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훈현 9단은 최근 필자와의 대화에서 자신이 천재라는 바둑계의 진단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또 제자인 이창호에 대해선 “‘천재 계열’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바둑계의 유일한 천재(天才)로
중국 출신의 우칭위안(吳淸源)을 꼽았다. 한창 눈부신 성적을 작성중인 20세 전후의 유망주들 가운데 천재라고 할 만 한
기사가 있느냐고 물을 때마다 그는 언제나 “글쎄요…”하고 대답을 망설인다.
프로기사 A는
“한국 기사들 중 천재 소리를 들을 만 한 사람은 조훈현, 유창혁, 이세돌 등 3명 정도”라고 평가한다.
스타일로만 볼 때 이창호를 과연 천재라고 부를 수 있을지 좀 망설여진다고 그는 덧붙였다. 또 프로 기사 B는
“조훈현은 당연히 천재이며, 이창호가 천재가 아니란 조훈현의 말에도 동의할 수 없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프로
기사 C는 “바둑에 대한 해석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던 사람”을 천재의 기준으로 내세우면서 17세기의
도사쿠(道策), 20세기의 우칭위안과 기타니(木谷實) 3명을 천거했다. 바둑 자체가 그렇듯 바둑 천재들에 대한 평가도
정답이 없는 셈이다.
천재란 무엇일까. 국어사전은 ‘남보다 훨씬
뛰어난 재주를 타고난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꼽는 천재가 제각기 다를까. 기준이 들쑥날쑥하기
때문이다. 가장 큰 혼돈은 ‘실적’과 ‘잠재력’ 중 어느 쪽에 주안점을 두느냐 로부터 온다.
이루어놓은 것은 별로 없지만 천부의 재능만은 돋보이는 ‘천재’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별로 반짝이는 것 같지는 않은데 기념비적 발자취를 남긴 ‘천재’도 있다.
바둑계엔 이런 혼란을 해결하는
좋은 방법도 이미 고안(?)돼 있다. 전자의 경우를 ‘천재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일본의 야마베(山部俊郞)같은 기사는
빠른 수읽기와 괴력으로 항상 ‘천재’란 수식어가 따라다녔지만 타이틀 무대에서 이뤄놓은 것은 거의 없어 ‘천재형’으로
조정됐다. 조훈현이 애제자 이창호를 가리켜 “천재 계열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눈부신 착점 속도, 현란한
행마로 상대 혼을 빼앗는 타입은 아니란 뜻
으로 보인다. 그는 제자의 깊은 수읽기와 승부감각, 발군의 계산력이 얼마나 높은
경지에 이르렀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서능욱 김희중 정대상, 그리고 요즘 대활약 중인 이세돌
같은 기사가 흔히 ‘천재형’으로 불려왔다. 중국에선 건강 문제로 쓰러져 현역 활동을 중단 중인 첸우핑(錢宇平)이 천재로
꼽힌다. 반면 김인 서봉수같은 기사들은 한 시대를 풍미했음에도 천재로 지칭되는 경우는 드물다. 조치훈 박정상 등은 세계
챔프에까지 올랐건만 거의 언제나 초읽기에 몰리기 때문인지 좀체 천재로 수식되지 않는다. 실적과 이미지는 따로 움직이는
것이다. 이미지와 실적 양면에서 이 두 가지를 겸한 기사라면 조훈현 정도뿐인 듯싶다.
특정 기사를 천재로
인정하느냐의 여부는 결국 평가자의 주관적 판단에 달렸다. 필자 같은 아마추어는 프로 기사들 대부분이 천재처럼 보이는데
조훈현은 우칭위안 단 1명만을 천재로 인정한다. 그렇다면 천재의 재능이란 100% 타고나는 것일까? 그리고 바둑 천재의
경우 바둑 재능의 선천성 유무가 천재를 결정하는 유일한 요인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세계
역사를 장식했던 각 부문 천재들의 삶을 살피다보면, 천재란 해당 분야의 재능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났다기 보다는, 그
재능의 개화를 가능케 한 어떤 보편적 능력이 존재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예컨대 집중력이나 모방력, 상상력, 인내력, 호기심, 관찰력 등이
전문 분야의 재능을 점화시켜 폭발을 이뤄냈다는 뜻이다. 물론 이런 특성을 일부 갖추고도 천재 반열에 오르지 못하는
범재(凡才)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런 동력(動力)들을 그 자체로 해당 분야의 전문 재능과 동일시할 수도 없을
것이다.
