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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박정환 자전해설로 듣는 커제 정복기 1부

월간 <바둑> 6월호 상세 관전기 내용 집중해부 - 박정환vs커제 응씨배 8강

2016-06-22 오전 10:20:05 입력 / 2016-06-24 오후 3:29:12 수정

▲ 박정환 앞에 커제가 고개를 떨궜다.

실력최강 박정환이 점점 완전체로 변모하고 있다.

일생일대 승부였던 지난 4월 응씨배 8강전. 한국1위 박정환과 중국1위 커제가 격돌했다. '사실상 결승전'이라는 분석이 뒤따랐다. 전 세계 바둑 팬 이목이 집중된 건곤일척 비무에서 박정환은 커제를 딱 한 점 차이로 제압했다.

'전만법'이라는 응씨배 대국룰로 계가가 진행되고 있을 때, 대국장에 서둘러 입장한 기자는 한 눈에 승패를 알 수 있었다. 박정환의 눈빛은 날카롭고 또렷했다. 반면 커제는 차마 바둑판을 쳐다보지 못하고 얼굴을 감싸쥐며 끊임없이 자책했다.

큰 승부에서 커제에게 짜릿한 승리를 거둔 박정환은 이후 중국 갑조리그와 LG배에서 연달아 커제를 격파했다. 4월부터 6월까지 매달 한 판씩 승리를 적립한 박정환은 대 커제 상대전적에서도 4승3패로 한 발 앞섰다.

승부에는 흐름이 있다. 물꼬를 돌린 천금 같은 승리였던 박정환-커제 응씨배 8강전을 집중 조명 해본다.

※ 박정환의 월간 <바둑> 자전해설을 담았다. 응씨배 8강 대국 현장을 단독 취재했던 기자는 월간 <바둑> 6월호 관전기를 쓸 기회를 얻었다. 월간 <바둑> 6월호 상세관전기로 한 번 다뤄졌으나, 지면 관계상 싣지 못했던 부분을 바둑 팬들에게 소개한다.

▲ 월간 바둑(편집장: 이세나) 6월호 표지.

제1보(1~15) 기분 좋은 백번, 초반은 유행포석으로

● 커제 ○ 박정환 2016.4.24 응씨배 8강전

응씨배는 덤이 8점이다. 독특한 '전만법'은 깊게 들어가면 중국룰과도 다른 부분이 다소 있다. 8점이라는 수치를 한국식으로 환산하면 7집반 정도가 된다.

한국 선수들은 대체로 백을 선호한다. 박정환도 마찬가지. 커제는 2015년을 하루 남기고 이세돌에게 패할 때까지 1년 내내 '백번필승' 신화를 썼을만큼 백번에 강하다. 응씨배는 돌가리기를 맞힌 쪽이 흑백을 선택할 수 있다. 돌가리기부터 팽팽한 신경전이 벌어진다.

박정환과 커제는 모두 9단으로 단위는 같다. 박정환은 1993년생, 커제는 1997년생. 박정환은 2006년 입단, 커제는 2008년 입단. 선배 박정환이 백 돌을 한웅큼 쥐었다. 커제는 흑 돌 한 개를 바둑판 위에 올렸다.

두 개씩 나눠진 백 돌은 마지막에 두 개가 남았다. 커제가 홀짝을 맞히지 못했다. 선택권이 없는 돌가리기였다면, 돌통을 바꿔야 하는 상황이다. 박정환은 흑, 커제는 백이 된다. 하지만 응씨배는 앞서 언급했듯이 돌가리기 후 흑백 선택권이 주어진다. 커제가 틀렸으므로, 선택권은 박정환에게 있다.

이 때, 커제가 보인 반응이 재밌었다. 보통은 상대 얼굴을 쳐다보며 무언으로 의사를 묻는다. "흑 할래, 백 할래?" 백으로 두고 싶다면 돌통을 가볍게 두드린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표현하며, 흑을 들고 싶다면 백 돌통을 상대에게 내민다. 흑 돌통과 바꾸자는 뜻이다. 그런데 커제는 박정환을 보지 않았다. 작게 한 숨을 내쉬며 시선을 아래로 떨군다. 일반적인 돌가리기에서는 응당 흑백을 바꿔야 하는 상황이었음에도, 커제는 박정환 역시 백을 선택할 거라는 사실을 확신한듯 체념한채 흑을 떠맡았다.

커제가 시선을 주지 않자, 박정환 또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건곤일척 승부는 박정환 백번으로 시작됐다.

백14까지는 최근 유행 포석. 이 때 커제는 흑15로 걸쳤다. A로 갈라친 게 아니다. 커제는 흑15로 뒀다.

제2보(16~21) 양웅이 나누는 수담(手談)
● 커제 ○ 박정환 2016.4.24 응씨배 8강전

박정환-커제 응씨배 8강전은 지난 4월24일에 벌어졌다. 나흘 뒤 4월28일, 한국기원 4층 국가대표 연구실에서 박정환 9단을 만났다.

