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제가 앞선 제20보 흑133으로 응수한 건 냉정한 수였다. 고수들은 우세하다고 적당히 물러서는 법이 없다. 수가 되면 결행해서 끝내는 쪽이 빠르다. 상대가 벼르고 벼른 검도 날카롭다. 빌미를 제공하면 언제 내가 다칠지 모른다.
만약 본도 흑1로 잡는 수가 가능했다면, 커제는 이 길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박정환은 백2로 뚫고 나갈 생각이었고, 커제는 이 변화가 쉽지 않다고 봤다. 흑A로 뚫는 건 백B가 안성맞춤이다. 우중앙 백에 큰 타격을 주지 못한채 좌중앙만 뚫린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언제든 갑자기 분위기가 바뀔 수 있다. 역전되는 건 한 순간이다. 이 바둑도, 찰나의 순간에 역전된다. 지금은 냉정했던 커제가 초지일관 하지 못한 탓이다.
제21보(140~152)
● 커제 ○ 박정환 2016.4.24 응씨배 8강전
백140,142는 현 시점에서 반상최대. 이 때 커제가 나풀나풀 나비 같은 손길로 흑143을 떨어뜨린다. 급소다. 이 수가 성립하기 때문에, 박정환은 제20보 백138로는 흑139에 먼저 단수쳤어야 한다고 후회했다.
흑149로 백 두 점을 포획했다. 이렇게 되고보니 백150도 큰 자리. 여기를 후수로 잇게 되자, 두 점을 선수로 잡은 흑은 전리품으로 선수까지 획득했다. 커제가 점점 멀리 달아나고 있다. 한국 검토실은 탄식이, 중국 검토실은 환호성이 터진다.
바로 이 때, 조심해야 한다. 축구에서도 골을 넣은 후 5분을 가장 조심하라고 하지 않던가. 흑151로 손바람을 낸 수. 커제가 이 바둑에서 범한 두 번째 실수다.
박정환은 이 바둑에서 커제가 세 번 실수했다고 얘기했다는 점을 알려드렸다. 첫 번째가 우하귀 흑▲였고, 박정환이 백△로 받아주는 바람에 댓가를 치르지 않고 넘어갔다는 점 또한 언급했다.
두 번째는 달랐다. 커제가 흑151로 빈틈을 보이자, 박정환이 백152로 돌진한다. 좌변을 손 빼면 패가 난다. 패는 요술쟁이, 불리한 쪽에서 패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당연한 얘기지만, 고수는 수를 잘 본다. 고수는 수를 빠르게 본다. 이게 때로는 독이 된다. 커제는 백152가 놓이자 마자 실수를 깨닫는다. 손바람을 냈구나, 어려운 길을 자초했구나. 이걸 몰랐다면 커제가 이겼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 때부터, 냉정하던 커제가 흔들린다.
참고도47

흑1로 지켰으면 더 이상 변수가 없었다. 얼마나 간단한가. 오히려 이럴 때는 하수가 유리하다. 하수는 언제나 중앙이 커보인다. 더구나 흑1과 같이 경계선을 확정짓는 수라면 두고 싶어서 손이 근질근질 거린다.
알파고였다면 흑1로 지켰을까? 커제가 둔 제21보 흑151은 패 뒷맛을 노리며 상대를 압박해 더 큰 이득을 보려는 수다. 알파고가 패를 못하는 건 아니지만 굳이 패를 하지 않아도 이길 때는 패를 하지 않는다. 꽃놀이패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흉내내려면, 계산에 대한 완벽한 믿음과 자신감이 동반되어야 한다.
알파고가 전성기 이창호와 닮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이유다. 본도 흑1, 어디서 많이 본 느낌이 든다. 흑1은 이창호 스타일이다. 이창호는 딱 반집만 유리해도 흑1과 같은 수를 뒀다. 무시무시한 계산력, 스스로에 대한 완벽한 믿음. 이 두 가지는 이창호를 입신(入神) 경지로 끌어올렸다.
