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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씨배

최철한, 그는 멋있었다

잉씨배 결승 진출 뒤 인터뷰

2008-09-29 오후 2:51:25 입력 / 2008-09-29 오후 6:26:55 수정

 

언제나 인터뷰 개시를 위해서 습관처럼 했던 질문은 소감이다. 어김없이 묻는다. 하지만 세계 정상 궤도를 넘나들다가 돌연 4년전 잉씨배 준우승 뒤 하향세를 보이다가 심기일전해 잉씨배 결승에 오른 최철한에게는 많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던 질문이었다. 잉씨배 결승에 오르고 이틀간 휴식을 취한 그와 늦은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 두기 전에는 부담이 있었는데 조금 가라 앉은 느낌이랄까, 부담을 벗은 느낌이랄까. ( 기자 : 어떤 면에서 부담이 있었죠? ) 그냥 이겨야 한다고 생각해서요.

최철한을 인터뷰하기 위해 많은 준비를 했다. 같이 결승에 올라간 이창호 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가장 먼저 취재 수첩에 적었던 질문이 바로 '4년간 힘들었나'라는 질문이다. 조심스럽지만,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분위기라는 생각에 일찌감치 묻는다. 힘들었는가.

- (혼잣말로) 그렇게 힘들었던 것도 아니고…. 아, 심난하다…. 울컥 하려고 그러네….

- (침묵이 흐르다가) 큰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예전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중요한 승부에서 지다 보니까 힘들었던 것 같아요. 이렇게 인터뷰하는 것도 오랜만이예요. 성적이 별로였으니 자연적으로 인터뷰 할 일도 없었고요. 회의도 많이 느꼈고 성적을 잘 내야하는데…. 바둑이 힘들어서 변화를 꿰해 보려고 노력했는데 잘 되지 않더라고요.

대국이 끝나고 인터뷰 요청을 했었다. 그는 멋쩍은 듯이 '뭘, 인터뷰를 해요.'라고 말하며 은근슬쩍 빠져나갔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취재 수첩의 질문들을 보더니 '휴, 심난하다'고 작은 목소리로 말을 한다. 4년간의 긴 슬럼프, 잉씨배 결승 진출로 환하게 웃을 것 같았던 예상이 틀렸다.

초반 부터 너무 강한 질문이었나. 잠시 숨 돌릴 틈을 준다. 대국한 상대 류싱에 대한 평가는.
- 생각대로 강한 기사였어요. 한가지 저에게 유리한 점이 있었다면 잉씨배에 경험이 있다는 것이죠. 4년전에 시간 안배와 감각을 익혀뒀기 때문에 유리했어요. 류싱 7단은 정작 중요 할 때 시간을 쓰지 못하고 서두르는 경향이 보였어요. 실력을 놓고 보면 절대 제가 위라고 장담 할 수 없어요. 대마 잡은 것도 운이 많이 따랐고, 요즘은 다 강해서 누굴 만나든지 5대5 승부예요.

( 기자 : 2국에서 오전 대국이 그렇게 좋지 않았는가. ) 1국을 이긴 상황이어서 자신이 있었어요. 최종국에 가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죠.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1대1 이었어도 대마를 잡으러 갔을까 의문이 드는데 (생각한 뒤) 그래도 잡으러 갔을 거예요.


대마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오니 최철한의 기분처럼 심난한 질문을 바로 던진다.
최철한은 대마 사냥을 위해 올인을 하는 경우가 많다. 대마가 죽느냐 사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오르락 내리락이니. 그가 중요한 대국에서 질 때 마다 바둑팬들은 '올인 바둑'이라며 유난히 질타를 많이 했다. 잉씨배하는 기간 동안 올라온 기사의 꼬리글 하나하나 다 읽어보는 그가 바둑팬들의 질타를 못 봤을리 만무하다. 아픈 곳을 한 번 더 찌른다.

- 이창호 9단처럼 꾸준한 기풍이 아니라서, 제 스타일 대로 잘 두고 성적을 내면 인정받을 텐데… 뭐 결과론이죠. 결국은 많이 지니까. 올해 특히 대마잡은 바둑이 많아요. 이것이 아마도 성적이 좋아진 이유인 것 같아요. 올해 집중력도 좋아진 것도 이유고요.

