인으로 끝나던가? 디지틀 카메라를 내밀면 포즈도 취해줬다. 인천 공항 개선(凱旋) 후에도 팬이나 이창호나 전혀 달라짐 없이 똑같은 광경을 연출했다.


꾸준함>

이 상의 덕목들은 이창호란 이름의 시계 속 ‘부속 장치’같은 것 들이다. 앞서 열거한 ‘부속’들 가운데 빠진 것도 제법 있을지 모른다. 어찌됐건 이 시계는 지난 20년 간 해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수 십 년간 계속 째깍거릴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중간에 잠시라도 쉰다면 그건 시계도 아니지. 이창호는 잠시 반짝했다가 한 동안 잠수해 버리고, 다시 나타나 한 바탕 소동을 벌이고 또 다시 사라지는 류의 기사와 구별된다. 그의 진짜 최대의 덕목은 바로 이 ‘꾸준함’이 아닐까.


‘난청지역’

과공(過恭)은 비례(非禮)라는 데 칭찬만하고 있을 순 없다. 그도 인간인지라 분명 부족한 점도 있는데, 이 기회를 빌려 마음먹고 흉도 좀 봐야겠다.

(1) 절대로 튀지 않는다=어떤 경우에도 과도한 쇼 맨쉽을 피한다. 시상식 때 꽃다발을 높이 쳐든다든가, 하다못해 뛰쳐나온 응원단과 하이 파이브를 나눈다든가…하는 것은 그의 사전엔 없다. 답변도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상대는 훌륭한 기사입니다” 는 등 판에 박은 모범 답안뿐이다. 이세돌과 둘을섞어 반죽한 뒤 다시 둘로 나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이런 거야 뭐 아무래도 좋다. 진짜큰 문제는 다음 2번이다.



(2) 이창호는 모기 띠?=인터뷰 할 때 그를 중심으로 한 반경 30센티 밖은 난청지역이다. 도대체 몇 데시벨 쯤 될까. 모기 소리보다 결코 더 크지 않다. 국제 대회 때면 한국 기자들만 애먹게 마련이어서더욱 심각하다. 왜냐하면 이창호의 답변은 외국 기자들에겐 통역을 통해 우렁차게 전달되는데 반해(통역자만 애먹을 뿐이다), 한국 기자들은 ‘이창호의 한국말’을 직접 ‘해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대회 기간 동안에도 대국 직후 인터뷰를 앞두곤 '최전방’ 쟁탈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그 러나 이런 정도는 흉이라고 할 것도 못된다. 이창호에게 그런 약점이 애교에 불과하듯 이 글에서도그냥 애교다. 중국에 머무는 동안, 이창호와 같은 나라 사람이란 사실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큰 자부심을 느끼게 되는지는 아는 사람만 안다. 그 것은 거의 축복 수준이다.

중국 바둑 팬 중엔 막무가내식 맹목적 국수주의자도 많지만 이창호를 진정으로 존경하고 응원하는 팬들도 적지 않다. 이번 대회가 한국의 대 역전 우승으로 끝난 뒤 중국 인터넷 사이트엔 “이창호의 5연승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그를 존경한다” 는 댓글이 수도 없이 올라왔다.

체단주보 시에레이(謝銳)기자 같은 사람은 평소에도 이런 얘기를 한다. “이창호는 바둑에 관련된 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의 희망이자 자존심이다. 이창호처럼 성실하고 겸손하며 노력하는 천재가 쉽게 무너진다면, 바둑 자체의 위상은 물론이고 바둑 종사자 모두가 엄청나게 초라해질 것이다. 그 때를 상상하면 소름이 끼친다.”

[바둑전문기자/이홍렬]

[글쓴이 김동렬]



‘이창호의 바둑을 어떻게 볼 것인가?’

독일이 2차대전에서의 만행에 사과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도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에 자동차를 팔아야 하고 영국에 맥주를 팔아야 하겠기 때문이다.

일본은 사과하지 않았다. 수상이나 덴노가 개인적으로 의사를 표명한 적은 있지만 그 나라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대표하는 기관은 의회인데, 일본의회가 아직도 사과하지 않은 것이다.

배경을 말하면.. 일본 특유의 유럽숭배 전통과도 관련이 있다. 그들은 16세기에 처음 접한 난학의 매력에 빠진 후 500년간 그 전통을 고수해 왔다. 세계 최고의 와인 전문가는 프랑스가 아닌 일본에 있을 정도가 되었다. 구찌나 루이뷔통의 최고 소비시장은 일본으로 되었음은 물론이다.

유럽에 배울 것이 있고 한국이나 중국에는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본의 입장에서 한국이나 중국의 시장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중국은 날로 크고 있다. 일본은 중국시장의 대두에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의 문화적인 차이는 크다. 문화로 보면 일본과 중국은 거의 모든 면에서 충돌한다.(외국에서 중국유학생과 일본유학생이 위생문제로 마찰하면 한국유학생이 말려줘야 한다.)

여전히 사과하지 않은 일본
어디를 가도 그 지역의 문화적 중심지가 있다. 유럽이라면 프랑스 하고도 파리다. 왜 이 점이 중요한가? 미학 때문이다.

미학은 자기 일관성과 내적인 완결성을 추구한다. 그런데 나라가 크고 대륙이 넓으면 일관되고자 해도 일관될 수 없다. 내부적으로 완결될 수 없다. 이때 우리는 적절한 가치판단의 기준을 찾지 못한다.