제한시간이 짧아진 탓도 있지만, 현대 바둑에서 이런 수를 좀체 찾아보기 힘들다. 초읽기에 몰린 선수들은 대체로 최강수를 찾는다. 계산보다 수읽기에 더 자신이 있기 때문일까. 어떨 때는 감에 의존하는 모습도 보인다. 알파고와 상대했던 이세돌 역시 자성했다. "그동안 너무 감각에 의존했다. 앞으로는 계산에 중점을 둔 바둑을 두겠다." 전투 13단 이세돌이 한 얘기라 더욱 와닿는다.
제22보(153~158)
● 커제 ○ 박정환 2016.4.24 응씨배 8강전
중앙 요처를 선점당한 흑은 153으로 패를 걸 수밖에 없다. 분명 꽃놀이패다. 흑은 져도 손해가 크지 않지만, 백은 질 경우에 좌변이 떨어져나간다. 그럼에도 흑153으로 패를 결행하는 커제 손길은 씩씩하지 못하다. 이미 쉬운 길을 놓쳤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제23보(159~164)
● 커제 ○ 박정환 2016.4.24 응씨배 8강전
흑159는 기분 좋은 팻감. 손해가 없는 자리다. '고수는 아끼다 진다'는 말이 있음에도 프로들이 선수 활용을 아끼는 이유다. 반대로 백에게 159 자리를 역으로 허용해서 패한다면 눈물이 찔끔나겠지만, 이런 자리를 팻감으로 사용할 때는 즐겁다.
지금부터 진행되는 수는 패싸움 과정이다. 한 보에 몰아넣지 않고 토막낸 이유는 따낸 자리가 겹치는 걸 막기 위함. 타이젬 관전기를 바둑판 없이도 볼 수 있게 해드리고 싶은 기자 마음이기도 하다. 최근 재오픈한 타이젬 모바일이 눈에 띄게 좋아진 만큼, 스마트폰으로도 언제든지 편하게 즐겨주시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제24보(165~170)
● 커제 ○ 박정환 2016.4.24 응씨배 8강전
패싸움이 이어지고 있다. 바둑 내용에 대한 설명이 필요없는 부분이어서, 박정환도 빠르게 돌을 늘어놨다.
제25보(171~176)
● 커제 ○ 박정환 2016.4.24 응씨배 8강전
흑171은 다소 악수. 백172가 좋다. 커제가 흑173으로 때려낼 때, 백174로 한 점을 준동한 수가 탁월한 승부호흡. 이 수는 당시 생중계를 하던 많은 해설자들에게도 칭찬을 받았다.
지금 타이밍에, 백174를 그것도 팻감으로 쓴 건 대단했다는 기자에게, 박정환은 말없이 미소를 보인다. 원래 말이 없다는 점과 별개로, 프로기사들은 대개 본인 수에 대한 칭찬에는 침묵한다. 실수는 먼저 얘기하며 아쉬워하고 부족함을 스스로 책망하지만, 반대로 잘둔 수는 남이 먼저 얘기를 해줘도 맞장구조차 치지 않는 법이다.
하수는 스스로 잘못 둔 수는 감추고 잘둔 수를 부각한다. 고수는 공은 감추고 과는 드러낸다. 허물을 부각해 자성한다. 그리고 고친다. 바둑 고수가 되는 비결이 인생 고수가 되는 비결과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제26보(177~183)

● 커제 ○ 박정환 2016.4.24 응씨배 8강전
전보 백174가 멋진 팻감이었다. 흑은 이제 기분 좋은 팻감이 없다. 지금부터는 어디를 둬도 악수 팻감이다. 커제가 선택한 악수 팻감은 흑177. 가장 확실한 팻감이지만, 뒷공배를 채운 자충수다.
잘 풀릴 때는 이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흑177과 백178 교환이 이 바둑 승패를 뒤바꾸고 만다. 운명이라면 정말 기구하다.
박정환은 이 바둑을 승리한 기세를 몰아 이세돌을 2-1로 꺾고 응씨배 결승에 올랐다. 세계 3관왕에 오르며 단숨에 세계랭킹 1위를 꿰찼던 커제는 이 바둑을 패한 이후 박정환에게 판 맛을 보지 못하고 있다. 갑조리그 주장전과 LG배에서 박정환은 연거푸 커제를 제압했다. 내용도 오히려 이 바둑보다 손쉬운 승리였다.
