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vs구리 10번기
D-1 역사 속의 10번기
조남철 조훈현 박지은 등도 치수고치기 경험
2014-01-25 오전 10:37:06 입력 / 2014-01-28 오후 4:04:02 수정
▲ 10번기의 화신 오청원.
오히려 너무 고요하여 아무런 일도 없는 것 같지만, 곧 뜨거운 용암은 반드시 분출하고야 말 것이다. 2014년 바둑계의 화두 '이세돌-구리 10번기' D-1이 밝았다. 오는 26일 이세돌-구리 10번기 제1국이 중국 베이징에서 막을 올린다. 한중 양웅의 빅 매치에 흥을 돋우고자 과거 역사속의 10번기를 찾아본다.
10번기하면 '살아있는 기성' 오청원(100)이다. 따라서 이세돌-구리 10번기도 오청원처럼 시대를 추월할 수 있는 대기사와 그에 필적하는 대 기사가 상대여야 한다는 필요충분조건을 떠올린다.
흔히 자신이 경험하지 않았던 일에 대해서는, 사실에다 +α가 더해져서 픽션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우리와 동시대를 사는 영웅이라고 해서 역사적 의미가 떨어진다고 볼 필요는 없다. 또한 비록 떨어진다고 해도 라이벌전 10번기는 얼마든지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이세돌-구리는 충분히 시대를 나눠가졌으며 가장 위대했던 라이벌이 아니던가.
조훈현과 이창호 시대는 독주시대였다. 그러나 이세돌 시대에서는 마침 중국에서 그에 필적하는 동갑내기 라이벌 구리가 있다. 라이벌이 존재한다는 것은 흥미를 유발하는 포인트가 많다. 이세돌-구리 10번기는 점차 선수권화 되어가는 기전행태에서 라이벌전으로 보면 될 터.
프로를 승부사라 하지만 일정한 돈과 명예를 나뉘어 갖기에 모든 것을 거는 승부와는 거리가 있다. 프로가 나서는 시합엔 큰 돈과 상대적으로 적은 돈이 걸려있다. 그래서 승자에겐 많은 돈을, 패자에겐 적은 돈을 준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는 '제로 섬'이 아니라 '하프 섬'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내 것을 거는 승부와는 차별이 있는 것이다. 쇼킹한 승부를 원하는 팬들에게는 기존의 시합들이 싱숭생숭하여 재미가 없게 느껴질 수도 있다. 영웅이 귀한 시절에 내 것을 거는 시합이 등장했으니 그것이 '치수고치기 10번기'다. 무엇을 거느냐? 바로 명예를 건다.
10번기는 과거 중국 명청시대부터 행해져왔고 일본에서 특히 발달했던 대국방식이다. 역사에서 유명한 10번기로는 황룡사(黃龍士)와 친구 서성우(徐星友)의 혈루십국(血淚十局), 범서병(範西屛)과 시양하(施襄夏)간의 저장성 당호십국(當湖十局), 그리고 1930년대에서 50년대 오청원(吳淸源)과 일본 당대 기타니미노루, 후지사와호사이, 사카다에이오 등 일류기사들과의 격전보가 있다. (오청원 10번기는 별도로 다룬다.)
▲ 이세돌-구리 10번기 포스터.
'10번기'는 프로바둑이 왕성해지기 이전, 그러니까 1920년대 일본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기전이 다양하지 못하고 오로지 승단시합 밖에 없었던 시절, 신문의 연재물로서 탁월한 효능을 발휘했던 시대적인 상황과도 딱 맞아떨어졌다. 10번기는 당연히 '치수고치기 10번기'로 인식했다.(이세돌-구리 10번기는 치수고치기가 아님) 따라서 프로들에겐 돈은 두 번째 얘기가 되고 프로로서 생명을 건 한판 승부일 경우가 흔하다.
치수고치기는 일종의 라이벌전이다. 과거 70~80년대 복싱팬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김현-허버트강, 유재두-임재근, 박종팔-라경민, 백인철-황준석 등 빅 매치가 있어왔다. 그 라이벌전을 생각하면 된다. 팬의 입장에서는 호쾌한 경기를 보는 즐거움이 있지만 선수의 경우는 그 한판 승부로 인해 쓸쓸히 링을 떠날 수도 있는 매정한 승부여서 현역선수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마추어라면 누구나 치수가 오르락내리락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치수고치기를 통해서 독한 맘이 생겨나고 또 그를 통해서만이 진정한 승부바둑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한 쪽이 열 받으면 10연패를 하다가도 또 다른 한 쪽이 불 받으면 11연패 당하기도 한다. 조치훈의 '3패 후 4연승'은 아마추어 바둑에선 식은 죽 먹기로 흔히 일어난다.