지역마다 의견이 다르고 입장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이다.(미학이란 작품성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

세계는 하나의 명료한 가치기준을 획득하기를 원한다. 백가쟁명 백화제방의 혼돈에 빠져 있어서는 원활한 의사소통과 상품거래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때 프랑스방식, 혹은 ‘파리 에티켓’이 표준으로 되는 것이다.

그 표준을 선점한 자는? 막대한 이득을 얻는다. 그것은 영국인이 영어를 세계화 해서 얻는 무형의 이득과도 같다. 미국인이 미터법을 버리고 파운드법을 고집하는 이유는 프랑스 표준을 시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는 이에 대응하여 어떤 전략을 사용해야 하는가? 일본이 아시아의 표준이 되도록 그냥 방치해야 하는가?

중요한건 가치의 표준인 미학
일본은 실수했다. 일본의 실수는 유럽에 사대하느라 아시아를 우습게 본 나머지 일본문화로 아시아문명의 표준을 삼을 전략을 강구하지 않은 것이다.(17세기 일본도자기 선풍 이후 유럽에 일본광풍이 몰아친 적이 있다. 예컨대 고흐의 인상주의는 일본의 판화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일본은 여전히 그때의 감격을 잊지 못한다. 일본의 유럽사대주의는 이와 관련이 있다.)

프랑스가 유럽문화의 표준이 된 이유는? 그들이 충분한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프랑스인들이 자국의 문화를 위하여 기울이는 노력은 감동스러울 정도이다. 예컨대 초컬릿이라면 영국제 밀크초컬릿이 세계를 휩쓸고 있지만 프랑스인은 고집스럽게 영국제 밀크초컬릿을 거부한다. 미국제 햄버거도 먹지 않는다.

맛이 없어서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우월감에 기초한 오기로 먹지 않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영국제 밀크 초컬릿이 프랑스식 초컬릿보다 맛있다는 사실은 프랑스인들도 인정하고 있다는 말이다.(몇년 전 하나 남았던 마지막 영국레스토랑이 장사가 안되어 파리에서 철수했다. 영국음식은 원래 맛이 없으므로 영국제 밀크 초컬릿도 먹을 것이 못된다는 식이다.)

영국이 영어를 세계화 하여 얻는 것을 프랑스는 와인이나 치즈 따위로 얻으려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한국은 어떤 전략을 세워야 하나? 중국인들에게 한글을 사용하라고 압박해야 하나? 된장과 김치를 세계화 시켜야 하나? 아니면 바보같이 필리핀과 인도를 본받아 영어공용화나 따라해야 하나?

이창호의 승리가 의미하는 것은?
중국이 바둑을 잘하지 못 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중국기원의 자유스러운 분위기 때문이라고 한다. 축구도 그렇지만 중국에서는 조금 실력이 되는 사람은 곧 오만방자 해져서 제왕과 같은 대접을 받으며 권위를 세우고 목에 힘을 주고 다니게 된다고 한다.

이창호는 겸손하다. 한국인들은 대체로 분위기가 엄숙하고 진지하다. 왜인가? 이는 한국인들의 합리주의적 전통 때문이다.

두 가지 가치관이 있다. 하나는 합리주의고 하나는 실용주의다. 합리주의는 예의 미학적 완결성과 자기 일관성을 추구한다. 전체적인 통일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실용주의는? 그냥 알맹이만 빼먹고 희희낙락한다.

일본문화가 아세아의 표준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지나친 실용주의적 사고 때문이다. 그들은 아세아 합리주의의 원천인 유교주의 가치관의 세례를 받지 못한 것이다.(지난번에 말했지만 역설적으로 메이지유신의 철학적 배경이 된 사상은 한국의 퇴계사상이었던 바, 왜란 때 포로로 잡혀갔다 유학을 전하고 돌아온 강항에 의해 전해진 결과로서 일본에서 유교주의가 잠시 반짝한 경우이다. 퇴계 성리학은 신유교로 그 이전부터 일본에 있었던 백제 왕인박사의 구유교와 완전히 다르다.)


중국인들도 실용주의다. 그들은 돈 좋아하고 요리 좋아하고 노름 좋아한다. 지극히 현실적이다. 이광요가 중국인의 근성을 거지근성이라 질타하고 중국인의 심성을 뜯어고치기에 심혈을 기울였는데(예컨대 중국인은 거리에서 침을 잘 뱉는데 이광요는 물경 수십만원의 벌금을 매겼다.) 딱 하나 못고친 것이 중국인의 도박습성(특히 마작)이었다고 한다.

프랑스는? 합리주의다. 교과서에서 배운대로 영국하면 베이컨의 경험론이고 프랑스 하면 데카르트의 합리론이 아닌가? 합리주의란 무엇인가?(경험론은 실용주의다. 그 실용주의의 극단은 미국식 햄버거주의다.)

프랑스의 합리주의란 이런 것이다. 영국제 밀크 초컬릿이 분명 맛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음식문화에는 지켜야 할 격식이 있는 것이며, 또 코스가 있고 규칙이 있는데 그 규칙에 적합하지 않으므로 안먹는다는 것이다.

미국식의 실용주의란 이런 것이다. 음식이 맛만 있으면 격식 따위 따질거 없이 햄버거든 샌드위치든 무조건 하고 먹고본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나을까? 물론 일장일단이 있다. 프랑스인은 요리에 격식 따지다가 뒤처졌고 미국인은 햄버거로 시간을 절약하여 앞서나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미국식 실용주의의 장점 중 하나는 스타를 인정한다는 거다. 한 가지라도 잘 하는 것이 있으면 그가 성격이 모가 났건, 이전에 범죄자였건 혹은 피부색이 어떻건 간에 사회적으로 인정해주는 것이다.

