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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초폐, 심던' 프로바둑 은어는 진화 중

중장년 비교적 점잔, 젊은기사들은 약어 선호

2010-06-25 오전 10:09:46 입력 / 2010-06-25 오전 10:41:19 수정

* 이 글은 6월 22일자 조선일보에 보도된 이홍렬 바둑전문기자가 작성한 기사입니다.


"심까시 만나 완초폐 될 뻔했는데 상대가 진코짓 해주더라구. 은근하다가 완묘 심끊 당해 지고나니 진열이더군."

외계어가 아니다. 젊은 프로기사들이 요즘 사용하는 최신판 은어들이다. '번역'하자면 이렇게 된다. "강자를 만나 크게 망할(완초폐=완전 초폐인)뻔했는데 상대가 큰 실수(진코짓=진짜 코미디짓) 해주더라. 형세가 괜찮았는데(은근했는데) 상대의 끊음수(심끊)가 완전묘수(완묘)여서 진 다음 진짜 열받았다(진열)"는 뜻이다.

은어(隱語)에는 특정계층 동업자들의 희비 감정과 동패의식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특히 승부사 사회의 은어는 다른 세계에 비해 훨씬 더 칼칼하고 자극적이다. 바둑 한 판 졌다고 폐인 운운하는 건 지나쳐 보이지만 실제 현실이 그렇다. 이들에게 승리와 패배는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 딱 그대로다. 한 판 패배로 돈과 명예와 출전권 모두를 놓친 프로는 며칠 밤잠을 못 이룰 정도로 괴로워한다.

이들의 전문용어(?)에 유난히 '심장'이 많이 들어가는 것도 일상화된 긴박함과 무관하지 않다. 원래 극단적 곤경을 뜻하는 '심장 마비'에서 따온 '심'은 요즘엔 습관적 '접두사'로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심뛰'(한 칸 뜀), '심끊'(끊음수), '심던'(돌 던짐·패배선언) 등이 그런 용례들.


▲대국을 연구하고 있는 프로기사들. 이들의 은어는 검토실에서도 흔히 들을 수 있다.

줄임말을 즐기는 청소년 세대의 특성은 바둑계라고 비켜가지 않는다. '진코'(진짜코메디), '진열(진짜 열받음), '완묘 '(완전 묘수), '진까시'(진짜 까시·매우 불리한 바둑) 같은 식이다. 그렇다면 '공짱' '타짱' '끝짱'은 무슨 뜻일까. 다른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이란 뜻으로 많이 쓰이는 '짱'을 떠올리면 답이 나온다. 각각 '공격짱' '타개짱' '끝내기짱'을 의미한다.

같은 프로기사들이라 해도 10대~20대와 그 윗세대 중장년들은 각기 별도의 '은어 체계'를 가지고 있다. 40대 후반 노장 프로기사 A는 최근 후배들의 복기에 동참했다가 '제낄업'이란 표현을 듣고 며칠을 연구했으나 끝내 뜻을 알아내지 못했다. '제끼다(젖히다)'를 힙합가수들의 랩에 자주 등장하는 '첵잇엎'(check it up) 발음으로 변용한 게 널리 퍼졌다는 설명에 그는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이번엔 40대 중반기사인 B의 넋두리를 들어보자. "모처럼 꽃이 걸려 단칼 면해 보겠다고 무릎이 까지도록 땡겨 따끈따끈해졌는데, 이 친구가 자꾸 낚시질하는 바람에 스팀이 차서 사진찍고 망가져 버렸어요…." 역시 '통역' 없이는 이해 불가다. "오랜만에 약자(꽃)와 두게 돼 매번 1회전 탈락하던 신세(단칼) 면하려고 열심히 실리를 벌어들여(무릎이 까지도록 땡겨) 우세해(따끈따끈해)졌는데, 상대가 둘 듯하다 손을 거둬들이는 동작을 반복(낚시질)하는 바람에 짜증나서(스팀이 차서) 착각하고(사진 찍고) 패했다(망가졌다).

'심하게 망했다'를 10대들은 '완전 초폐인', 20대는 '뚜껑 열렸다', 30~40대는 '스팀 찼다' 또는 '끓는다'라고 표현한다. 50대 이상 노장들에겐 '열받는다'란 표준어(?) 외의 나머지는 외래어와 다름없다.

하지만 세대와 무관하게 두루 애용되는 은어도 꽤 있다. 다소 끔찍하지만 '내장이 터졌다'는 게 이에 속한다. 적의 침공으로, 또는 패(覇)의 대가로 아군 진지가 처참하게 관통당했을 때 쓰인다.

박정상(26) 九단은 "각박한 승부세계에서 긴장을 완화시켜주는 특효약"이라고 은어를 정의한다. 김영환(40) 九단은 바둑계 은어가 변화하는 세태에 맞춰 흐르는 물처럼 꾸준히 진화 중인 점에 특히 관심을 표시했다. "언어 면에선 갈수록 첨단화, 내용적으론 점점 더 격렬화해가는 추세"라는 게 그의 분석.

어쨌거나 프로기사들은 '음지'의 산물인 은어의 위무(慰撫)로 격심한 스트레스를 견디며 오늘도 361로 전장(戰場)을 누비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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