천재의 전형으로 손꼽히는 뉴턴의 경우를 보자. 그가 20대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 시절, 가정부가
아침에 침대 시트를 바꾸러 그의 방에 들어가 보면 전날 저녁 식사가 손도 안댄 채 방치돼있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의
천재성을 발화시킨 것은 바로 놀라운 집중력이었던 셈이다. 어린 시절 방아깨비 한 마리의 점프 높이 변화가 재미있어 몇
시간을 매달렸던 찰스 다윈의 관찰력, 악보를 읽을 줄 모르면서도 자기 영화의 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할 수 있었던 찰리
차플린의 상상력도 천재를 완성하는 원동력이었다. 실연 상태에서 안 들리는 귀로 영웅교향곡을 작곡하고 지휘까지 해 낸
베토벤의 인내력, 두 딸을 전염병으로 잃고도 끝없는 매진 끝에 면역학을 창시한 파스퇴르의 집착력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이들 ‘천재 만들기’ 동력들은 하나같이 바둑에서도 필수적인 요소들이다.
바둑만큼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승부가 또 있을까. 상상력과 호기심, 관찰력이야 말로 바둑 게임을 위한 용어에 다름 아니다.
바둑은 게다가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끈질긴 인내를 필요로 한다. 모방력도 그렇다. 피카소는 어린 시절 화가인 아버지에 의해
철저한 모방 훈련을 거친 끝에 어느 시기부터 스스로의 변화를 집요하게 추구한 화가로 유명하다. 모방은 모든 예술 공부의
출발점이라고들 하는데, 바둑만큼 모방력이 중요한 동네는 또 없을 것이다(프로기사들은 대국 초반 신수(新手) 대신 남들이
만들어놓은 유행 정석이나 포석을 차용해 쓴다. 저작권법에 걸리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다.)
이렇게 보면 천재란
‘하늘에서 뚝 떨어진 희귀종’으로만 알고 있는 우리 상식은 다소 수정돼야 할지 모르겠다. 오히려 ‘어린 시절의 독특한
개성이 어떤 계기를 통해 특정 분야에 스파크를 일으키고, 그것이 눈부신 속도 아래 능력으로 발현된’ 천재들이 훨씬 더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천재화(天才化) 과정이 개나 소나 모두에게 가능하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명석하고 비범한 두뇌는
기본적으로 타고나야 한다.
출생 이후 환경 요건도 대단히 중요하다. 예컨대 이창호가 바둑이란 분야를 접할
기회가 없었다면 그의 재능을 꽃피울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이창호가 섭렵해보지 않은 종목 가운데 바둑 이상으로
대성할 수 있는 분야가 존재했을 수도 있다. 바둑 재능의 대명사처럼 거명되는 조훈현은 스스로 ‘천재성’을 느꼈던 분야가
바둑 아닌 마작(麻雀)이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일본 유학 시절 우연히 알게 된 마작 게임에서 그는 1년도 안 돼 프로급
실력을 발휘했다. 이에 비해 바둑은 배운지 1년 뒤까지도 1급에 못 미쳤었다는 게 그의 기억이다.
천재의
기준으로 ‘잠재력’이 우선이냐, ‘실적’이 더 중요하냐의 문제로 다시 돌아가 보자. 바둑만 아니라 스포츠 예술 학문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반짝하다가 사라져버린 ‘천재 소년’들은 수도 없이 많다. 때로는 요절하고, 또 때로는 어느 순간부터
정체(停滯)하며 쇠퇴해 버린다. ‘천재’란 사실 학술 용어에 가까워서 승부에 대입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다 보니
‘천재형’이란 절묘한(?) 표현이 생겨난 것이다. ‘천재형’이란 단어에선 ‘피지 못한 재주’에 대한 아쉬움, ‘기대에 비해
실적이 미흡한 기인(奇人)’이란 뉘앙스가 함께 느껴진다.
마무리 짓자. 승부세계에선 이기는 자가 주인이다.
바둑은 수읽기나 계산능력의 다툼으로만 알고 있지만 그 근저엔 창의력과 상상력, 그리고 19로 우주를 조감하는 철학 등
다양한 고급 개념이 깔려있다. 월등한 승률의 고수들은 이 복잡하고도 현묘한 게임의 원리나 승리 요령, 비법을 가장 확실하게
터득한 사람들이다. 이런 점에서 100개가 훨씬 넘는 타이틀을 탈곡기 벼 털어내듯 양산한 조훈현이나 이창호를 빼고 천재를
논한다는 것은 난센스다. 그들은 자기 시대 먹잇감을 몽땅 독식할 정도의 ‘비인간적’ 출중함을 통해
‘천상(天上)의 재주’를 입증했다.두 사람은 천재가 아니라니. 조훈현의 ‘천재관’은 수정이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