반대로 한국식 합리주의의 폐단도 있다. 열 가지를 다 잘해도 ‘인간성이 어떻다 오만하다, 선배를 업신여긴다’ 하고 시비하는 것이 한국인의 특징이다.(필자의 글은 한국적 합리주의가 잘났다는 주장이 아니다. 그것이 한국인의 두드러진 특징이라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중국바둑이 분발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중국식 실용주의가 지나쳐서 중국의 스타들이 한국식으로 진지하지 않고 미국식으로 오만해졌기 때문이다.(미국은 워낙 경쟁이 심한 나라이기 때문에 스타들이 최선을 다하는 열정이라도 있다. 지금 중국의 스타들은 어리광만 늘어서 미국식의 오만함만 있고 그 열정은 없다.)

표준을 장악하는 자가 먹는다
지난번에 말한 바 있지만 일본문화는 불교선종의 문화이고, 중국문화는 도교의 문화가 대세인데, 선종이나 도교는 아세아에서 문화적으로 일반화되지 않고 있다. 유교만이 아세아의 공통적 코드가 될 수 있다.

요는 어떤 시기, 특정한 영역의 문화의 표준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정한 정도의 내적인 긴밀성이 담보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아무나 그 표준을 만들 수는 없다는 말이다.

패션이면 빠리, 음악이면 비엔나 하듯이 그 문화적 표준의 내적인 완결성과 일관성은 작은 나라, 혹은 작은 도시에서 가능하다는 점이다. 중국과 같이 큰 대륙(일본도 작은 나라가 아니다.)이라면 그런 일관성을 획득하기 어렵다.

말하자면 시너지효과를 극대화 하기 위해서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법이며, 중국과 일본은 땅덩이가 커서 그러한 집중이 어려운 것이다. 서울이면 명동이 패션의 중심이듯이 작은 구역에서 그러한 집중이 가능하다.

한국은? 한국은 상대적으로 최적화에 가깝다. 그러므로 아세아의 문화적 표준을 한국이 더 쉽게 달성해내는 것이다. 한국이 아세아의 명동이 될 수 있다.

한국은 일본이나 중국보다 진지하다
한국영화는? 진지하다. 적어도 홍콩영화나 일본영화보다는 80년대 최루가스 마시고 민주화의 터널을 헤쳐온 한국영화가 진지하다. 그 때문에 한국영화가 뜨는 것이다.

한국 드라마 역시 상대적으로 진지하다. 한국의 유교적 전통과 가부장문화의 잔재(단점도 물론 있지만)가 진지하게끔 유도하는 것이다.

한국의 바둑이 성공하는 이유는? 역시 진지하기 때문이다. 진지한 이유는? 합리주의적 전통 때문이다. 합리주의란? 간단히 ‘미학적 표준주의’라 할 수 있다. 하나를 바꾸면 전체를 다 바꾸려는 습관 말이다.(지금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몸살이 바로 이것이다. 한국은 민주화 하나 만으로 끝내려는 것이 아니라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려 한다. 이는 한국인의 본성이므로 어쩔 수 없다.)

물론 실용주의의 장점도 크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인터넷 신문명의 도래라는 문화적 격변의 시기에는 표준을 잡는 자가 먹는 법. 표준 세우기 잘하는 우리의 장점을 묵혀 둘 이유가 없다.

자동차의 표준은 독일, 패션의 표준은 프랑스, 전자제품의 표준은 일본.. 세계의 소비자들은 이런 식으로 기억한다. 물론 나라마다 제각기 장점이 있지만 소비자들의 기억력은 이 정도이다.

정보화시대를 맞아 새로운 시대의 표준은? 한국이 먹어야 한다. 그럴 수 있고 또 진지한 합리주의자들인 한국의 문화적 전통과 아세아의 관문인 한국의 지정학적 조건이 거기에 적당하다.

스스로 빛나지 못하는 별은 별이 아니다
한반도의 모양은 출항하는 배의 모양을 닮아 있다고 한다. 그 어떤 것도 소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특정한 하나의 관문을 거쳐야 하며, 그 관문은 그 배후지가 되는 세계 전체를 집약한다.

오랫동안 일본이 아세아의 관문이었지만 서구는 일본관문에서 충분한 소득을 얻지 못했다. 이제사 한국이 그 관문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일인이 벤츠와 맥주를 팔기 위해 과감하게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듯이 우리도 과감하게 독재시대의 잘못을 인정하고 심기일전, 새롭게 동기부여 하고 백범이 말한 문화강국의 외길로 떨치고 나서야 한다.

별은 스스로 빛날 수 있어야 별이다. 남의 조명을 빌리려 해서 안된다. 한발 짝 앞서가는 남에게 배우는 것도 좋지만.. 그 배우려고 하는 정성이 지나쳐 응석이나 부리며 빌붙으려 해서는 안된다.

스스로 자기 내부에서 에너지의 핵을 형성하여 동기부여 하는 즉 전일성을 획득하므로써 미학적으로 완성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내부에서 자생적인 철학이 나와줘야 하고 한국 안에서 토착이론이 나와야 한다.

왜 백범인가? 백범이 얻은 모든 것은 당신의 내부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어려서는 상놈 출신이라 벼슬을 못한다 하여 중인이라도 되고자 잡학을 배웠고, 커서는 유학자 고능선 선생에게서 유교를 배웠고, 동학 접주를 하면서 보은까지 걸어가서 동학을 배웠고, 국모보수 후 마곡사에 은신하며 불교를 배웠고 나중 고향으로 돌아가 해주에서 교육운동에 투신하면서는 기독교를 배웠고 상해에서는 좌파와 합작하면서 사회주의를 배웠다.

