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 글에 쓰신 분이 세월의 힘을 빌려 이창호와 최철한의 최근 전적을 분석하셨다.
진지한 사유가 마음에 와닿는 글이지만 아직 이창호9단이 세월에 풍화되었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돌부처 이창호9단이 스승 조훈현9단을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은 스승과 또 다른 천재성과
상극의 기풍과 바둑관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가 제비 조9단과 같은 시각, 기풍을 가졌더라면 단숨에 스승을 추월하기는 힘들고
상당히 오랜 기간 치열하게 영토분쟁을 했을 가능성이 많지 않았을까?
바둑 팬들이라면 어디선가 본 적 있겠지만 한국바둑의 계보는 우연하게도 상극의 그래프로
나타난다.
조남철(실리 후 타개) - 김인(두터움) - 조훈현(스피드)
-이창호(두터움,끝내기) - ?
이창호 다음 주자를 물음표로 남겨 두었는데 많은 전문가들은 그 곳에 이세돌9단을 놓는다.
이세돌9단은 조훈현9단과 느낌은 조금 다르지만 역시 스피디하고 전투적이므로.
그런데 최근 갑자기 이창호의 천적으로 떠오른 최철한으로 인해 계보의 그래프가
명료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이창호9단 다음에 이세돌9단이 따르고 그 뒤에 최철한인가? 아니면 박영훈인가?
조금 더 두고 보면 신진기예들의 우열이 드러나겠지만 최근에 노출된 이창호 9단의
흔들림, 특히 독사 최철한 9단에 취약한 현상은 그가 30대가 되어 집중력이 저하됐다고
단정하기에는 어쩐지 동의하기 어렵다.
세상의 모든 바둑 팬들에게 이창호9단의 부동심은 화두이자 미스터리였고 믿음에 가까웠다.
그러나 15년 전을 기억해보시라.
조훈현 9단이 3차 전관왕을 기록할 때 바둑계는 그의 끝을 짐작하지 못했었다.
무려 15년 이상 장기독재를 하고도 승리에 갈증을 느끼는 조9단의 승부욕과 기량에
모두 체념하지 않았던가?
스승으로부터 왕위를 양도받은 이창호9단의 집권 기간도 그와 비슷하다.
그러나 몇년 전 이세돌9단의 파격적인 파상공세에 돌부처의 아성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고, 올해 들어서는 최철한, 박영훈, 조한승 등 신흥강호들이 심심찮게
이창호9단을 격파하고 있다.
그것은 이창호 9단이 더 이상 성취할 수 없는 정상에서의 절대고독과 후배들의 무서운
성장이 혼합되어 나타난 현상이지 그의 퇴보로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좀 장황해졌지만 이창호 9단의 절대권력이 와해되기 시작하는 조짐에 대해서
나는 개인적으로 바둑계에 흥미를 느끼고 있다.
LG배에서 이세돌9단이 혜성처럼 등장해 무대뽀 초식으로 2연승을 기록할 때
왜 세계인들이 놀랐다고 생각하시는가?
그것은 너도 나도 절대지존 이창호9단의 바둑을 닮고 싶어해 빈틈없는 수비바둑(죄송)이
대유행할 때 이세돌9단은 거꾸로 폭풍과도 같은 파괴의 미학을 선보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래서 우리는 천하의 돌부처가 휘청거리는 장면을 보고 집단 히스테리를 느꼈고
새롭게 떠오르는 천재를 발견하고 감동의 전율을 느끼는 이중의 카오스에 빠졌던 것이리라.
이창호 9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창호9단의 바둑과 다른 자기 류(流)의 바둑을 두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그가 보여준 것이다
두서없는 글이라 서둘러 매듭을 짓자면,
최철한 9단의 바둑은 이창호9단이 상대하기 거북한 기풍이라 5번기 승부에도
강미를 계속 발휘한다는 것이다.
독사라는 별명처럼 최9단의 바둑은 끈질기고 유연하며 트위스트로 똬리를 틀기 시작하면
그 압박감이 무시무시하다.
수읽기가 강해서 무차별 공격을 퍼붓는 것 같지만 공격이 실패해도 자신은 큰 타격이 없는
아주 교묘한 전법을 구사한다.
그리고 상대가 질식감에 허우적거릴 때 결정타로 독니를 꽂는다.
최철한 9단 역시 자기 만의 독특한 바둑을 만들어가고 있기에 이창호9단과 대등한 승부를
펼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천하의 모든 강자들을 도전자로 맞아 싸워야 하는 챔피언 이창호9단에게 이런 천적 하나 쯤
존재한다는 것은 또 다시 이창호 9단에게 숙제 하나가 주어졌다는 점에서
우리는 다시 이창호 9단이 성취동기를 얻고 분발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조훈현 9단이 제자에게 그토록 무수한 소나기 펀치를 맞고도 넉 다운 되지 않고 꽤나 오랫동안
화염방사기와 같은 열정을 퍼부으며 호랑이 조교 구실을 했기에 한국바둑의 생명력이
강해진 것처럼 이창호 9단도 부단히 연구를 거듭해 후배들을 조련하는 모습을
우리는 보고 싶다.
아울러 이세돌, 최철한, 박영훈,조한승,송태곤,목진석,원성진,강동윤 등의 차세대 기수들도
보다 다양한 바둑의 가능성을 찾아 연구하고 화려한 춘추전국시대를 열어 주었으면 좋겠다.
우리 바둑사의 계보가 비교적 명료한 시대적 구분을 보인 것은 그 만큼 층이 엷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독재자의 전설보다 민주화의 다양성에 따른 화려한 모자이크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