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심신라면배
해피 엔딩과 새드 무비
제13회 농심 배 스케치
2012-02-24 오전 11:27:46 입력
▲이번 대회 탄샤오와 함께 최다연승(4연승)을 달성한 김지석.
S#1. 기세라는 것
눈에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는 기세.
그런 게 정말 있나 보다.
상하이에 오는 동안 다들 김지석의 날이 선 기세를 높이 샀다.
속내를 알 길은 없지만 이창호도 원성진도 김지석의 기세를 믿기에 마음 편하다고들 했다.
▲대국에 임하는 원성진.
기세라면 원성진도 만만치 않다.
지난 해 연말 생애 첫 세계타이틀을 획득하고 국내 중요 대국에서 강미를 보여주고 있으니까. 국내 팬들 또한 기풍 상 원 펀치가 씨에허에게 통하지 않을까 믿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원성진은 다소 맥없이 물러났다.
대국 전날과 당일 아침에 마주쳤지만 예민해 보여서 물음을 삼갔다.
그런데 김지석이 조심스럽게 원성진의 컨디션을 설명해준다.
"성진이 형 좀 무거워 보여요. 언제 출전할지 모르기 때문에 칼날을 제 때 벼르지 못 한다고나 할까요?"
그 점은 이창호도 마찬가지일 터.
극도로 말을 아끼는 이창호지만 그들끼리 있을 때 부장으로 먼저 출전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모양이다.
중요한 시합을 앞두고 있어 상하이에 함께 건너 온 임원들은 기사들을 식사 자리에 부르지 않았다.
이창호의 동생 영호 씨가 베이징에서 살아와 매일 저녁 기사들의 저녁을 책임졌다.
같은 17층에 투숙하고 있기에 그들과 자주 마주쳤다.
형제들처럼 함께 붙어 다니는 그들이 보기에 좋았다.
최종 결과는 아직 모르지만 상하이 원정 결과는 1승 2패.
▲아침 식사 중인 씨에허.
중국 주장 씨에허의 기세가 하늘을 찌른다.
희한하게 씨에허와 아침마다 식당에서 만나는데 너무 잘 먹는 것 같다.
어쨌거나 1패씩 안은 동생들은 창호 형한테 부담을 주어 미안한 표정들이다.
항상 이기면서 의기투합하는 관계도 좋지만 이렇게 핀치에 몰리는 관계도 나쁘지 않다.
위기에 맺어지는 관계는 서로에 대한 배려가 배어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법 아닌가?
상하이로 날아와 공통의 경험을 통해 운명을 함께 해가는 덩어리로 농심 배 삼총사의 우정도 단단해지리라 믿는다.
▲냉정침착한 씨에허.
S#2. 최종전을 앞두고한국에서도 중국에서도 씨에허를 표현하는 수사는 '침착과 냉정'이다.
전성기의 이창호를 닮았다고들 한다.
격정의 김지석, 열정의 원성진이 일단 적지에서 씨에허의 냉정함에 한발 물러섰다.
이제 마지막 한국의 카드는 이창호.
요즘 들어 준우승 제조기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을 얻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준우승이 쉽냐고 묻고 싶다.
아무튼 돌부처끼리의 대결이다.
한 수 한 수 빈틈없는 그런 수순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이제 농심배 최종국의 승부에 따라 희비쌍곡선이 그어지는 감정의 과잉표출은 아껴도 될 듯싶다.
▲기자회견 직전 농심배 책자를 보고 있는 이창호.
농심배 상금이 국외로 유출되지 않게 온몸을 던져 막은 애국지사 이창호에 관해서 국내 바둑 팬들이 좀더 관대했으면 좋겠다.
어제 타이젬 기사에 어떤 유저가 단 댓글이 인상적이다.
재미있는 한중전을 한 판이라도 더 볼 수 있어 즐겁고, 더구나 최강 씨에허에 맞서는 국보 이창호의 바둑을 감상할 수 있어 고맙다고 했다.
또 다른 유저는 후원사인 농심 신라면의 중국시장 흥행을 배려하기도 했다.
그런 표현들이 바로 성숙한 바둑문화 아닐까?
현재 중국 바둑 팬들은 열광하고 있다.
지극히 국수주의적인 응원 문구들이 실시간으로 바둑사이트에 도배되는 중이다.
그런 글들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얼마나 그 동안 치를 떨었으면 저럴까 싶기 때문이다.
최근 이창호는 확실히 전과 다르긴 하다.
누구라도 이창호에게 이길 수 있는 분위기랄까?
하지만 그 누구라도 이창호를 쉽게 이기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농심 배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바둑계의 영원한 클래식 스타인 이창호를 씨에허가 꺾는다면 대륙은 열광할 것이다.
비록 전성기의 압도적인 기량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해도 이창호는 그들에게 바둑 공한증을 불러일으킨 무적의 고수였기에 상징성이 클 수 밖에.
아아 이창호.
마샤오춘부터 시작해 창하오, 구리, 콩지에를 거치는 10여 년 세월 동안 지긋이 중국 바둑의 혈맥을 짚어왔던 거인.
오늘만큼은 과거의 찬란한 영광이나 국가의 명예, 동료기사들에 대한 배려 같은 것 두루 묻어두고 아름다운 숙적 씨에허와 함께 환상의 앙상블을 이루는 악보 같은 기보를 그려주길 바란다.

▲최종국에서 대결하는 이창호와 씨에허.
S#3. 바둑삼국지의 완결은?
형식은 한중일 삼국지이나 결론은 언제나 한중 격돌로 끝나는 드라마.
과연 앞으로 세계바둑 사는 어떻게 흘러갈까?
국가의 지원이나 바둑 인구의 저변을 볼 때 중국바둑의 성장동력은 힘차 보인다.
갑조리그와 을조리그도 순항하고 있다.
2012년에도 한국의 상위 랭커들이 대거 중국 리그에 용병으로 참전할 전망이다.
각각 계약조건이 다르지만 매 판 이기면 두둑한 수당을 받고 지면 무보수인 조건이다.
프로가 상금을 따라 움직이는 건 당연하다.
언젠가 한국과 중국의 통합 리그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일본도 시원하게 3대기전 오픈하고 한중과 손을 잡을 때 재도약의 발판이 마련되지 않을까 싶다. 상하이는 약동하는 현대 중국의 거울이다.
인구 천만을 훨씬 넘는 메트로폴리스.
현대와 과거가 공존하는데 중국인들은 통증을 느끼면서도 1930년대의 상하이에 노스탤지어를 품고 있다.
그 시기에 상하이는 서구 열강들의 식탁이었다.
병든 청나라를 두들겨패고 아무렇게나 금을 그어 조계지를 만들었다.
그 별천지에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욕망이 꿈틀대는 도시 상하이.
역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혼탁해도 그 욕망의 충돌이 지금의 발전을 가져온 게 아닐까?
어쩌면 중국인들은 그래서 혼란의 시기를 그리워하는지 모른다.
호텔에서 TV 채널을 돌리면 제국주의 시대의 드라마가 수시로 잡힌다.
▲농심배가 열리는 화팅호텔. 날씨가 흐리다.
상하이에 온지 닷새째인데 태양을 보지 못 했다.
아마도 가는 날까지 찌푸린 하늘 이고 다닐 게 분명하다.
그래도 오늘 이창호의 무형검법이 빛을 발한다면 음습한 상하이의 날씨조차도 쾌청하게 느껴질 것 같다.
과연 오늘 최종전은 해피엔딩으로 자막이 떠오를까?
아니면 새드무비로 암전이 될까?
TYGEM / 중국 상하이- 김종서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