그는 모든 것을 배웠지만 그 어떤 외래의 사상에도 자신의 심지를 내주지 않았고 오히려 그 모든 것이 그의 내부에서 어우러져 인격적으로 완성되었다. 백범의 사상이야말로 토착이론이며 자생적인 철학이라 할 것이다.

백범이 덕분에 얻은 것은 접근경로이다. 외부에서 주입된 것을 얻은 자는 경로를 모른다. 그들은 단지 그것을 얻었을 뿐 어떻게 그에 도달하는지 그 과정을 모른다. 접근경로를 모른다면 결코 재현할 수 없다.

과학의 의미는 재현에 있다. 책상머리 이론에서 취한 것을 실험실에서 재현해 보일 때 과학은 연금술과 구분되어 비로소 빛나는 것이다. 재현할 수 없다면 무의미 할 뿐이다. 요즘은 들뢰즈니 라캉이니 소쉬르니 탈근대 바람이니 운운하는 모양인데 그걸로는 유식한 척 단어나 몇개 줏어섬기는 시간강사가 될 뿐 의미없다.

토착이론이 아니고서는, 또 우리의 내부에서 동기부여 하여 얻은 자생적 철학이 아니고는 겉보기 흉내나 낼 뿐 접근경로를 모르므로 결코 그 미학을 완성할 수 없고, 그 미학이 완성되지 않으면 결코 그 표준을 쟁취할 수 없고, 그 표준을 쟁취하지 못하면 타인에게 전파할 수 없고, 그러므로 타인의 존경을 받을 수 없고 표준을 장악한 자가 얻는 프리미엄을 취할 수 없다.

자유인의 길은 외길이다
우리는 자유롭다. 그러나 알아야 한다. 이창호의 바둑이 그러하듯이 자유로운 자의 가는 길은 도리어 낭떠러지 벼랑끝 외길이 되는 법이다. 우리는 외길을 가는 것이다. 한국의 표준이 세계의 표준이 되는 그 하나의 길 말이다.

ⓒ김동렬

이창호 라이프

<1989년의 첫 도전기>



아무튼 창호는 서봉수를 쉽게 넘어선 덕분에 88년 생애 처음 도전자가 되었고 스승 조훈현 9단과 대망의 5번기를 펼치게 됐다. '도전 5강'이 젊음을 다 바쳐 넘으려 했으나 끝내 넘지 못한 서봉수라는 벽을 창호는 이런 식으로 쉽게 넘어선 것이다.
1989년 벽두에 스승 조훈현 9단과 어린 제자 이창호의 도전기가 화제속에서 시작됐다. 사람들은 승패보다도 두사람이 어떤 심정일까 하는 것에 더 관심을 두었다. 두사람은 아침에 조훈현의 부인 정미화씨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나란히 타고와 함께 대국장으로 올라갔다. 대국 개시까지 曺 9단은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면서 주위사람들과 느긋하게 대화를 했다. 그 앞에서 창호는 고개를 푹 숙인채 가만히 앉아있었다.

"어린 제자와 승부를 겨룬다는게 몹시 부담스러웠다. 주위의 시선도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곧 잊어버리고 좋은 바둑을 두자고 생각했다." (조훈현) "괜히 죄송스럽고 거북했다. 등에서 식은 땀이 났다." (이창호)

曺 9단은 徐 9단과 달리 창호를 아직 자신의 적수로 여기지 않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한판 가르친다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창호는 쏟아지는 시선과 카메라 프래쉬에 우선 주눅이 들었다. 창호는 그리하여 스승과의 도전기 첫대국을 불과 80수만에 던지고 만다. 첫 도전기는 1승 3패로 끝났다. 하지만 내용은 자못 충실해서 제3국에선 아슬아슬한 승부 끝에 창호가 반집을 이겼고 제4국에선 화려한 대사석작전으로 국면을 리드하기도 했다. 창호는 3월에 또한번의 도전 기회를 잡았으나 이번엔 스트레이트 3연패.
바둑계 인사들은 신구미월령(新鳩未越嶺 : 어린 비둘기 아직 재를 넘지 못한다)란 옛 문자를 들먹이며 창호가 인물은 인물이지만 조 9단에겐 아직 멀었다고 평했다.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해에 서봉수가 조훈현을 격파하고 국기(國棋) 타이틀을 쟁취한 일이다. 徐 9단은 창호에게 꼼짝 못하고 창호는 曺 9단에게 꼼짝 못하는데 徐 9단은 어찌 조훈현을 이길 수 있었을까. 승부는 기술인가. 마음의 조화인가.
자신감이 없이는 바둑을 이기지 못한다. 빈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상대와 마주 앉을 때 승부는 이미 절반은 결정나고 만다. 승부는 물론 기술이다. 그러나 기술이 비슷하거나 아주 작은 차이일 때는 마음이 승부를 결정하게 된다.

