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19 오후 3:04:42 입력 / 2016-01-19 오후 11:01:09 수정
▲ 조한승-박정환(승). 국후복기 장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반상위의 검토 만큼은 대국 못지 않게 치열했던 국후복기가 약 40분 가량 이어졌다(기사 하단에서 복기 동영상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전통과 권위의 기전이자 모든 프로기사가 선망하는 최고(最古)의 기전 국수전 도전5번기가 어제(18일) 박정환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도전자 조한승이 돌을 거두자 마자, 한국기원 2층 기자실에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은 일제히 4층 본선대국실로 올라갔다.
끝내기 단계에서 상변 패싸움이 발발해 다소 복잡한 변화가 있었지만, 국수 박정환의 승리는 부동이었다.
흑을 잡은 도전자 조한승이 덤을 낼 수 없는 국면을 재차 확인한 후 항복을 선언하면서 제59기 국수전 도전기는 박정환의 3-0 승리로 막을 내렸다.
바로 이 시점, 모든 승부가 끝난 바로 이 시간엔 언제나 '승자 인터뷰'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모든 승부사는 알고 있다. 조한승 또한 국수전에서 3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조훈현에 뒤를 이어 '新 조국수' 호칭을 물려 받은 탑랭커. 그 역시 불과 2년 전만 해도 우승을 확정지은 후 기자들에 둘러싸여 소감을 말하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제는 복기가 끝날 줄 모르고 이어졌다. 대개의 경우, 다음 대국이 있을 때는 승자와 패자 모두 복기에 열중하지만 승부가 모두 끝난 순간엔 짧은 소감만을 나눈 후 자리에서 일어난다. 승자는 우승의 감격을 누리고, 패자는 아픔을 삭히며 다음 기회를 노리기 위함이다.
'대인배' 조한승은 자신의 분신과도 같았던 국수전에서 2년 연속 후배에게 패했음에도 미소를 띤 채 복기를 주도했다. 예의가 바르고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것이 이창호를 꼭 닮은 박정환은 망부석 같은 부동자세로 다소 긴장한채 복기에 임했지만, 선배 조한승의 배려로 나중엔 살짝살짝 웃는 얼굴도 보이며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 국수 2연패에 성공한 박정환.
▲ 비록 패했지만 최선을 다해 싸운 조한승.
스튜디오에서 진행되는 생방송 대국의 경우, 승자 인터뷰를 진행하기 위해 복기를 중단시키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한창 복기를 하고 있는데 방송 관계자가 들어와 "승자 인터뷰 관계로 잠시 복기를 중단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와 같은 멘트를 하면, 김이 샌 양 대국자는 그것으로 복기를 마치는 경우가 많다. (극히 드문 사례로, 과거 이세돌은 본인이 패한 대국을 복기하던 중 상대가 승자 인터뷰를 하러 이동하자 따로 마련된 대기실에서 상대 대국자를 기다린 후, 방송이 모두 끝나고 다시 복기를 이어간 적이 있다.)
하지만 어제는 생방송 인터뷰가 없기도 했거니와, 국수전 도전기의 피날레를 장식한 마지막 경기 답지 않은 복기가 진행되는 그 순간을 아무도 중단시키고 싶어하지 않았다.
대국이 벌어진 한국기원 4층 본선대국실 바로 옆엔 국가대표 연구실이 있다. 국가대표들의 공식 훈련시간은 오전10시부터 오후5시. 훈련을 모두 마치고 선수들을 귀가시킨 유창혁 감독이 복기에 합류하면서 분위기는 한층 더 누그러졌다.
똑같은 장면이 반복되는 바람에 더 이상 찍을 사진도 없어서 복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기자들의 움직임도 덩달아 부산해졌다. 유창혁 감독이 복기에 합류한 컷을 하나 더 건질 수 있게 되었기 때문.
조한승은 0-2로 막판에 몰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어제 대국에서 흑으로 삼연성 포석을 들고나와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박정환이 준비한 삼연성 파훼법이 적절해 결국엔 실패로 돌아가게 되는데, 이 과정을 타이젬 회원들에게 소개한다.
