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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사라져가는 중일 교류전/ 위기의 일본 바둑
[칼럼] 사라져가는 중일 교류전/ 위기의 일본 바둑
2004-08-16 오후 3:40:08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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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가는 중일 교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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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중 천원전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중국 일본 천원전 우승자끼리 매년 만나 3번 승부로 자웅을 겨루는 이 행사는 지난 1988년 출범, 지난 해까지 15년의 전통을 이어왔었다. 올해는 일본 측 천원 하네(羽根直樹)와 중국 측 우승자 구리(古 力)가 지난 여름 맞대결할 예정이었는데, 때맞춰 세계를 강타한 SARS(중증급성호 흡기증후군) 사태로 연기됐었다. 그러던 터에 돌연 양국 기원이 이 대회를 폐지에 합의했다는 뉴스가 날아온 것.
에 틀림없다. 실제로 이 대회는 지난 15년 간 팬들의 큰 관심속에 양국 바둑 발전에 기여해왔다. 대회 폐지 시점의 스코어는 중국이 9승 6패로 우세. 제법 인기를 모았던 이 대회는 왜 갑자기 폐지됐을까. SARS가 모든 책임을 뒤집어 써야할까?
음을 양국 모두 절감한 것이다. 그 중심에 바로 한국이 있다. 중·일 천원전 같은 행사 는 말하자면 금메달의 주인은 젖혀놓고 2, 3위자 끼리 은메달을 다투는 형국이었다. 대회 출범 당시만 해도 이런 사태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들 양국은 끝까지 이 행사에 한국을 끼어넣는데 인색했다. 비록 96년부터 뒤늦게 시작 되긴 했지만 한국에도 천원전이란 타이틀이 엄연히 존재한다.
메카는 단연 일본이었고, 그들은 바둑 보급 차원에서 거대한 대륙 중국을 파고들었 다. 여기에다 정치적 배려도 한 몫했다. 마치 미국 닉슨 정부가 중국의 ‘죽의 장막’ 커튼을 열어젖힐 때 저 유명한 ‘핑퐁 외교’를 시도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그 무렵 한국 바둑의 실력은 상당히 초라했다.
회담을 하면서 양국 바둑 교류를 제창했다. 중국은 그 2년 뒤 사상 처음 일본에 5명 의 사절을 파견한 직후 중국 바둑협회를 창설해 도약의 기틀을 마련했다. 66년 중국 문화대혁명이 발발하면서 잠시 중단되던 양국 바둑 교류는 72년 두 나라의 국교가 성립되면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85년엔 중·일 슈퍼 대항전이란 행사가 출범했다. 양국 베스트 멤버 7~9명이 정면 격돌하는 행사로 공전의 히트를 쳤다. 중국의 숨은 천재 녜웨이핑(聶衛平)이 종횡 무진 활약하며 화제를 양산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88년엔 일·중 명인전 과 일·중 천원전이 동시에 스타트했다. 2000년에 들어서자 아함·동산배 양국 우승자 끼리의 대항전도 추가됐다. 국제화 바람 속에 양국 바둑은 갈수록 외연을 넓혀간 것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 뜻하지 않은 상황이 발생했다. 바둑 후진국으로 거들떠도 안보던 한국이 갑자기 온갖 국제대회를 휩쓸기 시작한 것이다. 일시적 현상으로 간주하려 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이창호 조훈현 유창혁 등으로 무장한 한국 바둑은 90년대 중, 후반부터 거의 대부분의 대회를 독점해 나갔다. 중국과 일본 기원 관계 자들은 당황했고, 양국 팬들의 자존심도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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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중 천원전의 폐지는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그러나 현재 폐지된 양국 교류전은 이 대회만이 아니다. 이에 앞서 일·중 슈퍼대항전은 2001년 16회 대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중·일 명인전은 이보다 더욱 빨라 94년 제7회 대회가 마지막 행사가 됐다. 이제 남은 양국간 정기전은 아함·동산배 정도. 현재와 같은 추세라면 이 대회의 존속도 보장하기 어렵다. 한국과 97년부터 한·중 천원전을, 98년부터 한·중 신인왕전을 만들어 현재도 연례 행사로 거행 중이다. 그 전에 94년부터는 롯데배란 이름의 정기전을 5년간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는 이와 좀 다르다. 40여년 전부터 한국과 간헐적 교류를 했으나 그것은 수평적인 것이 못됐고, 우리를 하수 취급하면서 툭하면 행사들을 일방 중단했다. 그러다가 정작 한국이 국제 바둑계의 중심에 떠오르기 시작한 90년대 중반 무렵엔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교류 재개 기회를 놓쳐버린 셈이 돼버린 것.