[흑도의 소년이 주는 두려움]
1988년 창호는 연간 최고승률, 최다승, 최다대국, 최다연승 등 기록 4부분에서 모두 1위를 한다. 바둑연감을 보면 이때 세운 88.24%의 승률은 아직까지 한국기록으로 남아있다. (김인 9단이 61년 20승 2패로 90.9%의 승률을 기록했으나 규정대국수에 미달되어 기록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창호는 이 88년부터 25연승을 거두는 등 두면 이기는 소년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확실히 새겨진다.
창호는 '지지않는 소년'이었고 '기록제조기'였다. 어린 창호는 마치 마법을 지닌 소년처럼 선배 프로들의 가슴에 공포를 심기 시작했다. 아직 꼬마인데도 노인과 같은 승부호흡을 보여주는 창호에게서 '흑도(黑道)'의 이미지를 느꼈다.
프로들은 창호의 불가사의한 인내와 행적을 지켜보며 저 땅 속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솟아오르는 검은 연기를 바라볼 때 같은 두려움에 빠져들곤 했던 것이다.
1989년 4월에 창호는 드디어 한국대표로 후지쓰배에 출전하게 된다. 창호로서는 이것이 세계대회 첫 출전이었다. 도꾜 한 호텔의 넓은 홀에서 추첨식이 거행됐다. 사회를 맡은 늘씬한 여성 아나운서는 아직 뚱뚱하고 조그만 꼬마에 불과한 창호를 보고 이런 아이가 어떻게 세계바둑대회에 나왔을까 깜짝 놀란 모습이었다. 그녀는 일본 여성 특유의 싹싹한 어투로 창호의 상대자로 뽑힌 왕밍완(王銘琬) 9단에게 "아직 어리니까 살살 좀 다뤄주세요"라고 말했다.
한국기사들과 관계자들은 "그렇게는 안될걸, 어디 혼좀 나봐라."하며 속으로 웃었다. 왕밍완 9단은 최근 일본의 본인방이 되는 등 강자의 면모를 보이고 있으나 당시만 해도 정상급에겐 한수 처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에 비할 때 창호는 비록 조훈현에겐 졌지만 창호의 저력으로 미뤄볼 때 왕밍완이 크게 고생할 것이고 무척이나 당황하게 될 것이란 확신 같은 것이 우리에게 있었던 것이다.

[어디 한번 혼좀 나봐라 - 세계대회 첫 출전]

그러나 이튿날 창호는 계산의 명수요, 돌부처다운 끈질긴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매우 싱겁게 져버렸다. 나는 멍하니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창호를 너무 과대평가했던 것일까. 그렇더라도 국내 강자들이 창호를 동자귀신 보듯 두려워하는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승부가 끝나려면 한참 멀었는데도 반집승부를 내다보고 인내를 하는 그의 계산력과 불가사의한 정신력은 김인 9단도 일찌기 인정한 것이 아닌가.
한데 어찌하여 왕밍완 정도에게 그리 쉽게, 허무하게 질 수 있단 말인가. 王 9단이 들으면 서운하겠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선 우리가 이창호에 취해 이창호를 정확히 보지 못하는 측면도 있지 않을까 반성도 했다. 무엇보다도 창호는 그 여성 아나운서의 말 그대로 아직은 14살 어린 아이였으니까 말이다.  
이후로도 창호는 외국무대에 나가면 잘 졌다. 처음 보는 상대에겐 특히 약했다. 1992년 이후, 그러니까 한국에서 1인자가 된 뒤에도 중국의 차택무(車澤武)라는 무명기사에게도 졌고 중국을 떠나 막 유랑을 시작한 여성강자 루이나이웨이(芮乃偉) 9단에게도 완패했다.
이바람에 창호라는 천재 소년을 실컷 자랑하고 그의 막강한 힘을 과시하며 크게 놀래주고 싶은 우리의 기대감은 번번히 좌절을 맛봐야 했다. 그렇다면 창호가 외국에만 나가면 힘없이 지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똑같은 세계대회라도 국내에서 열리는 대회에선 창호가 강했다)


[창호의 해외징크스]

창호는 비행기 타는 것을 꺼려했고 낯선 곳에서 자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사람이 많은 곳도 거북해했다. 이중에서도 비행기는 창호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창호는 바둑에서 보듯 모험을 좋아하지 않는다. 당대 최고의 승부사에게 이런 표현을 하면 믿기지 않겠지만 필자는 창호가 겁이 많은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겁이 많은데 어떻게 승부사냐고 되묻는다면 이렇게 답변하고 싶다.

"본래 하수의 특징은 겁이 없다는 점이다. 두려움을 모르면 일류 승부사가 아니다. 두려움을 알되 그걸 뛰어넘는 자가 최고의 승부사다."

아무튼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창호에게 비행기라는 존재는 매우 싫고 불확실한 존재였다. 창호는 비행기를 꺼렸다. 그래서 비행기를 타면 스트레스를 받아 배탈이 나곤 했다. (창호는 외국을 자주 다니는 지금도 국내 지방대국에선 무조건 기차를 타고 다닌다)
이런 고약한 컨디션에다 낯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나면 창호의 그 무서운 집중력도 여지없이 허물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창호가 외국에 가서 유일하게 찾는 곳은 전자오락실이었다. 아버지 이재룡씨가 항시 동행하며 돌봐줬지만 이재룡씨 역시 사람들과 어울리는 형이 전혀 아니어서 두 부자는 조용조용 방에 있거나 전자오락실에 가거나 했고 식사도 여럿이 어울리는 곳을 피했다. (나는 창호가 사람들과 잘 어울리기 힘든 성격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생각은 물론 잘못됐다. 창호는 머지않아 누구보다 팬들과 잘 동화하고 후배들과도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게 됐으니까.)
외국에 가면 배탈이 자주 나서 처음엔 창호의 식성이 몹시 까다롭구나 짐작했으나 본인에게 물어보니 의외로 "라면이건 뭐건 아무거나 잘 먹는다."고 했다. 배탈의 원인은 비행기와 낯선 시선, 즉 '외국'에 대한 스트레스였다. 부동심(不動心)의 달인이라는 창호에게도 이렇게해서 하나의 장애물이 생겼으니 그것이 곧 '해외징크스'였다.