그러나 치수가 호선으로 고정되어 있는 프로세계에서는 치수가 바뀌는 일은 도무지 안 일어난다. 그래서 같은 프로끼리 정선이라는 말이 나오면 팬이나 기사들은 절대 넘어서는 안 될 선이요, 더욱이 두 점이라면 절대 당해서는 안 될 점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한국에서도 치수고치기가 있었다. 1956년 연합신문사 주최의 치수고치기는 당시 기전의 태동을 불러왔던 동아일보 국수전과 쌍벽을 이룰 만큼 인기였다. 당대 최고수 조남철 5단을 정점에 두고서 상대를 물색했는데, 당시 조남철에게 감히 호선으로 덤빌 실력자는 사실상 없었다.
어렵사리 김봉선 3단이 나섰다. 그는 이기겠다는 생각보다는 조남철에게 한 수 배워보자는 식으로 정선으로 시작했는데(당시엔 단 차이에 따라 치수가 달랐다.) 5-1로 치수가 바뀌었다. 김봉선은 "10번기 때문에 나는 망했다"는 말을 남기고 나머지 대국을 기권한 채 끝을 맺었다.
2번 타자는 원로기사 김재구 사범의 부친인 김명환 2단. 그는 2단이었지만 3단 격으로 인정하고 정선에서 출발했지만 역시 5-1로 결판났다. 다음 신호열 2단, 장국원 2단, 민영현 3단 등이 등장했지만 모두 치수가 변경되는 사태를 불러왔다. 그러자 더 이상 조남철이 나서는 10번기는 재미없다 하여 김명환-김봉선 2인자끼리의 10번기가 이어졌다.
또 과거 85년 월간「바둑」특별이벤트로 벌어진 '위험대결' '탐험대결'도 큰 인기를 모았다. 위험대결은 당시 한국바둑계를 휩쓸며 전성기를 구가하던 조훈현과, 3인자 그룹을 형성하고 있던 장수영 서능욱 강훈 김수장 백성호 등 이른바 도전5강이 번갈아가며 정선치수로 도전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단, 어느 한쪽의 2연승시 한 단계씩(정선→두 점→석 점)' 치수를 고치는 스피디한 방식을 채택한 것이 특징.
당초 정선이면 한 두 판도 아니고 열 판이라면 조훈현이 버거울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오히려 도전5강이 연전연패하며 두 번이나 두 점으로 내려가는 수모를 당해 큰 화제가 되었다. 조훈현의 괴력이 어느 정도인지 새삼 반증시킨 독무대가 된 셈이다. 결과는 비록 제자리인 정선으로 끝났지만, 정상임박그룹임을 자부하던 도전5강으로서는 톡톡히 망신을 당한 꼴이었다.
위험대결은 당시 한국에서는 처음 벌어지는 이벤트다 보니 기획자나 대국자나 열심히 바둑을 두어보겠다는 일념이 아니었다면 이뤄지지도 않았을 매치였다. 특히 대국료가 이긴 자에게만 지급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지금의 경우라면 이기든 지든 얼마간의 대국료와 위험수당까지 지급되어야 하지 않을까?
도전5강은 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으니까 '그래 한번 붙어보자'고 나섰을지 모르겠다. 사실 정선은 위험한 치수다. 그리고 2연승을 하면 치수가 고쳐진다는 것도 어려운 얘기다. 그리고 저널에서 기대하는 것처럼 이미 상업성 흥행성(치수를 바뀌는 문제)이 끼어들었기 때문에 의도한 바대로 움직여주기를 바랐다.
주지하다시피 두 점에도 도전5강은 패했다. 그러나 부정적인 면만 나와서 그렇지, 정선에도 버텼고 또 호선에도 버텼다. 그런데 가장 피크에 이르렀을 때만 가지고 자꾸 침소봉대하니까 조훈현이 세다는 사실만 부각이 된 셈.
▲ '탐험대결'에서 당시 일인자 조훈현에게 정선으로 도전하여 3승을 따내며 스타덤에 오른 유창혁.
위험대결이 인기를 끌자 월간「바둑」은 이듬해 신예유망주로 각광받던 '신풍3강(양재호 유창혁 조대현)'을 내세워 '탐험대결'을 개최했다. 이번에는 거꾸로 신예들이 기대 밖으로 분전하면서 정선과 호선을 오르내리는 양상을 보인 끝에 정선으로 끝났다. 비록 정선 치수이긴 하지만, 루키 유창혁이 천하의 조훈현을 상대로 3연승을 거두며 당당히 스타덤에 올랐다. 그때부터 신예들이 무서움의 대명사가 되었다.
사실 위험대결 탐험대결은 83년도에 벌어졌던 조치훈과 신예유망주와의 대결을 본 따 만든 것이었다. 83년 일본에서도 조치훈과 신예 유망주간에 치수고치기가 있었는데, 그 당시 고바야시사토루 왕리청 그리고 야마시로히로시가 덤볐다.
그때도 조치훈은 두 점까지 만들었다. 즉, 정선에도 이겼다는 것이다. 그 이벤트대국이 있기 불과 며칠 전에 현재 일본대표팀 감독인 야마시로에게 흑을 들고도 패했던 조치훈이지만 치수고치기에서는 거꾸로 정선에도 이긴 적이 있다.