순간의 방심과 과속. 그리고 설마설마 했던 악수 팻감 하나. 점점 역전 드라마 내용이 구체화되고 있다. 보통 영화에서는 이런 장면을 클로즈업한다. 관객들은 지금 이 일이, 저기 놓인 그 물건이 발단이 되어 뭔가 큰 사고가 나겠구나, 유추한다.
바둑은 각본 없는 드라마다. 아직은 아무도 잠시 후에 벌어질 대역전극을 예측하지 못했다. 기보를 보는 재미, 관전기를 읽는 맛이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이미 대국 결과를 알고 있음에도, 시나브로 완성되는 스토리를 보는 즐거움이 있다.
제27보(184~186)

● 커제 ○ 박정환 2016.4.24 응씨배 8강전
박정환이 백184로 한 칸 뛰고, 커제가 흑185로 응수했다. 바로 지금 시점에서, 형세는 흑 우세다. 패싸움 과정에서 변화가 일어났지만, 좌변 백 돌을 잡은 흑이 적어도 손해는 보지 않았다.
박정환은 오히려 흑 승리가 더 굳어졌다고 얘기했다. 당시 해설자들 분석 역시 다르지 않았다. 좌변이 뜯겨나간 건 아픈데, 백이 얻은 건 별로 없어보인다.
그럼에도 이 바둑은 백승으로 끝난다. 해설자들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즉 패착이 무엇인지 명료하게 밝혀내지 못했다.
박정환이 이겨서 기쁜 건 당연하다. 그런데 왠지 시원한 느낌은 없었다. 언제 역전이 된 걸까? 커제가 두고 만 마지막 실수, 패착은 어디였을까?
흑185가 놓인 장면에서 흑 승리는 부동이다. 박정환이 백186으로 밀었을 때, 커제가 금기시되는 '혼자만의 상상'을 하고 말았다. 냉정함을 잃고 삐끗했다. 박정환이 그 틈을 놓칠 리 없다.
바로 아래에 등장할 흑187이 패착, 백188이 승착이다.
박정환과 커제는 고수다. 고수도 그냥 고수가 아니라, 세계 일인자를 다투는 고수다. 고수간 맞대결. 정말 두려운 승부다. 흑185에서 흑승 불변이었던 바둑은, 백188이 놓인 장면에서 백승 불변으로 바뀐다.
제28보(187~188)
● 커제 ○ 박정환 2016.4.24 응씨배 8강전
흑187이 패착이다. 박정환은 이 수를 커제가 범한 세 번째 실수로 지목했다. 세 번째 실수 이후에는 더 이상 기회가 없다. 기회가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실수도 없다. 이미 진 상황에서 손해를 보는 건 실수가 아니라 승부수로 해석될 여지도 있기 때문이다.
박정환이 백188을 사뿐히 내려놓는다. 백승이 확정됐다. 응씨배 28강 대진추첨 때부터 예상됐던 건곤일척 승부, 박정환 대 커제 8강전. 한국 최강자 박정환이 중국1위 커제를 제압하는 순간이었다.
커제는 흑187로 A에 뒀어야 했다. 흑A를 차지했으면 흑이 이 바둑을 지는 일은 없었다. 지금부터 마지막 승부처를 집중해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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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이 전보 A자리를 두면 이긴다고 하니, 먼저 백1로 두면 어떨까? 흑이 2,4로 꽉꽉 눌러막은 후 6으로 호구를 치면 이것 역시 흑승이다. 지금 백A로 찌르는 건 흑B로 막아서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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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1에 흑2로 받는다면, 바로 이 때 백3에 둔다. 지금은 흑8로 호구쳐도 전도와는 다르다. 백9로 중앙을 돌파할 수 있다.
참고도50
이걸 모를 리 없는 커제는 흑1과 백2를 교환해서 만사 불여튼튼, 중앙 흑을 단단하게 지켜놓고 싶었다.
"커제는 아마 흑1과 백2를 교환하고 흑3에 두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박정환 9단)
백A는 흑B로 끊어서 수 부족이다. C로 때리는 패도 있어서 중앙은 문제가 없다.
참고도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