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전미(全美) 바둑대회(US Go Congress)에 참여했던 우리 프로 기사 한 분

은 “다면기 행사를 마친 후 한 소년이 졸졸 따라와서 당황했다. 동양 프로 기사를

떠나보내기 아까워 무조건 따라나선 것이란 게 현지 관계자의 설명이었는데,

그 곳으로부터 200여㎞ 떨어진 다음 행선지 다면기 행사장에서 그 소년을 또

다시 만났다”고 회상하더군요.

일본 여류 가운데 시게노(重野由紀·39)란 프로 2단이 있죠. 1998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현지인과 결혼, 그 곳 바둑 보급 활동을 해 온지 벌써 7년째입니다. 활달한

 성격답게 지난 해 유럽 바둑 콩그레스가 열렸던 상트 페테르부르크에도 어김없이

 나타났더군요. 그녀에게 들은 이야기 한 토막입니다.

“언젠가 어린이 대회 지도 사범으로 초청받았었는데, 수락해놓고 보니 거리가

왕복 2000㎞나 됐다. 더구나 경비 부족으로 버스로 옮겨간다는 게 아닌가. 내가

난감한 표정을 짓자 관계자는 ‘아이들이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며 애절한

표정으로 매달렸다. 난 지금도 그 호기심 가득한 아이들의 맑은 눈망울을 잊지

못한다. 무모한 일정이라며 말리는 남편과 부부싸움까지 했고, 왕복 20시간을

거리에 쏟아 부었지만 내 결정은 지금 생각해도 옳았다.”

모두가 동양의 ‘바둑 귀신’에 대한 서양인들의 끝없는 외경심을 말해주는 일화들

입니다. 사실 무대의 스타를 향해 환호하고, 그들과 마주 앉았을 때 가슴이 두근거

리는 것은 바둑 아닌 다른 분야 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거장(meister)들과

 함께 플레이할 수 있다는 면에서 바둑 팬들은 다른 분야보다 훨씬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죠.

얼마 전 골프 스타 타이거 우즈와 라운딩하는 상품을 경매에 부친 결과 3만 달러,

우리 돈 3천여만원에 낙찰됐다는 기사가 실렸더군요. 하지만 그 돈만 지불하면

아무 때나 우즈가 필드에 나서줄 리가 없죠. 이에 반해 바둑은 1대1 대국 뿐 아니라

 다면기나 인터넷을 통해서도 프로들과 손을 섞을 수 있습니다. 바둑만큼 팬 친화

적 이점을 갖고 있는 승부는 없다는 뜻입니다.

이 점은 바둑을 전파할 때, 또는 바둑을 통해 문화적 영토를 확장하고자 할 때

프로 기사가 직접 나서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임을 시사합니다. 프로 기사의

 ‘왕림’ 만큼 팬들을 흥분시키는 ‘사건’은 없는 거죠. 일본이 해마다 서구권 국가

바둑 대회에 프로 기사들을 파견하고, 현지 대사관 또는 기업체들이 수 십 년 째

이들을 후원해 온 것도 이 점에 일찍 눈을 떴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지금 서양에

서의 바둑 용어는 사실상 100% 일본어이고,  세계 각지엔 여전히 일본이 국제

바둑의 메카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주목할 만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프로 기사

들의 인기가 ‘메카’ 일본을 제쳐버린 겁니다. 물론 이창호를 비롯한 우리 최고

엘리트 기사들의 세계 석권 현상에 힘입은 현상이지요. 특히 이창호에 대한 서양

 아마추어들의 존경심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마치 신흥종교의 우매한 교도들

같습니다. 폴란드 투촐라서 열린 올해 유럽 콩그레스 때도 작년과 마찬가지로 이창

호 바둑책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던 모양입니다.

꼭 이창호가 아니더라도 한국 프로 기사의 인기는 하늘을 찌릅니다. 한국의 바둑

서적은 최고의 바이블로 자리 잡으면서 서구제국의 ‘종이 값’을 올리고 있고,

한국기원서 발행한 바둑연감은 가위 가보(家寶) 수준으로 신주처럼 모셔집니다.