▲ 오청원(오른쪽)-후지사와호사이. 오청원 10번기의 하이라이트였다.
가장 최근 기억나는 치수고치기 10번기가 있다. 바로 타이젬에서 2002년에 시작된 박지은과 지금은 중국으로 간 철녀 루이나이웨이의 여류최강 치수고치기가 있다.
2003년 바둑가는 세계대회 23연속 우승으로 인해 매우 정점에 달한 시점이었다. 따라서 늘 상 우승하는 세계대회도 별로 인기가 없던(?) 시절이었다. 토종여류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박지은과 자타가 공인하는 여류 세계최강 루이나이웨이 간의 대결. 과연 흥미로운 대결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둘 다 화끈한 파이터 형이라서 난타전이 불을 보듯 뻔하다.
사실 이 이벤트도 비록 여류지만 정상급 기사 간 치수고치기 10번기라는데 의의가 있었다. 두 기사 모두 일전불사를 마다하지 않는 전투적 기풍에다 해머펀치의 소유자들이어서 피 비린내 나는 대 격전이 예상되었다. 당시까지 8승2패라는 상대전적이 말해주듯 객관적인 전력으로는 루이가 엄청 앞섰다. 박지은으로서는 내심 '이젠 해볼 만하지 않겠느냐'는 자신감을 가진 듯하다. 어차피 루이를 넘지 못하고서는 정상도 없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선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겠다고 판단한 듯.
1국 개막전은 바둑TV에서 녹화 중계되었는데, 한 주 동안 방영된 모든 프로그램 가운데 시청률 톱을 기록했다고 한다. 생각 이상으로 관심을 끌자 당초 도전하는 자세로 배우겠다고 치수고치기를 받아들인 박지은이기는 했지만 첫판을 잃은 부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듯하다. 결사항전의 각오로 나선 게 주효했음인지 2국은 종반 무렵까지 박지은의 압도적인 페이스였다. 그러나 다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쉽게 승리를 챙기려는 조급한 마음으로 마무리를 서두르다 그만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다.
승부사에게 치수고치기란 것이, 지면 주홍글씨처럼 평생 지울 수 없는 치명적인 전력으로 남는 것이기에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시기상조의 도전이었다고.
▲ 루이-박지은 치수고치기는 당시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실력적으로 루이의 상대가 되지 않았던 그때 박지은은 오히려 치수를 정선으로 만들었다.
대다수 팬들도 루이가 이기는 것에 걸었다. 70퍼센트가 넘는 팬들이 일단은 루이가 이기는 것에, 그리고 10퍼센트에 못 미치는 팬들이 박지은의 승리를 예상했다. 50퍼센트 정도는 결국 정선으로 낙착될 것이라고 보았다. 프로로서는 부끄러운 치수이리라. 정선이라면.
그러나 낙심도 잠시, 5번째 대국이 벌어질 즈음 이상기류가 일어났다. 박지은은 안정을 되찾았고 급기야 루이를 극복하기 시작했다. 그 덕택에 지금까지 8국이 진행될 때까지 오히려 박지은이 루이를 정선까지 몰아놓고 있다. 바로 이것이 짜릿한 치수고치기의 맛이 아니겠는가? 팬들은 열광했다.
결국 정선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루이가 박지은을 정선으로 몰아붙인 것이 아니고 박지은이 루이를 정선으로 몰아붙였다는 것이다. 당시 타이젬 기획팀장은 회고했다. "사실 그때는 루이가 무조건 이길 줄 알았다. 그리고 치수가 바뀔 확률도 매우 높았다. 솔직히 두 점도 가능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루이는 당시만 해도 박지은에게 초반부터 앞서자 약간 방심한 게 아닌가 싶었다. 대국결과는 5-5인데 오히려 박지은이 루이를 정선으로 쏘아붙였다. 사실 2승을 거두면 치수가 바뀌는 룰은 지금 생각해도 좀 아슬아슬한 것 같다. 치수를 바꾸기 위해서 가장 경제적인 방법은 지더라도 '2승 후 1패'로 지는 것이다. 그러면 중간의 1패는 사실상 무효화되면서 치수가 고쳐지니, 당하는 쪽 입장에서는 무척 억울한 상황이 될 것이다. 치수고치기가 단순한 승패보다도 이길 때 이기고 질 때 지는 '기술'이 필요하다는 면에서 보면 역시 이벤트이다."
과거 오청원시대의 치수고치기는 쌍방 4승차가 나면 치수를 바꾸었다. 이를테면 어느 한 쪽이 4승 무패, 또는 5승1패, 6승2패가 되면 치수가 바뀐다. 2연승 시 치수 변경 방식은 한 쪽에서 잠시 방심하거나 흔들려 연패하게 되면 곧바로 치수가 내려가게 되므로 당하는 쪽 입장에서 볼 때는 매우 위험한 게임이 아닐 수 없다.
TYGEM / 진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