실전진행1 삼연성을 들고 나온 도전자 조한승
● 도전자 조한승 ○ 국수 박정환 흑1부터 백4까지 정말 오랜만에 보는 '양화점 포석'이다. 이 포진은 과거 조훈현-이창호 사제가 거의 모든 국내타이틀전에서 맞붙으며 '사제 도전25번기' 등 전무후무한 일인자 쟁패를 벌일 때 판에 박힌 듯 나왔다. '속도'를 중시하는 패러다임으로 바둑이 변화하던 1990년대 초중반, 당연하게 여겨졌던 소목 대신, 한 수로 귀를 마무리 하고 다시 발빠르게 다른 곳을 걸쳐갈 수 있는 화점이 각광받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에 등장한 '미니중국식' 포석의 여파로 화점과 소목을 하나씩 배합하는 형태가 주류를 이루게 되면서 '양화점' 포석은 이내 자취를 감췄다. 흑번 공제가 늘어난 영향과 함께, 아무래도 양화점 포석은 향후 전략이 단조로워진다는 단점 때문에 흑을 잡은 선수들이 두기 꺼려했다.
조한승이 양화점 포석을 펼치자, 박정환은 큰 고민 없이 양화점으로 응대했다. 무난하게 흘러간다면 초반에 별다른 전략을 펼치지 못한 흑보다는 6집반의 공제를 받는 백이 우세할 것이라는 심산. 하지만 조한승은 대국시작 채 10분도 되기 전에 흑5,7로 양쪽을 걸쳐둔 후 흑9로 삼연성을 펼쳤다.
※파훼: 표준국어대사전에 '깨뜨리어 헐어버림'이라는 뜻으로 '파훼'라는 단어가 등재되어 있고, 동사로 파훼되다(=깨어져서 헐리다)가 있다.
실전진행2 박정환의 삼연성 파훼법, 백12,14
● 도전자 조한승 ○ 국수 박정환 박정환은 평소 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하루 종일 바둑 공부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삼연성 포진이 다소 의외였을 법도 한데, 짧은 순간에 머릿속에서 데이터를 검색해 대응책을 찾아낸다.
박정환이 선보인 삼연성 파훼법은 바로 백12,14. 삼연성을 들고나와 세력작전을 천명한 흑에게 반대로 저위로 길 것을 강요하는 고압적인 수법이다.
참고도1 흑의 주문
▲ 참고도1 백이 3으로 삼삼에 침입하는 것이 제일감. 흑8까지의 진행이 예상되는데, 바로 이것이 조한승의 주문이었다. '무결점' 박정환을 상대로 대 세력 작전을 펼쳐 중앙 힘겨루기를 통한 '한방 승부'로 끝장을 내겠다는 전략이었던 것.
사실 참고도1 형태는 과연 흑이 우세한 것인지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다(백7로 다르게 두는 수도 가능). 이번주 토요일(23일) 오후7시에 '전자랜드배 한국바둑의 전설'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빅매치 개막전에 등장하는 '폭파전문가' 조치훈이라면 노타임으로 백3, 삼삼에 들어가 실리를 차지하고 흡족해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 형태에서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은 유불리가 아니라 바로 전략. 무난한 흐름이 아니라 박정환에게 다소 생소할 '우주 전쟁'으로 몰고가겠다는 바로 그 전략이 중요하다.
참고도2 백의 주문
▲ 참고도2 이제 선택은 흑의 몫이 되었다. 만약 흑3,5로 3선을 기어서 연결하고자 한다면, 백은 즐거운 마음으로 6까지 쭉쭉 뻗는다. 평소라면 호각이라는 정석이지만, 지금은 기존에 삼연성을 펼쳤던 흑▲가 상변 백 돌들에 의해 견제를 받는 형국.
'정석을 외운 후 잊어버려라' '배석에 맞는 정석을 선택하라'는 바둑 격언이 모두 위와 같은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실전진행3 지략대결 점입가경
● 도전자 조한승 ○ 국수 박정환 다시 실전진행을 따라가보자. 조한승은 흑15로 마늘모 붙임해서 응수를 물어보는 수를 선택했다. 자신의 전략을 결정하기 전에 상대의 의사를 물어보는 것은 모든 전략의 기초이자 핵심. 박정환 또한 다음 수를 결정하기 전에 백16으로 먼저 응수타진을 한 후, 흑17을 보고 방향을 전환해 백18로 상변 쪽을 막아두었다.
여기서 조한승은 흑19와 백20의 교환을 해둔 후 흑21로 우상귀를 젖혀갔고, 박정환은 응수하지 않고 백22로 좌상귀 흑을 선공했다.