어찌어찌해서 한국기원이 발행한 단증(段證)이라도 손에 쥐는 사람은 당장 지역

바둑 커뮤니티의 최고 명사로 신분이 급상승합니다. 한국 기사들의 자필 사인,

그들과의 다면기를 통해 기록해 놓은 기보도 가위 문화재급(?)이죠. 서구 아닌

중국만 해도 이창호 조훈현등이 자필 사인한 부채들이 팬들 사이에서 고가(高價)

에 매매되고 있습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한국 바둑과 한국 프로기사들을 더 이상 버려놓지

말고 상품화(商品化)하자는 겁니다. 개인 기업 할 것 없이 모두가 해외로, 해외로

 뛰쳐나가는 국제화 시대입니다. 또한 문화 컨텐츠가 경제력과 국력을 좌지우지하

는 시대이기도 하죠. 한국하면 떠 올릴 변변한 국가 브랜드 하나 없는 상황에서

바둑만한 문화 컨텐츠가 또 있을까요? 하지만 현재 우리 바둑은 한낱 승부를 겨루

는 ‘보드게임’에만 머물고 있습니다. 우리 기사가 국제 대회서 우승하면 그저

박수 몇 번 치고 끝납니다.

한국 바둑의 해외 진출은 어떤 식으로 해야 할까…능동적, 공격적 방식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파리 뉴욕 모스크바 로스앤젤레스 베를린 상파올로 등 세계 주요

거점 7~8개 도시에 한국기원 지부를 설치하고 각 도시마다 우리 프로기사 2명

안팎을 상주시키는 겁니다.

두렵다고요? 프랑스만 해도 바둑 인구가 약 15000명, 바둑 클럽이 100개를 넘습

니다. 미국 바둑 동호인은 줄잡아 10만 명, 대회가 열릴 때마다 한 번에 400명

가까운 신청자가 쇄도합니다. 샌프란시스코엔 이미 1930년에 기원이 생겼을

정도였죠.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우루과이 등 중남미 바둑열기도 뜨겁습니다.

아르헨티나 최강자 페르난도 아길라 6단은 작년 후지쓰배 본선서 일본 9단 2명을

 눕히고 8강까지 진출했을 정도로 실력도 막강합니다.

무슨 돈으로 한국기원 지부를 만들지? 겁부터 내면 아무 일도 못합니다. 예상되는

 수입원을 찾아볼까요? 우선 단증(段證)발행료, 즉 면장(免狀) 수입이 있습니다.

이 것 만으로도 현지 사무실 운영에 필요한 기본비용은 충족된다는 게 제 판단입니

다. 여기다가 한국 바둑 서적의 본격 판매가 짭짤합니다. 한국기원은 외국 행사

 때 한글판 ‘바둑 연감’, ‘월간 바둑’ 등을 소량 가지고 나가는데 그 인기는 폭발적이

죠. 외국어 보완 작업을 거쳐 현지 판매될 ‘한국 바둑 책’의 상업적 잠재력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바둑 책과 바둑 인터넷 망 확대 연결은 이미 기초 투자가 다 돼있어

 적은 추가 비용으로 큰 이득이 가능하죠.

그 뿐입니까? 한국으로의 바둑 유학 또는 투어 알선, 삼성화재배 등 한국주최

빅 타이틀의  현지 유치를 통한 비즈니스화 등도 검토해 볼 만 합니다. 뻔질나게

열리는 클럽 바둑대회 때 한국 바둑 로고나 페넌트 한 장씩만 걸어주어도 깜빡

죽을 텐데, 이런 절대적 문화 상품을 그대로 쳐 박아 두고만 있는 현실이 한심합

니다.

한국기원 해외 지부 창설의 빼놓을 수 없는 효과 가운데 하나가 국내 프로 기사

들의 일자리 창출입니다. 어느 새 우리 바둑계도 기사 수 200명 시대를 맞았지만

시장은 거꾸로 좁아지며 생활 여건도 악화돼가고 있습니다.

그나마 대부분의 기전 상금을 소년 기사들이 독점하면서, 우리 바둑계를 여기까

지 이끌어 온 원로와 중견들은 심각한 생활고를 겪으며 속앓이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을 해외 보급 의 첨병으로 활용할 수 있다면 1석 3조의 효과를 보게 됩니다.

태권도나 양궁만 해도 ‘찾아 먹을 것’은 죄다 찾아먹고 있습니다. 바둑과 달리 두

분야는 해외로부터 밀려드는 지도자 수요 욕구에 활발하게 대응해 왔죠. 물론

구조적으로 이들 스포츠 종목은 바둑과 좀 다릅니다. 스포츠 지도자들이 외국

협회 차원의 프러포즈를 받고 나가는데 비해 프로 기사들은 한국기원 해외지부

창설 요원으로 파견하자는 제안이니까요. 어쨌든 우리 전문인들이 해외에서

쓰임새가 높다는 점에선 다를 게 없으며, 그런 점에서 바둑은 스포츠를 벤치마킹

할 가치가 있습니다.