[전략가 이창호]

창호는 이무렵 상대가 강하든 약하든 처음 보는 외국 기사에겐 거의 졌다. 그러나 두번째 만나면 거의 이겼다. 창호에게 '전략가'란 별명이 붙게 된 것은 이때문이었다. (창호는 한번 지면 약한 상대라도 내가 왜 졌고 상대의 강점은 무엇인가 면밀히 연구한다. 화가 나서 진 바둑을 쳐다보기도 싫어하는 기사도 있는데 창호는 정반대였다. 창호는 이윽고 상대의 장점과 약점, 자신의 실책들을 확인하고 그걸 머리 속에 깊이 새겨 두었다가 다음에 만나면 여지없이 깨뜨렸던 것이다. 이런 모습 때문에 창호를 전략가라 부르게 되었지만 사실은 프로기사라면 누구나 이런 자세를 배워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조훈현 9단에게 지고 일본에서도 졌으나 창호는 다시 줄기차게 승수를 쌓고 있었다. 밤이 되면 선생님의 바둑을 연구했다. 선생님은 그의 마음속에 거대한 장벽으로 가로막고 있었고 강한 승부심을 지닌 창호는 반드시 선생님을 뛰어넘고 싶었다. 창호가 曺 9단의 바둑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리하여 창호는 드디어 조훈현이란 거대한 벽을 넘어서게 되지만 그때가 되서도 일본은 이창호의 바둑을 쉽게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이렇게 평했다.
"이창호가 일인자라 하지만 아직은 이른 감이 있다. 이창호의 바둑은 조훈현만을 이기기 위해 만들어진 느낌이고 그것이 다른 기사에게도 유용한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창호의 바둑엔 분명 그런 요소가 있었고 또 일본에서의 전적이 영 나빴기에 일본이 그런 의심을 하는 것은 일면 타당한 점이 있었다.

[생애 첫 타이틀은 KBS 속기에서]

1989년 8월 8일, 창호는 드디어 KBS - TV가 주최한 바둑왕전 결승전에서 김수장 9단을 2대 0으로 꺾고 우승컵을 차지했다. 만 14세에 세계최연소 타이틀홀더의 기록을 세운 것이다.
승부세계에는 "우승해본 사람이 우승한다."는 말이 있다. 우승 문턱에서 아깝게 좌절하는 기사들은 많다. 바둑 내용만을 보면 이긴 것과 전혀 다름없는 패배로 인해 아깝게 우승을 놓친 기사들이 많다는 얘기다.
'도전5강'이 바로 그렇고 김수장 9단도 그중 한사람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도전5강이란 조훈현 1인체제, 나아가 曺 - 徐시대를 제발 좀 끝장내 달라는 팬들의 염원으로 탄생한 이름이다.
그 5명의 이름은 장수영 9단, 서능욱 9단, 김수장 9단, 강훈 9단, 백성호 9단등이다. 백성호 9단 대신 정수현 9단등을 거론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무튼 이들은 무수히 결승전에 올라갔고 도전기를 치렀다. 그러나 큰형에 해당하는 장수영 9단은 준우승만 8회, 서능욱 9단은 준우승만 무려 13회를 했다. 김수장 9단도 준우승만 3회, 정수현 9단도 한번의 준우승.
강훈 9단은 준우승을 7번 했지만 우승도 딱 한번 했다. 이것이 바로 도전5강의 유일하고도 귀중한 우승이다. 바로 1986년 박카스배에서인데 그러나 결승전 상대가 조훈현 9단이 아니고 이미 정상에서 밀려난지 오래된 김인 9단이라서 조훈현을 꺾는다는 '도전5강'의 정신과는 거리가 있었다.
강훈의 단 한번의 우승을 끝으로 도전5강은 역사의 물결에 휩쓸려 사라져갔다. 그들은 조훈현과 서봉수라는 두 장벽을 넘는데 끝내 실패했을 뿐더러 뒤를 치고 올라온 유창혁과 이창호라는 두 강력한 신예에 쉽게 덜미를 잡혔다.
김수장 9단이 이창호 9단에게,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김수장 7단이 이창호 4단에게 속기바둑 결승전에서 패배한 사건은 말하자면 '도전5강'의 완전한 퇴진을 의미하는 이정표와도 같은 사건이었다. 또한 이창호가 세운 '14살, 타이틀획득'의 기록은 다시는 깨지기 힘든 전무후무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바둑계를 흥분시켰다.

[이창호라는 불가사의, 그리고 살인적인 대국수]