"정말 큰 승부였습니다. 승리 여운이 아직 남아 있나요?"(기자)
"이긴 바둑은 다음 날이면 바로 잊어버리는 것 같아요(웃음). 진 바둑은 최소 일주일 정도는 계속 떠오릅니다." (박정환 9단)

앞서 1보에서 커제가 흑15로 날일자 걸침을 했다는 걸 강조했다. 잠시 생각하던 박정환은 백16으로 받는다. 커제는 흑17로 두 칸을 벌렸고, 백18~20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흑이 17로 갈라치고 백이 20으로 다가온 이후 실전처럼 진행된 바둑이 많았다. 하지만, 실전과 같은 수순으로 이 형태가 나온 기보는 본 적이 없었다. 눈썰미 좋은 바둑 팬들은 "기록자가 수순을 잘못 찍은 게 아니냐"고 문의하기도 했다. 박정환에게 직접 확인해 본 결과, 커제가 둔 수는 흑15가 맞았다.

참고도1 난전

"백1로 협공할 수도 있습니다. 인터넷 바둑에서 종종 나온 형태인데, 흑6 이후 난전이 됩니다."(박정환 9단)

참고도2 선택권은 커제에게

박정환이 백1로 받았기 때문에, 공은 커제에게 넘어갔다. 커제는 흑2로 둘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백3으로 침입할 생각이었다는 박정환 9단. 백11 이후 A쪽 패를 둘러싼 공방전이 펼쳐지게 된다.

참고도3 백 모양이 훌륭하다

흑2로 귀를 탐하는 건 배석이 좋지 않다. 백3으로 협공하는 게 적격이다. 백11까지 진행되면, 의외로 흑 한 점이 축으로 잡혀있는 모습이다.

제3보(22~33) 커제 일류감각, 흑33
● 커제 ○ 박정환 2016.4.24 응씨배 8강전

백26은 22로 붙이는 수를 선택할 때부터 구상했던 변칙 정석. 한 때 꽤 유행했던 수법이기도 하다. 백32까지 실리를 차지한 백과 두터움을 얻은 흑이 극명하게 갈린다.

응씨배에는 초읽기가 없다. 제한시간 3시간을 모두 사용하면 그 즉시 벌점 2집을 받게 되며, 시간을 20분 연장할 수 있다. 도합 3시간 20분을 넘기면 또 다시 벌점 2집. 그리고 20분이 다시 주어진다. 이게 마지막이다. 3시간 39분 59초 안에 마무리해야 한다. 3시간 40분이 되는 순간, 시간패가 선언된다.

익숙하지 않은 시간 규정 탓에 초반 손길이 빠르다. 시간을 비축해두고 싶은 건 당연하다.

흑33은 큰 고민없이 놓였다. 성동격서 전법이다. 하변을 노리는듯 하지만, 실상은 좌상귀를 주목해야 한다. 흑A로 뚫고 내려갔을 때, 백B~D까지 진행된 이후 흑E로 단수칠 수 있는가. 바로 이 축머리가 흑33이다. 박정환은 흑33을 좋은 수라고 칭찬했다.

참고도4 이렇게 둘 걸 그랬나

제3보 백22로는 본도 백1도 가능했다. 흑2로 붙인다면 백3,5로 한 점을 감싸안는다. 흑14까지 주르륵 놓였을 때, 백15,17이 꿀맛 같은 자리다.

"흑이 재미없는 바둑입니다. 덤이 부담될 거 같아요. 흑2로 두지 않고 다르게 뒀을 거예요."(박정환 9단)

제4보(34~39) 혈기가 때로는 적이다
● 커제 ○ 박정환 2016.4.24 응씨배 8강전

하변을 받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좌상귀를 둘 수도 없다. 박정환은 백34,36으로 응수한다. 고수들은 이렇다. "어떻게 할래?" 물어보면, 즉답을 하는 법이 없다. 거꾸로 문제를 낸다.

이때, 혈기 넘치는 커제가 참지 못했다. 흑37,39로 돌격 앞으로를 외친다. 폭풍전야. 한 차례 소용돌이가 휘몰아칠 가능성이 높아졌다.

참고도5 참는 게 좋았다

박정환은 보고, 커제는 보지 못한 그림이다. 박정환은 흑1을 제시했다. 백이 해달라는 대로 해주라는 얘기. 백은 재빠르게 2와 3을 교환한 후, 백4로 손을 돌린다. 언뜻보면 백이 다 둔 거 같다. 그러나 고수는 언제나 히든카드를 숨겨놓는 법.

흑5가 통렬하다. 백은 6으로 응수하는 정도. 흑7도 선수다. 흑9까지 계속해서 기분을 낸 후, 흑11로 넘어가면 백 돌이 세력인지 미생마인지 분간이 안 된다. 백12에는 흑13으로 신바람을 내서 족하다.

때로는 혈기를 잠시 누르고 참는 게 더 좋을 때도 있다. 지금 상황이 그랬다. 한층 성숙해진 박정환과 패기 넘치는 커제가 대조를 이룬다. 

제5보(40~48) 일사천리 
● 커제 ○ 박정환 2016.4.24 응씨배 8강전

백40은 최강수. 좌하귀에서 나오는 형태 중 가장 어렵고 복잡한 변화다. 커제도 기세 좋게 흑41로 끊는다. 백48까지 일사천리.

이렇게 되고 보니, 흑▲ 한 점이 자연스럽게 무력화됐다. 흑■ 넉 점이 백에게 머리를 두드려 맞고 제압당한 형국이라, 참고도5에서 통렬한 일격이었던 흑A는 화석 같은 수가 됐다.

▲ 치열했던 전장. 사진 상으로 우상귀에 박정환 영토가 딱 한 집 남아있다. 백한점승.

▲ 커제를 제압하고 만감이 교차하는 박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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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YGEM / 이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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