건너간 조남철은 후지사와(藤澤秀行) 및 사카다(坂田榮男)에게 정선(定先)으로 대국했다. 69년 도쿄에서 첫 단체 교류전이 벌어진 결과 한국의 2승 7패, 그 뒤의 같은 행사에선 2년 연속 1승 8패로 참패했다. 그 10여년 뒤인 82년 일본이 큰 인심쓰듯 다시 속기 교류전에 응했는데, 서봉수 서능욱으로 하여금 또 한번 정선(定先)으로 두게할 만큼 그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84년 교류전서 3승 1패로 낙승한 뒤 일본은 더 이상 한국과의 정식 교류전에 셔터를 내려버렸다.
국제전에서는 한국에 이어 중국에게도 밀리는 형국이다. 행정은 답보하고 재원은 바닥났다. 모든 것이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지난해부터 혁신에 나서 조금씩 변화의 기미를 보여주곤 있지만, 바둑 실력은 여전히 ‘3위’라는데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한다. 수백년 바둑 역사 속에 세계를 리드해 왔다는 자존심은 여지없이 짓밟혔다.
그리고 역사는 순환한다는 것.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겸손일 것이다. 동양 3강 가운데 왕따(?)였던 한국이 국제 바둑의 주인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도 불가사의에 가깝다. 하지만 똑같은 이유로 한국 바둑이 구가하고 있는 ‘만월(滿月)’이 절대로 기울지 않으리란 보장은 아무데도 없다. 바둑을 통해 본 국제 사회의 흐름은 인간 사회에서 갖추어야 할 여러 가지 덕목들을 새삼 일깨워주고 있다.
[이홍렬 바둑기자님의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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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일본 바둑 일어날 수 있을까?
“일본은 없다” 몇년 전 국내에서 출간된 일본 관련 서적의 제목이다. 뭐 엄청난 베스트 셀러나 명저도 아니었건만, 이 책 이름이 요즘 느닷없이 등장하는 것은 바둑 때문이다. 가속화되고 있는 일본 바둑의 대책없는 추락이 그 묵은 책 제목을 떠올리게 한 주범이란 얘기다. 몰아닥친 한국의 돌풍으로 일본이 정상 언저리에서 밀려난지가 꽤 오래됐기 때문이다. 자국 주최의 후지쓰배를 92년까지 5연패(連覇)했던 걸 제외하면 그 이후 일본의 메이저급 국제대회 우승은 단 네 차례 뿐이었다. 그 기간 동안 한국은 23개 대회 연속 우승을 비롯해 출전하는 대회마다 연전 연승을 기록해왔다.
일본만한 경쟁국이 없다”며 애써 자위해왔다. 사실 500명을 헤아리는 두꺼운 기사 층과 정교하게 깔린 ‘바둑 인프라’는 한국이나 중국을 압도했다. 한 · 중 양국 스스로도 전체적 볼륨에선 아직 일본이 최강국임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일본의 이같은 ‘마지막 자존심’마저 허망하게 무너지는 사건들이 최근 몇년 사이 잇다르고 있는 것.
