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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화재배

불계의 외침, 반집의 속삭임

-2012 삼성화재 월드바둑마스터스 결승전

2012-12-14 오후 1:04:18 입력 / 2012-12-14 오후 1:16:38 수정


▲결승 최종국. 이세돌 9단(오른쪽)의 흑번으로 대국했다.


S#1. 명불허전 라이벌전

이세돌과 구리가 만나면 바둑은 드라마가 된다.
각자의 컨디션에 관계없이 시너지 효과가 발생한다.
무서운 신예들이 속속 출현하지만 역시 아직까지 최고의 클래스는 역시 두 사람이다.
2012 삼성화재 월드바둑마스터스는 이세돌과 구리가 결승에 오르면서 흥행만점의 대회로 품격이 더해졌다.
이세돌과 구리는 이미 32강 본선리그에서 맞붙어 4패 빅판을 기록하고 하루 두 번 혈전을 치르며 라이벌 전의 묘미를 보여주었다.
최철한과 박정환 등의 강자를 만난 준결승전에서 두 사람은 2:0 완봉승을 거두고 재회했다.
둘은 또 어떻게 현란한 강신무를 보여줄 것인가?
세계의 바둑 팬들은 주목했다.
오래전부터 라이벌 10번기 이야기가 나왔을 때 라이벌들은 마다하지 않았다.
서로를 만나면 즐거우니까.
바둑의 궁극, 승부의 절정을 맛볼 수 있으니까.
그러나 이런 저런 이유로 10번기는 무산됐는데 라이벌들은 스스로 그에 버금가는 삼성화재 3번기를 연출해냈다.
그리고 보는 이들의 심장이 떨리는 명승부를 펼쳤다.
두 차례의 반집승으로 타이틀을 거머쥔 이세돌에게 영광이 돌아갔지만 그 영광의 빛을 더욱 돋보이게 반사판을 비춰준 구리도 승자라고 생각한다.
이세돌과 구리는 21세기 바둑의 공로자들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바둑의 오묘함과 치열함을 보여주었으므로.

▲ 이세돌.

S#2. 반집의 저울추

"나는 사실 끝내기가 자신있다."
삼성화재 월드바둑마스터스 결승전을 타이젬에서 해설했던 이재웅은 한때 이세돌과 동거했던 자취방 룸메이트다.
이세돌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봤기에 표정만 봐도 느낌을 짚는다.
그가 전한 이세돌의 표현이 바로 '끝내기의 강점'이다.
이창호, 박영훈, 박정환 등 계산의 달인들이 즐비해서 이세돌은 파괴력의 바둑으로 통하지만, 사실 본인은 끝내기가 자신 있다고 말한다.
그 자신감이 이 번 3번 기에서 유감없이 발휘된 듯싶다.
구리와의 라이벌 전을 유심히 지켜보면 항상 초반 포진에서 이세돌이 밀린다.
마성의 이세돌 앞에 앉으면 대부분 주눅이 들 텐데 구리는 오히려 담대해진다.
고통을 즐기는 매저키스트처럼 상대의 채찍을 기대하는 느낌이다.
강공과 받아치기가 난무하면서 라이벌 전의 기보는 항상 예측을 불허하며 어지럽게 그려진다.
제1국, 도저히 이기기 어려운 바둑인데 무서운 집중력으로 한 걸음씩 쫒아간 이세돌이 반집을 이긴다.
제2국, 편하게 이길 수 있는 바둑인데도 초강수를 연발하며 구리가 불계승을 거둔다.
제3국, 1국의 재현으로 불리한 바둑을 야금야금 이세돌이 쪼아간다.
구리의 눈시울과 볼이 벌겋게 물들고 이세돌의 오른손 검지는 바둑 통 위에서 모르스 부호를 타전하듯 떨고 있다.
마지막 공배를 메우는 구리의 손가락이 서럽다.
이세돌의 반집승!
1국과 3국의 반집 도합 한집이니 평당 3억인 셈이다.


▲최종국 종료. 밀려드는 취재진.

중국 바둑팬들이 또 탄식한다.
어김없이 인터넷에 반응들이 길게 올라온다.
이세돌에 대한 두려움과 저주와 탄식.
그러면서도 구리의 열정에 대해 박수를 보낸다.
왜 한국인들은 저렇게 집요하고 끈질긴 것인가?
그들이 묻는다.
우리는 그저 웃기만 해도 된다.
뭐 그런 물음에 시시콜콜 대답하고 싶지 않다.
네웨이핑을 절망시킨 조훈현의 흔들기.
마샤오춘과 창하오를 떡실신시킨 이창호의 부동심.
구리를 주저앉힌 이세돌의 집중력.
이 천재들의 계보에는 알게 모르게 역사의 복선이 깔려 있거든.
동양의 거인인 중국에 흡수되지 않고 반만 년 한반도를 지켜낸 저항의 유전자까지 들먹이면 좀 과장이겠지만.
이세돌이 보여준 두 번의 반집승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눈물 같은 반집.
그것도 두 번씩 반복되면 필연이고 그만큼의 차이가 되는 것.

▲우승자 이세돌 9단(사진 가운데)에게는 3억원과 우승트로피가 주어졌다.

S#3. 29세의 클라이맥스

바둑을 가장 잘 두는 나이는 몇 세쯤일까?
과거에는 인생의 경륜까지 포함해 중년에 이르러야 명인의 경지에 들 수 있다고 했다.
마인드 스포츠로 변화하는 요즘에는 아무래도 체력적 요인을 무시할 수 없어 청년기에서 청소년기까지 내려왔다.
그런데 이세돌과 구리가 삼성화재 월드 바둑마스터스에서 불꽃을 태우면서 29세의 절정을 과시했다.
이 나이쯤이 딱 어울리지 않은가?

▲ "환갑 때까지 승부를 겨루고 싶다!"고 하는 세기의 라이벌 구리(왼쪽)와 이세돌.  

그러나 라이벌의 명암은 좀 다르다.
이세돌은 박정환에게 내줬던 랭킹 1위 자리를 되찾으며 2012년 세밑에 무서운 저력을 떨치는 중이다.
반면 구리는 중국 랭킹 10위까지 떨어진 상태.
한중 양국 프로기사 층의 차이, 신예들의 발전 속도가 본질이겠지만 어쩐지 이세돌에 비해 구리의 함량이 떨어진 느낌이다.
두 사람이 또 다시 큰 대회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마도 어렵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이 번 상하이 라이벌 전이 상당히 중요한 분수령이었다.
구리의 쩌렁쩌렁한 외침, 장했으나 아팠다.
이세돌의 은밀한 속삭임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중국의 바둑 팬들은 실감했으리라.
바둑과 축구, 양궁과 쇼트트랙 스케이트.
이런 종목들 정부에서는 보다 화끈하게 밀어주는 게 당연하다.
바둑 사에 굵은 한 획을 시원하게 내리 긁은 이세돌은 오늘 귀국한다.
공항까지는 못 나가도 마음의 카퍼레이드 대열을 함께 만들어주자.
TYGEM / 김종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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