양궁과 태권도가 한국의 ‘문화 상품’ 구실을 해내고 있는 것은 이번 아테네 올림픽

서도 본 대로 입니다. 국가 이미지를 높여주고, 메달밭 구실도 해 내면서 우리 경기

인들의 지도력을 세계만방에 확인했으니 이런 국위 선양이 없습니다. 양궁의 경우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한 30여 개국 지도자 중 한국인이 8명이나 돼 경기장은

마치 ‘반상회’ 분위기였다는군요. 태권도의 가맹국 수는 물경 178개에 이릅니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태권도의 우리말 구령 소리가 찌렁찌렁 울리고 있을 정도라면

믿어지십니까.아테네 올림픽 양궁 종목 4개 부문 우승자 전원이 한국산 활과 화살

을 사용했다는 사실도 산업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해외에 진출한 우리 양궁 코치들의 뛰어난 지도력이 부메랑으로 돌아와 한국의

‘싹쓸이’가 좌절됐답니다. 한국 태권도의 아성 역시 바깥서 활동 중인 한국인들로

 인해 무너지기 시작했죠. 하지만 그런 걸 두려워해선 평생 남들의 문화 식민지

생활에만 만족해야 합니다.

불모의 페루 여자배구를 올림픽 2위까지 올려놓은 박만복 감독의 당시 인기는

후지모리 대통령 이상이었습니다.우리대사(大使)를 능가하는 민간 외교관이었다

는 뜻이죠. 바둑을 통해 우리의 우수함과 성실성을 과시하고 한국인의 얼을 전하는

 것만으로도 지도자의 해외 진출은 의미가 큽니다.

특히 승부 1선에서 한 발짝 물러난 프로기사의 입장에서 후진 양성은 대단히

보람 있는 일입니다. 1989년 네덜란드로 건너가 그 곳 터줏대감으로 활동 중인

중국 출신 궈주엔(郭鵑), 세계 최강의 여류 중 하나로 군림하다가 결혼과 함께

도미, 뉴욕에서 강사 생활을 하고 있는 펑윈(豊雲)과 양이룬(楊以倫), 한국계 재니

스 김, 루이나이웨이의 시숙이자 장주주(江鑄久)의 친형인 장밍주(江鳴久)…열거

하자면 한이 없습니다. 각기 사정은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가 조국을 떠나 벽안의

 제자들을 키우는 낙에 흠뻑 빠져 지내는 동양 프로들입니다.

한국기원 해외 지부 창설 안(案)은 그 자체로 풍부한 부가가치를 지녔을 뿐 아니라,

 나이 든 프로들의 일터 창출이란 면에서도 큰 돌파구가 되지요. 기사들이 양궁이

나 태권도 사범처럼 개인적으로 해외에 진출, 개별 레슨으로 자립하는 방식은 아직

은 간단치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해외 지부(支部) 창설과, 그 지부(支部)를 국내

프로들의 해외 진출 거점으로 삼는 작업은 별개의 사안 아닌 함께 진행돼야 할 프

로젝트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한국 바둑은 아직도 세계 최강입니다. 하지만 그래서 우리는 뭘 얻어냈나요?

그저 비좁은 나라 안에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자찬만 하고 앉아있는 꼴입니다.

바둑 서적 등 출판 물, 단증(段證), 인터넷 사용권 한 장 못 팔아먹고 고도의 인력

(프로기사)마저 푹푹 썩히고 있으면서 ‘한국 바둑의 황금기’만 되뇌고 있습니다.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라지요? 어쩌면 절정의 타이밍은 이미 놓쳤는지도 모릅니다.

 더 늦기 전에 바둑은 세계로 뛰쳐나가야 합니다. 국경마저 허물어져가는 이 무한

경쟁 글로벌 시대에 한국은 향후 무엇을 문화적, 경제적 버팀목으로 삼을 것인지….

바둑 행정을 이끄는 책임자나 정부 당국자 할 것 없이 한 번쯤 고심해야 할 대목에

 이른 게 아닐는지요?

[이홍렬 바둑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