있다. 국가별로 할당된 출전 쿼터를 각국이 자체 예선을 거쳐 선발하는 LG배와 달리, 이 대회는 각국의 출전 희망자들을 한 자리에 모아 본선 티켓 임자를 가리는 소위 ‘통합 예선’이란 방식을 몇 년전부터 도입해 실시하고 있다. 이 대회는 한 · 중 · 일 3국 강자들이 서로 뒤섞여 예선을 치르므로 각국 중상위권 기사들의 실력이 고스란히 드러나게 마련이다.
오르지 못하는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다. 170명이 출전한 한국이 9명을, 32명이 나온 중국이 7명을 올려놓은 것과 비교해 쥐구멍이라도 찾아야 할 참패였다. 일본의 톱 프로로 장래를 촉망받는 다카오(高尾神路) · 나카노(中野寬也) · 야마다(山田晋次) · 쓰루야마(鶴山淳志) 등 결승 진출자 4명이 한 · 중 청년 강호들에게 모조리 패퇴한 것.
당한 바 있다. 아니, 지난 해엔 올해보다 더 심했었다. 72명의 대부대가 쳐들어와 5명이 결승에 올랐지만 결국 전멸을 면치 못했던 것. 일본은 이로써 올해 이 대회 본선에서는 가토(加藤正夫) 등 시드 멤버 4명만으로 간신히 구색을 맞춰야하게 됐다. 사태가 이쯤되고 보니 “그래도 저변에선 아직 일본이 가장 두껍다”던 강변(强辯)이 무색해져 버렸다. 일본이 한국과 중국에게 내세울 수 있는 건 오직 프로기사 숫자 뿐이고, 실력에선 최강 에이스뿐 아니라 중간층 허리에서도 최하위 전력이란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프로기사 수는 일본이 500명 선이며 한국은 190명, 중국은 한국보다 30여명이 많은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해도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바둑의 메카였다. 일본의 스타 기사들은 국내는 물론이고 외국 바둑 팬들에게도 신(神) 같이 까마득한 존재였다. 배고픈 우리 프로들은 천문학적인 일본 타이틀전 상금을 부러워했고, 신문 · 잡지 · TV 등 일본의 각종 바둑 관련 매체들은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했다. 일본기원은 해외 각국에 지부(支部) 말뚝을 꽂았고, 서구의 호기심많은 청년들이 다투어 일본 유학길에 나섰다.
세월 국가의 장려 속에 국록(國祿)을 받으며 성장한 일본 바둑은 기술적으로도 엄청난 발전을 거듭해왔다. 현대 바둑의 이론적 기틀은 이같은 과정을 거친 일본에 전적으로 힘입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조선 시대 사랑방 소일꺼리로만 취급받아온 한국 바둑이 일본에 비해 크게 낙후됐던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일본은 그 같은 ‘바둑 후진국’ 한국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온갖 수모를 안겨주었었다.
[바둑 관전 기자 이홍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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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진선 한 마디]
일본 바둑은 과거의 추억 속에 살고, 한국 바둑은 과거의 망각속에 사는 것 같습니다. 멀리도 아니고 불과 한 세대에 미치지 않는 시기에 한국 바둑은 국제적으로 인정받지도 못하는 그런 바둑 이었습니다.
일본이 과거의 영화속의 추억에 머물듯이 한국이 현재의 영화에 취하기만하여, 한 세대 전을 망각한다면, 10년, 20년후의 한국 바둑은 지금의 일본 바둑 보다 나을 거라는 보장 아무 것도 없습니다.
권사범님께서 중국 선수들보다 게으름을 핀 한국 선수들에게 격로하여 회초리를 들었다고 하는데, 아직까지는 다행입니다. 회초리 들 스승이 있지않습니까?
그러나 일본 바둑에서는 일본 기사들을 질타할 스승이 없습니다. 오청원 선생은 일본 바둑에 안주하는 분이지, 일본 바둑에 질타를 가하는 그런 입장의 분도 아닙니다.
하지만 일본 바둑의 현재가 한국 바둑의 미래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요즘들어서 부쩍 듭니다.
꾸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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