대마잡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예요. 전투 바둑을 만나면 버티고 버티다가 한쪽이 부러지는 것이잖아요. 처음부터 대마를 잡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죠. 불리해지면 역전을 노리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창호 9단(기풍)처럼 이기는 스타일도 있지만… 기풍이라고 생각해요. 모두 장단점이 있다고 받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물론 유연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만요. 본인에게 맞는 스타일이 있는 것이니까요.

2연패 뒤 3연승으로, 5번기 대결에서 3대0 KO승 등으로 세계 최강 이창호를 딛고 올라선 그다. '이창호 천적'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 정작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이런 점들까지도 그를 긴 슬럼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잡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 예전하고 기풍이 많이 변하셔서 천적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어요. 저도 많이 변했고요. 그런 수식어 말고 처음 둔다는 생각으로 임하려고요. 국수전이나 GS칼텍스배 등에서 이창호 9단에게 배운다는 생각으로 즐겁게 둬나갔어요. 그리고 이기다 보니까 자신감도 생기고, 좋은 영향을 받았죠. 지금은 아주 중요한 대회로 꼭 넘어야 될 관문이라고 생각해요. 배운다는 자세로 즐기면서 뒀다면 이번에 준결승과 만찬가지로 꼭 이기고 싶어요.

긴 슬럼프에서 벗어났다고 박수를 보내고 있었는데. "예전보다 자신감면에서 회복하고 있으니, 그래도 아직은 지켜봐야죠." 돌아오는 대답은 짧고 굵었다. 아직은 아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창호와의 5번기 예상에서 "글쎄요. 이창호 9단이 초반이 강하니 초반만 잘 버티면 승산이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초반 준비를 많이 하려고요. 자신은 있어요."라고 말한다. 아직 슬럼프에서 벗어나지 않았지만 결승전에 자신이 있다는 아리송한 말을 한다.

아픔을 줬던 잉씨배에서 긴 슬럼프의 허물을 벗으려는 최철한. 겨울 잠을 자는 독사가 아닌 38도로 이글이글 타올랐던 방콕의 날씨 만큼이나 생동감 넘치며 건강한 독사가 되어 주시길.

 


끝나지 않은 이야기

잉씨배 측에서 대국이 끝나고 선수들에게 태국 바둑협회 학생들에게 다면기를 해줄 것을 부탁했다. 이세돌은 대국이 끝나고 곧장 한국으로 향했고 이창호와 최철한은 다면기를 위해 방콕에 남았다. 그리고 류싱도 단장으로 온 샤오웨이강과 다면기를 하겠다며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2대0으로 끝이난 대국 때문인지(?) 바쁜 일정이 있었던 것인지 잉씨배 측 관계자들과 중국기원 관계자들이 고국으로 돌아가버리자 행사 일정이 틀어졌다. 결국 중요한 관계자들 없이 선수들만 불러다 놓고 다면기를 한다는 것은 큰 실례라면서 행사를 취소했다. 하루를 기다리던 이창호는 한국으로 향했고 최철한은 바둑TV PD, 그리고 기자와 함께 대회 장소에 며칠 더 남겠다고 한다.

이창호가 출국을 하고 다음날, 잉씨배 대회장에서 다면기 행사가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알고 보니 류싱과 샤오웨이강이 다면기를 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관계자가 없는 상황에서 태국 바둑협회는 한국 선수에게 다면기 요청을 차마 하지 못했던 것.

"저도 다면기 할래요."
의외의 대답에 놀랐다. 요청도 하지 않았던 일정에 없었던 다면기 행사였는데.

너무 센 에어콘 바람에 몸이 좋지 않다던 최철한은 6판의 다면기를 하고는 복기까지 한다. 지도기를 받은 태국 바둑 꿈나무들은 부채에 사인을 받겠다고 했고, 여러장의 사진을 찍는다. 열쇠고리, 아로마 향초 등을 감사의 선물도 전한다.

"태국 왔을 때 좋은 인상을 받아서 쾌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한국이 결승에 두명이나 올랐잖아요. 다면기 행사 한다고 했을 때 부터 남아서라도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졌지만 끝까지 남아서 바둑 보급에 힘쓰는 중국 선수들도 있는데요.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을 보면 저도 모르게 도움을 주고 싶어요."

태국 바둑협회 코삭 회장의 저녁 식사 초대에 응한 뒤 숙소로 돌아온 최철한. 이른 시각, 몸이 좋지 않다던 그는 가고 싶다던 야시장 방문도 잊은채 잠이 들었다. 120분, 다면기를 하던 그의 모습은 어느 때 보다 프로다웠고 멋있었다.



TYGEM / 정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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