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열흘간 함께 했던 운동화를 벗어던진 날
천부배 4강에서 탈락한 그날, 박정환이 이야기
2018-12-22 오후 10:24:52 입력 / 2018-12-23 오전 11:11:43 수정
어느 날부터 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그가 정장에 운동화를 신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농심신라면배 부산에서도 그랬다. 그의 낯선 모습에 주변에서는 ‘구두 챙기는 것을 까먹은 것 아닌가’라는 반응이었다.
세계대회에 출전할 때면 격식을 갖추기 위해 정장과 검정 구두를 신는다. 하지만 그가 구두를 불편해하는 모습은 평소에도 자주 포착됐다. 공식적인 인터뷰나 행사 때는 구두를 신지만 대국할 때는 좀 다른 모습이었다. 대국을 시작하고 몰입하기 시작하면 그는 구두를 곧장 꺾어 신는다. 흰색 양말을 신은 날이면 그의 꺾은 구두가 더 잘 보인다.
▲일본에서 열린 월드바둑챔피언십에서 커제와 대결하던 때에도 구두 꺾어 신기.
단판 승부로 천부배 결승 진출이 결정되는 날이다. 상대는 중국의 천야오예. 그는 유독 천야오예에게 약하다. 상대전적 13승20패로 밀리고 있다. 최근 6연패다. 세계 탑랭커인 그가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상대는 없다.
참고로 천부배는 다른 대회와 달리 준결승 대진을 특색 있게 정했다. A조와 B조를 나눠 32강을 치르고, 각 조의 결승 진출자가 대결을 한 뒤 각 조의 1, 2위가 교차하여 최종 준결승 대결을 펼친다(A조1위-B조2위, A조2위-B조1위).
A조 결승에서는 장웨이제가 천야오예를 누르고, B조는 그가 신진서를 눌러 얄궂은 대진이 완성됐다. A조 1위인 장웨이제와 B조 2위인 신진서의 대결, A조 2위인 천야오예와 B조 1위인 그가 맞붙는다.
누구보다 간절히 원했을 한판이 시작됐다. 천야오예는 10분 일찍 대국장에 왔고, 다음은 정장에 운동화 차림의 그가 등장했다.
초반 대국은 잘 연구된 형태로 진행됐고, 그가 기세의 수를 두면서 좋은 컨디션을 보였다. 동행했던 기자들 중에 ‘그가 이 곳에 수를 놓자 천야오예가 ‘띠옹’하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자세를 고쳐 잡더라.’고 말했다.
시작은 좋았지만, 천야오예는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어느 때 보다 이기고 싶었을 그가 결국 돌을 거뒀다.
복기가 시작됐다는 말에 현장에 긴급하게 들어갔다. 한 뼘 더 창백해진 그의 얼굴에서 아쉬움이 보였다. 복기를 하며 대국에서 아직 빠져 나오지 못한 것 그의 모습과 함께 눈에 띈 것은 운동화였다.
불편한 구두를 벗고 운동화를 선택했던 그는 양쪽 운동화 마저 벗어 던지고 대국에 몰두했다. 그렇게 5시간을 분투했다.


현장에 있던 누구도 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지 못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했고, 또 이기고 싶었을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았기에 그랬다.
대국이 끝나고 나서 잠깐 모습을 보인 그는 훌쩍 떠났다. 아주 늦은 밤 열흘간의 중국에서의 열전을 마무리 하고 홀로 집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박정환에게 옥상달빛의 노래 ‘수고했어, 오늘도’를 들려주고 싶은 날이었다.
세상 사람들 모두 정답을 알긴 할까 힘든 일은 왜 한번에 일어날까
나에게 실망한 하루 눈물이 보이기 싫어 의미 없이 밤 하늘만 바라봐
작게 열어둔 문틈 사이로 슬픔 보다 더 큰 외로움이 다가와 더 날
수고했어 오늘도 아무도 너의 슬픔에 관심 없대도 난 늘 응원해, 수고했어 오늘도
빛이 있다고 분명 있다고 믿었던 길마저 흐릿해져 점점 더 날
수고했어 오늘도 아무도 너의 슬픔에 관심 없대도
난 늘 응원해, 수고했어 수고했어 수고했어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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