실전진행4 어려운 전투, 결말은 백 우세
● 도전자 조한승 ○ 국수 박정환 계속해서 흑23은 이런 형태에서 떠오르는 제일감. 하지만 이제 공수가 전환되었다. 박정환은 백24로 공격의 박차를 가했고, 흑25엔 강력하게 백26으로 끊어서 전면전에 나섰다. 이후 진행은 복잡하고 어려운 변화였지만, 결말은 백의 우세.
따라서 국후복기의 쟁점은 이전으로 거슬로 올라가 흑의 입장에서 새로운 대응책을 찾는 것이었다.
▲ 국후복기에 국가대표 유창혁 감독(가운데)이 합류했다.
참고도3 실전보다 흑이 더 나은 진행
▲ 참고도3 국후복기에 합류한 유창혁 감독은 흑1로 그냥 뛰는 수는 어떤지 의견을 물었다. 박정환이 백2로 덮어씌우자, 흑3,5로 안쪽에서 완생형을 갖추는 수법을 제시한다. 백이 A의 곳으로 공격해도 B의 곳에 붙여가는 수가 있어 좌상귀 흑 돌은 더 이상 공격 당할 돌이 아니다.
백이 6으로 모양을 정비하고, 흑이 손을 돌려 우하귀 7로 날일자 굳힘하는 것까지는 예상할 수 있는 진행이고, 이렇게 되면 실전보다 좋다는 중론.
참고도4 백이 편한 형태
▲ 참고도4 좌상귀쪽 돌들을 주섬주섬 들어낸 박정환은 백2로 그냥 지켜두는 수를 제시했다. 막상 이렇게 담백하게 지켜두고 나니 근거가 불확실한 좌상 흑 돌들이 여간 신경쓰이는 게 아니다. 참고도3과 달리 이 진행은 백이 재미있다는 것이 중론.
참고도5 조한승의 구상
▲ 참고도5 사실 실전진행3 백16의 응수타진이 없었다면, 조한승은 참고도5와 같이 둘 생각이었다고 한다.
참고도6
▲ 참고도6 참고도5에 이어 흑이 5로 좌상귀 삼삼을 차지하는 자리도 공수의 요처지만, 백이 6으로 먼저 걸쳐오면 국면이 단조로워지는 것을 피할 길이 없다. 나중에 백A의 곳에 침입하는 뒷맛도 신경이 쓰인다.
참고도7 좌상귀를 먼저 날일자 한 이유
▲ 참고도7 조한승이 실전진행3 흑19, 참고도6 흑3의 자리를 고집한 이유는 위의 그림과 같이 백이 4로 먼저 붙여오는 수가 싫었기 때문이다. 흑의 근거가 모두 없어지면서 좌상귀가 백의 확정가로 굳어지는 진행이 되기 때문. 하지만 이에 대해 유창혁 감독이 의문을 제기했다.
참고도8 흑3으로 뻗는 자세가 나쁘지 않다는 유창혁 감독의 의견
▲ 참고도8 유창혁 감독은 흑1로 그냥 젖혀가는 수를 제안했다. 백2에는 흑3으로 늘어둔다. 막상 흑을 공격하기 위해 협공을 하는 백 모양 또한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 백4로 낮은 한 칸 협공을 하면 흑은 5,7로 자연스럽게 흐름을 타고 중앙으로 진출한다.
참고도9 비슷한 맥락
▲ 참고도9 참고도8에 이어 백이 4로 높은 협공을 한다면 이번엔 흑5,7로 붙여가는 '가닥'이 나온다.
참고도10 후수의 선수 백4,6
▲ 참고도10 박정환은 백4로 그냥 지켜두는 수를 제시했다. 흑이 5로 터를 잡는다면 발이 느리지만 두텁게 한 번 더 백6으로 문단속을 한다. 막상 이렇게 해놓고 보니 상변 흑 모양도 자랑할 만한 모양은 아니다. 더구나 삼연성 작전을 펼친 우변 흑▲ 또한 제대로 활용되었다고 보기 힘든 모습. 담백하게 백4로 받아두는 수로 인해 이 그림도 백이 편하다고 의견이 모였다.
참고도11 좌상귀 백의 실리가 튼실하다
▲ 참고도11(백12…흑▲) 백이 참고도10 백4의 자리를 두는 것이 좋은 수라면, 먼저 흑3으로 밀어놓고 좌상귀는 흑5로 한 칸 뛰어 가볍게 처리한다면 어떨까. 박정환은 백6부터 백12로 한 점을 잇는 자리까지 튼실하게 좌상귀 실리를 챙겨둔다는 의견.