창호가 주는 또다른 이미지 즉, 뚱뚱하고 말이 분명치않고 눈빛이 흐릿하고와 같은 바둑 고수답지 않은 이미지 때문에 뭔가 분명치 않은 기색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14살 우승'은 창호가 진정 놀라운 천재라는 사실을 다시한번 확인시켜줬다. 어느 누구도 더이상 외면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이 '14살'이란 나이가 바둑에 종사해온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형용할 수 없는 충격을 던져준 것도 사실이다.
필자 역시 "바둑은 진정 도(道)나 예(藝)라 할 수 있는가. 바둑이 예도라면 어떻게 세상 경험도 전무한 14살 소년이 최고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단 말인가."하는 격렬한 의구심에 휩싸이곤 했다.
필자는 이무렵 곧잘 불가사의(不可思議)란 단어를 사용하곤 했다. 사실 창호는 불가사의 그 자체였다. 하지만 창호는 불가사의란 네글자로 덮어버리기엔 너무도 불가사의한 존재였다.
1988년에 최고승률, 최다승, 최다대국에 연승부문마저 휩쓸었던 창호는 1989년에는 전반 6개월동안에만 무려 67국을 두어 53승 14패라는 발군의 기록을 세운다.
이창호는 이해에 모두 111국을 두어 84승 27패의 전적을 거두는데 이 111국은 연간최다대국 부문에서 아직까지 기록으로 남아있다. 4단시절인지라 창호는 거의 모든 기전에서 1차예선부터 참여했고 계속 이겨 타이틀전까지 치렀기 때문에 대국 수가 엄청나게 늘어났던 것이다.
어린 소년의 이같은 '살인적인 대국'은 '기사생명 단축'과 결부되어 바둑가의 논쟁거리가 되기도 했다. 창호는 그러나 이듬해인 90년에도 109국을 두었고 오늘날에도 매년 70국 이상의 많은 대국을 소화하고 있다. 주위에선 작은 기전엔 나가지 말라고 하고 본인도 그랬으면 하는 눈치지만 대회를 주최하는 측에선 최고 인기기사인 이창호를 반드시 출전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거절을 못하는 이창호로서는 힘든 강행군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 본인이 힘들게 출전을 거절하는 경우 선배기사를 통해 출전 교섭이 들어오고 그러면 창호는 결국 굴복하여 대국에 나서곤 했다. 다행히 어렸을 때 우량아 상을 받았던 타고난 체력이 창호에겐 큰 도움이 되어왔으나 1989년에 기록된 연간 111국이란 이 살인적인 대국은 앞으로 다시는 있어서는 안될 기록인 것만은 틀림없다.

["이젠 창호가 알아서 하겠지"]

이창호가 '기록제조기'란 새로운 별명과 함께 바둑판 361로(路)의 난제들을 일직선으로 돌파해가고 있던 1989년 9월, 싱가포르에선 한국의 최강자 조훈현 9단과 중국 최강 네웨이핑 9단의 제1기 잉창치(應昌期)배 결승전 최종국이 벌어지고 있었다. 2대 2에서 벌어진 마지막판. 서울과 베이징(北京)은 이 한판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결과는 曺 9단의 불계승. 한국바둑계에 전대미문의 대사건이 벌어졌다. 서울의 매스컴은 만화와 사설까지 바둑으로 뒤덮혔다. 조훈현의 집에 TV 카메라 부대가 들이닥치고 올림픽 금메달을 땄을 때처럼 조금은 유치하고 조금은 감동적이기도 한 가족들의 만세 장면과 손가락으로 'V'자 그리기 장면을 촬영했다.
그날 밤 늦은 시각, 曺 9단은 불도 켜지 않은채 호텔방에 앉아 있었다. 거대한 우승컵이 한쪽에서 웅크리고 있었고 테이블엔 40만달러짜리 수표가 든 하얀 봉투가 뎅그렇게 놓여 있었다. 曺 9단은 말이 없었다. 고요하면서도 무거운 분위기가 방안을 지배하고 있었다. 신문기사를 위해 曺 9단의 심정을 들어보려 들렀던 나는 바다 밑 같은 분위기에 동화되어 함께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깊은 상념에 잠겨있던 曺 9단이 어둠속에서 침묵을 깼다.

"이젠 창호가 알아서 하겠지"

曺 9단의 말은 뜻밖이었다. 그말에 응축되어 있는 뜻은 풀이하자면 이랬다.
"일본과 중국 바둑은 하늘처럼 높아서 우리의 상전 같은 존재였지만 나는 그들을 물리쳤다. 이렇게 물리치리라고는 나 스스로도 믿지 못했지만 기적같이 그 일을 해냈다. 앞으로는 누가 그 힘든 일을 해낼까. ······그 일은 그만 생각하자. 창호가 있으니까 알아서 하겠지."
曺 9단의 어투는 착 갈아앉아 있어 40만달러짜리 우승컵을 막 따낸 사람치고는 어딘지 우울해 보인 지경이었다. 그는 자신의 승부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에 뜻밖에도 창호를 생각하고 있었고 그의 어조는 차분하여 묘한 서글픔마저 띄고 있었던 것이다.

"창호는 믿을만한가" 하고 내가 묻자
曺 9단은 "그럼, 믿을만하지." 했다.
9살 때 프로생활을 시작하여 근 30년간 쉬지않고 달려온 曺 9단은 인생의 정점에서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빛나는 성공, 그리고 그 뒤에 찾아온 오랜만의 휴식에 망연해졌던 것일까. 문득 외로워졌던 것일까. 아니면 이제부터 끝없이 이어질 제자 이창호와의 피나는 승부를 이때 이미 본능적으로 예감했던 것일까.

[바둑황제 조훈현 9단의 예감]

한국에서 바둑은 3번의 도약을 통해 스포츠 등 다른 분야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다. 1980년 조치훈의 명인쟁취가 처음이었고 1989년 조훈현의 응씨배 우승이 두번째였다. 세번째가 이창호의 등장인데 이중 가장 화려하고 요란했던 것은 조훈현의 응씨배 우승이었다. 그는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장내를 가득 메운 기자들 앞에서 거창한 회견을 했고 꽃다발을 목에 걸고 시내까지 카퍼레이드를 했다. (이런 식의 카퍼레이드는 한국에서 조 9단이 마지막이었다. 曺 9단은 이튿날인가 TV 출연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방송국에 나갔다. 집을 비워둔 채였다. 그날 曺 9단 집에 도둑이 들었다. 절묘하게 허를 찌른 날카로운 도둑이라며 웃고 말았지만 참으로 씁쓸한 사건이었다.)
曺 9단은 서울에 오자마자 서봉수, 유창혁, 이창호를 차례로 무찌르고 3연속 타이틀방어에 성공했다. 응씨배 우승을 통해 曺 9단은 더욱 강해진 느낌이었다. 바둑계에선 '19로의 마술사'라 불리던 그에게 '바둑황제'라는 칭호를 새로 선사했다.
바로 이무렵, 그러니까 프로입단 3년째인 89년 12월에 이창호 4단이 다시한번 최고위전의 문을 노크하며 슬며시 나타났다. 어언 4번째 도전이었다. 12월 11일의 첫판에서 창호는 놀랍게도 6집반승. 이창호는 영화속의 로마군처럼 큰 방패를 일렬로 세우고 창날만 내민채 착착 진군해 曺 9단을 쓰러뜨렸다.
바둑이 시작되기 전에 창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채 특유의 죄송한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바둑이 시작되자 철가면을 쓴 기사처럼 무표정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일년 전과는 완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4번째 도전 - 철가면을 쓴 이창호]