"다 챙겨버리나?"(유창혁) "(웃음)너무 짭잘한 것 같은데…"(박정환)
▲ 의견을 주고 받는 박정환과 국가대표 유창혁 감독.
참고도12 변치 않는 세계최고의 공격수 유창혁
▲ 참고도12 어떻게 해도 흑에게 좋은 그림이 안나오자, 유창혁 감독은 흑1,3으로 끊는 수는 어떠냐고 의견을 묻는다. 좌측 흑▲와 우측 흑■ 등 주변에 모두 흑 돌이 있으니 싸우고 싶다는 의견. 과연,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세계최고의 공격수' 유창혁 다운 한 수다.
참고도13 축 관계로 알려져있는 형태
▲ 참고도13 "백1,3으로 둬서 안 되는 싸움인 줄 알았는데…"(조한승) 원래 이 형태는 '축 관계'가 중요하다고 알려져있다.
참고도14 축이 안되면 흑1,3,5는 성립하지 않는다
▲ 참고도14 흑이 1부터 5까지 우격다짐으로 백을 잡으러 간다면 백8로 하나 끊어두는 좋은 수순에 의해 백10까지 축으로 몰리고 만다.
참고도15 난전
▲ 참고도15 유창혁 감독은 흑1로 끊은 후 가만히 흑3으로 빠지는 수를 제안했다. 계속해서 백4로 단수치고 이하 흑7까지는 외길수순.
참고도16 외곽 약점이 신경쓰인다
▲ 참고도16 참고도15에 이어 백8,10으로 두는 것도 필연이다. 여기서 '일감'은 수상전의 급소인 흑11이지만, 백12로 가만히 내려빠지고 나면 A의 곳에 끊는 약점이 신경쓰여 싸우기가 어렵다.
참고도17 패싸움으로 귀결
▲ 참고도17(백12…백2) 그렇다면 흑은 1로 젖히는 수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 그림은 백이 12로 되따내는 수까지 패싸움이 되는 형태. 그야말로 대 혼전이 된다. "너무 어려운데…"(유창혁)
참고도18 조한승이 제시한 해결책
▲ 참고도18 정상급 프로들도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참고도15~참고도17까지의 혼전 대신, 조한승이 제시한 해결책은 백1,3으로 두는 수. 백 보다는 흑이 더 어려운 싸움이라는 쪽으로 중지가 모였다. "백은 조금 잘못되더라도 어떻게든 바둑은 될 것 같은데, 흑은 잘못했다간 바둑이 끝나버릴 것 같다."(조한승)
참고도19 끝이 없이 이어지는 연구
▲ 참고도19 프로들의 연구는 결론을 맺기전엔 끝나지 않는다. 이번엔 백1로 뛰었을 때 먼저 흑2로 붙이는 변화를 연구하기 시작한다.
참고도20
▲ 참고도20 "그것도 생각해보긴 했는데…"(조한승) 백7로 젖혀가는 수에 유창혁 감독이 고개를 갸웃한다.
참고도21 흑이 편한 진행
▲ 참고도21(흑20…백13) 참고도20에 이어, 유창혁 감독의 손에서 흑8로 먼저 하나 들여다본 후 흑10,12로 반발하는 수가 떨어진다. 백15로 붙이는 수가 부분적인 맥점이지만, 흑26까지 되고나면 우하귀 백 대마가 아직 미생이라는 점이 걸린다.
참고도22 대동소이
▲ 참고도22(흑10…백1) 부분적으로는 참고도21 백15로 백3과 같이 두는 수가 더 낫다는 것이 유창혁 감독의 의견. 흑이 10으로 잇고 난 후, 우상귀를 받지 않고 다른 곳을 둘 수 있는 선택권을 갖게 되므로 더 좋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형태 역시 백 보다는 흑이 두기 편하다고.
참고도23 쌍방 최선
▲ 참고도23 처음으로 돌아가서, 백은 7부터 11까지 늘어두는 것이 좋다. 백13까지가 쌍방 최선의 진행. 유불리를 논하기는 어렵지만, 이 진행 역시 삼연성을 펼친 흑▲가 십분 활용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결론: 백1,3은 현재로선 삼연성을 파훼하는 유력한 대응책
▲ 결론 박정환이 구사한 백1,3의 수법은 흑의 삼연성 포진에 대한 유력한 대응책이라는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