제2국은 그러나 曺 9단의 불계승. 혼전에 말려들어 손쓸새 없이 져버리고 말았다. 3국에선 다시 이창호의 불계승. 이판에서 창호는 명국이라 할만큼 완벽한 바둑으로 승리를 거뒀다. 창호가 2대 1로 앞서자 바둑계 인사들은 문득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늙은 스승이 제자에게 지고 나서 허허 웃는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러나 스승이 정상의 위치에 있을 때 제자가 진검승부를 펼쳐 그를 옥좌에서 끌어내리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바둑이건 스포츠건 다른 분야에선 본 적이 없다.
스승이 제자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나는 모습은 이것도 인연이요, 운명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낯설고 이상하여 상상하기조차 힘든 모습이었다.
바둑계 밖에선 이창호라는 정체불명의 소년과 스승 조훈현의 맞대결을 놓고 벼라별 얘기가 다 떠돌았다.
몇몇 팬들은 제자가 어떻게 스승을 이길 수 있느냐, 바둑계는 예의도 없느냐고 한국기원에 항의했고 그럴 때면 한국기원은 "일본 바둑계에선 제자가 스승을 이기면 은혜를 갚는 것이 된답니다."고 대답해줬다. 그러나 일본에선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일본의 얘기는 늙그막의 스승이 제자와 만나 대국을 벌이고 제자가 힘없는 스승을 꺾어 잘 배웠음을 증명해 보이는 것을 두고 은혜를 갚는다고 말한 것이다. 정면 승부를 펼쳐 제자가 이기는 것을 말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무엇보다 스승과 제자가 피나는 승부를 벌인 경우는 조훈현 - 이창호가 바둑 사상 처음이었다.
용호상박의 싸움끝에 최종국인 제5국이 1990년 2월 2일 관철동의 한국기원에서 열렸다. 포석에서 뒤진 이창호는 시종 비세에 몰렸으나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 마치 인생역정을 무수히 겪어본 장년의 승부사처럼 자리를 꽉 차고 앉아 괴이하고 줄기찬 승부호흡을 토해내고 있었다. 창호는 결국 자신의 능기인 '장구(長久)한 기다림'과 '완벽한 계산력'을 십분 발휘하여 역전 반집승을 거두게 된다.

[4번째 도전 - 철가면을 쓴 이창호]

그렇다. 반집이었다. 이창호가 이후 무수히 엮어낼 반집의 드라마. 수많은 초일류 기사들을 악몽 속으로 몰아넣었던 반집 역전승의 드라마는 이렇게 첫번재 테이프를 끊었다.
창호는 이리하여 생애최초로 신문기전에서 우승했다. 공교롭게도 최고위(最高位)는 20년전 曺 9단이 타이틀 사냥을 시작할 때 최초로 손에 넣었던 바로 그 타이틀이었다. 이튿날 매스콤은 이렇게 제목을 달았다.

['이창호 보은(報恩)의 타이틀획득']

1990년에 접어들자 신문의 바둑란에 '4인방시대'란 단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조훈현, 서봉수, 유창혁, 이창호의 4강시대라는 뜻인데 왜 의미가 좋지않은 '방(坊)'자가 들어가게 됐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정치에서의 오랜 독재가 빚어낸 언어의 굴절현상일까. 높은 사람들이 지겹도록 싫은 나머지 바둑에서 정상에 군림하는 4사람의 강자를 그렇게 부정적으로 표현하게 된 것일까. 지금까지도 서울에선 이 네사람을 4인방으로 부르고 있지만 한문을 누구보다 잘 아는 중국만은 문화혁명시절 악역을 담당했던 4인방과 구분하여 4천왕(天王)이라 부르고 있다.
아무튼 4강시대라지만 타이틀전에 관한한 조훈현의 아성을 여전히 철옹성이었다. 그러나 창호는 만 15살 때인 1990년 2월 27일부터 8월 31일까지 6개월동안 국내기전에서 무려 41연승을 거두어 바둑계를 경악시켰다. 이것 역시 신기록이었다. 그때까지 연승기록은 김인 9단이 25살 때인 1968년에 세운 40연승. 하지만 당시는 강자가 적던 시절이라서 이창호의 41연승은 더욱 돋보이는 기록이었다. (10년후 이세돌 3단이 32연승을 세우며 역대 연승기록 3위에 오른다. 조훈현 9단은 전관왕을 3번이나 해치운 사람이지만 연승기록은 1977년의 31연승이 최고다.)
우물안 개구리 소리를 듣던 창호가 이무렵부터 해외대국에서도 드디어 호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박치문 [중앙일보 전문위원]

 

윗 글의 전문은 이창호 홈에있습니다. 이창호 9단의 성장기중 가장 인간적인 면이

두드러진 글을 선정했습니다.

[i진선 한마디]

업글중 입니다.

TYGEM / i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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